[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우리가 흔히 쓰는 민족이란 말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입니다. 이해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을 토박이말로 바꿔 놓으면 겨레입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우리는 겨레라는 말을 자주 쓰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민족이란 한자말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버렸습니다. ▲ 民族, Nationality가 아니라 겨레로 하자.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여기서 겨레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봅니다. 사전은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민족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같은 핏줄을 이어받지 못했다면 애초에 민족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대학원장을 하시는 김수업 선생님은 한 곳에 오래도록 살면서 같은 말과 삶으로 이루어진 동아리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참 쉽죠? 남에게 잘난 체를 하려는 속셈이 아니라면 민족이 아니라 겨레를 쓰고 설명도 이렇게 쉽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민족만이 아닙니다. 비행기를 최현배 선생의 말처럼 날틀로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일본 한자말파의 고집으로 비행기가 표준말이 되었고,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7. 일제에 맞선 한규설과 한용운의 집에 얽힌 이야기 만해 한용운 그는 3ㆍ1만세운동 선언자 33명 중 변절하지 않은 지사이다. 만해에 관한 일화는 참으로 많은데 그를 회유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 평의 나라 숲을 넘겨주겠다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으며,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그 만해가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尋牛莊)”이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심우장은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는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
[그린경제/얼레빗 =김영조 기자]지난 10월 13일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KOUS)에서는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바로 가야금의 명인 고 백인영 선생의 추모음악제였다. 이날 공연의 정점은 시나위 합주로 김청만(장구), 최경만(피리), 원장현(대금) 등 이 시대 최고의 명인들이 함께했다. 그런데 앞자리 가운데는 가야금 한 대와 방석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였다. 바로 고 백인영 선생은 명인들이 연주를 멈추자 영상과 음악으로 환생한 것이다. 나는 강동했고, 가슴이 미어졌다. 특히 이승에 없는 백 명인과 대담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이를 안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교수는 내게 백 명인의 수제자 이민영을 소개했다. - 백인영 선생과는 어떤 인연인가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가 권해서 백인영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제게 성금련류부터 하나하나 되짚어 가르쳐 주셨는데 저는 그때 이미 선생님의 음악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는 제가 재수하는 1년 동안 늘 저를 데리고 공연에 가셨는데 이때 어린 제게 무대 경험을 쌓게 해주시려는 듯 본인은 아쟁을 잡으시고 제게 가야금을 연주하도록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연습할 때 제 장단이 맞지 않으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느릿느릿 터벅터벅 / 덜컹덜컹 나아간다 / 한여름 뙤약볕을 / 소달구지가 나아간다 / 새끼를 외양간에 두고서 / 암소는 한 가족 먹여 살릴 / 먹거리를 팔기위해 / 달구지를 끌고서 / 읍내 시장으로 나간다 / 달구지 끄는 소는 / 닭 몇 마리 / 파 몇 십 단 / 무 몇 십 개를 이고서 돈두렁을 지나간다.(사랑학개론 소달구지에서 ) ▲ 소달구지를 타고가는 아이들 (선녀와나무꾼에서 찍음 지방에 따라서 우마차, 수레 따위로도 불렸던 소달구지를 어렸을 때 우리는 어른들을 따라 일본말인지도 모르고 구루마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소달구지는 두엄을 낼 때나 가을걷이 할 때 그리고 방아를 찧으러 갈 때, 장 보러 갈 때처럼 시골에서는 참으로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자동차가 신작로를 누비기 전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던 소달구지는 사람들의 소중한 도구였지요. 《대지》 작가 펄벅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인상 깊었던 일로 소달구지를 끌고 가면서 농부가 따로 지게에 짐을 지고 가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 농부는 소를 단순한 짐승이 아닌 생구(生口)로 생각해서 소달구지에만 짐을 맡기지 못하고 나눠졌던 것입니다. 예전 농업이 근본이었던 시절에는 농사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토우(土偶)란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는 뜻으로 어떤 형태나 동물을 본떠서 만든 토기를 말합니다. 토우는 예전에 주술적 의미, 무덤에 주검과 함께 넣는 껴묻거리(부장품)용으로 만들었습니다. 토우의 재료는 흙뿐 아니라 동물의 뼈나 뿔, 나무들로 만든 것도 있고, 짚이나 풀로도 만들기도 하지만, 많은 수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토우라는 말로 표현하지요. 이러한 토우들은 생산, 풍요, 귀신을 물리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목항아리,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목항아리(토우장식장경호, 土偶裝飾長頸壺)는 2점인데 계림로 30호 무덤 출토 목항아리는 높이 34㎝, 아가리 지름 22.4㎝이고, 노동동 11호 무덤 출토 목항아리는 높이 40.5㎝, 아가리 지름 25.5㎝입니다. 아쉽게도 이 항아리의 주둥이 부분이 깨져 조각이 달아나기도 했지만 이 단순한 항아리는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다고 하지요. 그 까닭은 바로 항아리 목 주변에 붙어 있는 사실적인 모습의 토우(土偶)들 때문입니다. 토우들은 토끼와 뱀 그리고 배부른 임산부가 가야금을 타는 모양은 물론 남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한양은 정치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중앙관청들이 늘어서 있던 육조 앞거리 곧 무교, 유동, 미동, 광통방에는 책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1800년대에 이르면 책을 펴내고, 팔고, 빌려주는 세책점(貰冊店) 따위가 있었지요. 다시 말해 이곳은 다양한 책의 유통공간이었는데 지금도 광화문사거리, 종각사거리에 대형서점이 몰려있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또 조선시대 책과 관련된 직업으로는 조생과 전기수가 있었습니다. 18세기가 되면 한양은 지식의 유통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책 중개상이 생겼고, 당시 장안에는 ‘조생(曹生)’이라고만 알려진 개인 중개상이 유명했지요. 그런가하면 책을 사서 읽기 어렵거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야기꾼을 통해서 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강독사(講讀師)’라 일렀는데, ‘전기수(傳奇叟)’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지요. 전기수는 동대문에서 보신각에 이르는 길을 따라서 종로 일대를 누비면서 백성에게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 김홍도의 담배썰기, 아래 왼쪽에 전기수가 보인다. 요즘도 청계천을 따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최근 우리는 600살 된 천연기념물 소나무가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나무는 충북 괴산에 있는 왕(용)소나무인데 붉은 줄기의 꼬임이 용의 꿈틀거림처럼 보인다 하여 용송(龍松)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삼송리 마을의 신목(神木)으로 여겨지던 이 왕소나무는 지난해 8월 태풍 볼라벤에 피해를 본 뒤 회생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뿌리를 드러낸 채 죽고 말았습니다. ▲ 저렇게 우람하던 괴산 왕소나무는 600살 나이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문화재청 제공) 우리 겨레는 예부터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 솔가지를 매단 금줄을 쳤으며, 소나무 장작불로 밥을 해먹고, 아궁이에 불을 때서 잠을 잤습니다. 소나무로 가구를 만들고, 송편을 해 먹었으며, 솔잎주와 송화주(松花酒:송화를 줄기 채로 넣고 빚은 술), 송순주(松筍酒:소나무의 새순을 넣고 빚은 술)를 빚었지요. 송홧가루로 다식(茶食:차를 마실 때 먹는 한과)을 만들어 먹고,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笭)은 약제로 쓰이며, 송이버섯은 좋은 음식재료입니다. 또 소나무 뿌리로 송근유(松根油)라는 기름을 만들어 불을 밝혔고,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5. 나라의 위급상황을 알렸던 목멱산(남산) 봉수대 (木覓山 燧烽臺) *서울 중구 예장동 8-1(시도기념물 14)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목멱산(木覓山,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목멱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여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쓰였는데 봉수대의 이름은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燧烽)라고도 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현재 남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으로 서울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에 설치한 봉수대를 이어달리기 식으로 나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올해 제567돌 한글날은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첫해였다. 그래서 이곳저곳 한글을 드높이는 행사가 벌여졌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행사가 세종대로 뒤 한글가온길에서 벌어진 한글숨바꼭질이다. 이 한글숨바꼭질 사업은 (주)컬쳐앤로드 문화유산활용연구소(소장 이동범)가 서울시의 지원으로 진행한 것이다. 어제(11월 8일) (주)컬쳐앤로드 문화유산활용연구소는 작가들과 함께 한글숨바꼭질을 돌아보고 이동범 소장과 작가들에게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 한글회관 옥상 바로 아래 벽에 설치한 한재준 서울여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작품 아는 한글이다. ▲ 광화문시대 앞 휴게공간 화단에 수줍은듯 고개를 내미는 구슬기 서울여대 조형연구소 연구원 작품 숨 과 쉼 한글숨바꼭질 탐방은 먼저 세종문화회관 옆의 문자마당에서 시작되었다. 곳곳에 숨어있는 조형물들은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구석구석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공원 바닥에 붙어 있기도 하고, 벽에 붙어 있는가 하면, 지하철 승강기 맨 꼭대기에 우뚝 솟은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풀숲에 수줍은 듯 고개를 내미는 것도 있고, 건물 옥상 바로 아래서 내려다보기도 하며, 꼬마 가로등이 되어 주변을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이번엔 전통춤을 추는 명인 후보를 소개한다. 한국무용의 정제된 멋과 함께 계곡 물 흐르듯 요동치는 춤사위로 한국무용의 참맛을 보여 온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보유자 후보(준인간문화재) 정명숙 명인이 추천하는 박지혜 씨다. 박지혜 씨는 고등학교 때 이미 한양대 콩쿨 최우수상을 받았고, 지난해 임방울 국악제 최우수상(장관상)을 받아 차세대 명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 춤은 어떻게 추게 되었나요? 어머니께서 춤을 무척이나 좋아하셨어요. 아마도 본인이 좋아하셨지만 외할머니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딸인 제가 이루어주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7살 때 어머니께서 리틀앤젤스 비디오를 가져오셔서 보여주시고는 해보라고 하셨어요. 이후 잘 한다고 어머니나 어른들이 칭찬해주시는 게 신나서 학원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병원에서 퇴원한 날 춤 공부하러 갔을 정도로 우리춤을 좋아하셨습니다. - 정명숙 선성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요? 영남대학교 국악과에 정재(궁중무용) 전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대구시립국악단 공연에 선생님께서 특별출연하셨어요. 이때 저는 선생님의 춤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