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통제사의 죽음을 애도함 혼자 힘으로 하늘의 절반을 받들어 지탱했지. 고래 같은 흉악한 도적 격살하여 거친 물결 피로 물들였고. 맹렬한 불길로 풍이(馮夷) 같은 왜적 소굴 다 태웠네. 공이 높아지니 시기와 모함의 덫 피하지 못하면서도, (나라 위해) 목숨을 깃털처럼 여겼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그대는 못 봤는가 현산 동쪽의 한 조각 비석에 양공(羊公)이 세상을 뜬 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량하구나 몇칸의 민충사(愍忠祠) 해마다 비바람에 훼손돼도 수리조차 못 하는데, 지네 나오는 사당에 소리 삼키며 우는 곡소리 들리도다 哀 李統制使 閑山島古今島 (한산도고금도) 大海之中數點碧 (대해지중수점벽) 當時百戰李將軍 (당시백전이장군) 隻手親扶天半壁 (척수친부천반벽) 鯨鯢戮盡血殷波 (경예륙진혈은파) 烈火燒竭馮夷窟 (열화소갈풍이굴) 功高不免讒妬構 (공고불면참투구) 性命鴻毛安足惜 (성명홍모안족석) 君不見峴山東頭一片石 (군불견 현산동두일편석) 羊公去後人垂泣 (양공거후인수읍) 淒凉數間愍忠祠 (처량수간민충사) 風雨年年OO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효사재 가는 길》을 보다 보면 장 이사장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그룹인 현대를 살린 이야기도 나옵니다. 장 이사장은 공직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바로 현대 부도를 막은 일이라고 하는군요. YS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 YS는 선거기간 중 자신을 괴롭힌 정주영을 손봐주려고 하였답니다.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아무래도 경쟁 후보인 YS를 많이 괴롭히지 않았겠습니까? YS는 은행장들을 전부 청와대로 불러 현대에 돈 주는 은행들은 전부 문 닫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답니다. 그때만 하여도 제왕적 대통령 시절이니 은행장들이 감히 대통령의 엄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전에 대우가 정치적인 이유로 문을 닫아 우리나라 경제에 큰 주름이 생겼었는데, 현대마저 그런 식으로 문을 닫게 하면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현대 부도는 대우 부도보다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은행장들이 머리를 썼답니다. 직접 현대에만 돈을 주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대종금에 돈을 빌려주었답니다. 현대종금은 이 돈을 받아 현대그룹 내 각 회사에 돈을 풀었구요. 그때만 하여도 현대종금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6.25 전쟁 때 경찰이나 빨치산이나 모두 나눔의 명가 효사재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를 하였다고 했지요? 이때의 이야기 가운데 그냥 덮고 가는 것이 아쉬워 몇 가지 더 이야기하렵니다. 처음 빨치산이 효사재에 내려오니까, 장 이사장 어머님은 귀중품을 뺏기지 않기 위해 숨기려고 하셨습니다. 집에 당시에 제일 좋은 재봉틀과 축음기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값비싼 부분인 재봉틀과 축음기 대가리 부분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릿대 쌓아놓은 곳에 파묻어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이를 눈치챈 빨치산 한 명이 “그 물건을 거기 놔두었다가 비를 맞으면 못쓰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 집 물건에 손을 안 대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고 갖다가 제대로 쓰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지레 의심하고 숨겼던 어머님은 당황하셨겠지요. 그리하여 축음기를 제대로 해놓으니까, 이를 즐겨 들은 사람이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었답니다. 이현상이 오면 늘 듣던 음악이 있었는데, 장 이사장은 그때는 무슨 음악인지도 모르다가 나중에 성장해서야 그 음악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라는 것을 아셨다는군요. 당시 장 이사장이 뭉툭해진 축음기 바늘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새금융사회연구소’ 장일석 이사장이 《효사재 가는 길》이라는 자서전적 책을 냈습니다. ‘자서전적’이라고 한 것은 본인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직접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장 이사장은 동문회지에 실을 원고 때문에 찾아온 대학 후배에게 틈틈이 써놓은 원고를 보여준 뒤 시간 나는 대로 후배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 결과물이 《효사재 가는 길》로 출판된 것입니다. 효사재는 장 이사장이 태어난 생가의 이름입니다. 인생 마지막은 효사재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고 싶어 제목을 그렇게 했나요? 서울법대 최고지도자 과정(ALP) 동문인 장 이사장이 저에게 책을 보내왔을 때는 그저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와! 책 재미있데요. 《효사재 가는 길》은 재무부에서 30년 공직생활을 하고 정년퇴임한 공돌이의 삶이 무슨 재미가 있겠냐는 제 편견을 싹 씻어준 책입니다. “한양을 오르내리는 손길 가운데 굶은 사람들은 이 집을 찾아왔어. 그뿐만 아니라 먼길을 오가는 손길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한 끼 청할 때가 다반사였지. 그 집 문턱을 넘는 데에는 어떤 조건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조금 있으려니 바람의 힘이 거칠고 구름이 어둑어둑해지면서 사방이 막히더니 비가 뿌리다가 눈이 날리다가 하였다. 파도가 산처럼 높아져 배가 탄환처럼 흔들리고 바람에 거품이 날려 위로 쏟아지니 뱃사람들 대부분 정신이 아뜩하니 넘어졌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뒷 돛대 아래에 앉아 있었다. 전에 좌수포(左須浦, 현 대마시)로 갈 때 방에 누워있다가 어지러워 이리저리 굴렀던 것을 경계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날 파도는 좌수포에 견주어 열 배는 더 위험하고 나빴다. 그러나 나는 저녁 내내 어지럽지 않았으니, 이는 키 위쪽에 나와 앉아 눈으로 파도의 위세를 직접 본 덕택이다. 죽고 사는 것에 이르렀을 때 처음에 맡겨버리면 다시는 두려워할 바가 없다. 저 파도의 세력이 몹시 미친 것 같을 때는 마치 큰 산 하나를 보는 것 같다. 아래는 검푸르고 위는 하얗고, 또 그 위는 높고 험한 눈으로 쌓인 산봉우리가 뱃머리를 맞이한다. 그러면 뱃머리는 높이 이마 위에 있다가 흔들리면서 나아가다가 한 번 꺾이고 배의 고물이 또 정수리 위에 있게 된다. 이어서 왼쪽으로 구르다가 오른쪽으로 구르기를 각각 두세 차례 하고, 반드시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흔들린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노라이프 김석영 대표가 세 번째 시집 《나무가 되고 싶었다》를 냈습니다. 2018년에 첫 시집 《길》을 내더니, 벌써 3집 시집을 냈네요. 김 시인은 처음에 팽목항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바람에 날리는 추모 리본을 보면서 갑자기 시심(詩心)이 트였다고 하더니, 한 번 트인 시심의 샘물에서 계속하여 시의 냇물이 흘러나오는 모양입니다. 이번 시집의 제목은 《나무가 되고 싶었다》군요. 평창 속사리의 숲속에 땅을 사서 주말이면 달려가 손수 목공이 되어 게스트하우스를 짓더니, 아예 나무가 되고 싶었던 건가요? 나무가 되고 싶었다 누구나 나의 그늘에 누구나 잠시 머물며 맘 편히 쉬어 가도록 (중간 줄임) 나무가 되고 싶었다 만남과 이별 너머로 가을을 떠나보내고 외로운 자의 친구로 시집의 제목이 된 시입니다. 평소 넉넉한 웃음으로 사람들에게 따뜻한 돌봄을 아끼지 않는 김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시이군요. 이런 따뜻한 시인이기에 지갑 속에는 늘 천 원짜리 지폐를 가지고 다닙니다.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 있습니다. 유혹을 대비하여 지갑 속에는 항상 천 원짜리 두세 장을 넣어 놓습니다. (중간 줄임) 터미널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불편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서예가 중리 선생으로부터 부채를 선물 받았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부채를 펼쳐 드니, 부채에는 중리 선생의 특유의 휘날리는 필체로 ‘妙用時 水流花開’라고 쓰였습니다.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앞 구절까지 하면 이렇습니다. 靜坐處 茶半香初 정좌처 다반향초 妙用時 水流花開 묘용시 수류화개 고요히 앉은 자리 찻잔을 반을 비웠어도 향기는 처음과 같고 미묘히 흐르는 시간 속에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는구나 초의선사에게 써 준 글씨인 줄은 몰라도,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추사가 쓴 위 글귀가 나옵니다. 이 글귀는 많이 보던 추사의 다른 글씨와 또 다른 맛입니다. 추사는 참 다양한 서체의 글씨를 남겼습니다. 그런 다양한 서체가 바탕이 되어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추사체가 완성된 것이라고 하겠지요. ‘水流花開’라는 문구는 원래 송나라 시인 황정견의 시에 나오는 시구입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萬里長天(만리장천) 구만리 긴 하늘 雲起來雨(운기래우) 구름 일고 비 내리네 空山無人(공산무인) 빈 산에는 아무도 없는데 水流花開(수류화개)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그런데 ‘空山無人 水流花開’ 시구는 소동파의 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조선팔도의 7-8할은 쓸쓸한 황무지로 변하여 농사짓는 사람은 한명도 없고, 숲속을 숨어 헤매며 굶어 죽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또는 들판, 산, 숲속으로 숨지 못하고 적에게 살해당한 시체, 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안타까운 것은 두세 살 되는 아기가 엉금엉금 기면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이었으니, 그 누가 이를 연민하지 않으랴. 그 누가 이를 한탄하지 않으랴. 조선의 승상(丞相) 류성룡은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솔잎과 나무껍질을 가루로 만들고 쌀가루를 섞어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식량에는 한도가 있고 굶주린 사람은 한이 없어서 마침내 이들을 구할 수가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일본의 대하소설 《에혼 다이코기(絵本太閤記)》 7권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그렸네요. 특히 두 세 살 되는 아기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은 이를 읽는 저로서도 가슴이 저립니다. 위 소설에 류성룡이 나오지요? 이 소설의 장면은 작가가 서애 류서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장면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런 생각을 하며 적벽을 쳐다보는데, 이 교수님이 오른쪽 약간 체구가 작은 절벽 위에서 내려오는 검은 줄이 무엇인지 알겠냐고 물어보신다. 나는 순간 전깃줄인가 하였으나, 이 교수님은 저 절벽 뒤 샘물에서 물을 받아 내리는 것이란다. 그렇지. 아무것도 없는 저 절벽 위에서 전깃줄만 딸랑 내려올 리는 없겠지. 뒤를 돌아보니 가느다란 물 파이프는 어느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집 앞에는 평창강 힐링하우스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펜션이구나. 아름다운 매화마을에 펜션이 없을 리가 없지. 이 교수님은 주인장이 자기와 같은 천주교 교인이라고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자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 한쪽에 성모마리아가 합장하면서 우리를 환영하고 있는데, 주인장이 나오면서 이 교수님을 보고 반가워한다. 그러는 사이 주인장 아내는 굳이 차 한 잔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차를 내온다. 차를 마시기 전에 절벽 위에서부터 끌어온 생수를 먼저 마신다. 의외로 연약한 물 파이프에서 생수가 힘차게 나오고 있다. 물맛이 기가 막히다. 차를 마시며 주인장 내외와 담소를 나누는데, 딸이 이대 로스쿨을 나와 서울의 어느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단다. 이 교수님이 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능선을 넘어가니 금방 강가로 내려서고 둘레길은 강변을 따라간다. 아까 이정표에서 본 강변길이 지금부터 시작이구나. 길 왼쪽의 논에는 파종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써레질이 되어 있다. 그리고 써레질 자국이 보이도록 살짝 채워진 물 위로 절개산이 몸을 비추고 있다. 저 논에 써레질 하는 황소 한 마리 있다면 잠시 아스라한 어릴 때 추억에 잠기겠지만, 저 논은 트랙터로 써레질을 하였겠지? 몇 마지기 논밭 뒤로 마을이 보이는데, 저 마을이 매화마을이겠구나. 강변마을은 언제 보아도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강변을 따라 걷는데 시비(詩碑)가 보인다. 바로 이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김삿갓 시비다. 김삿갓(1807~1863)이 고향인 영월군 하동면으로 가다가 이곳 평창강 경치에 발목을 잡혀 하룻밤 자고 떠났단다. 그때 쓴 ‘강가(江家)’라는 시가 지금 시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船頭魚躍 銀三尺 선두어약 은삼척 門前峰高 玉萬層 문전봉고 옥만층 流水當窓 稚子潔 유수당창 치자결 洛花入室 老妻香 낙화입실 노처향 뱃머리에 물고기 뛰어오르니 은이 석자요 문 앞에 산봉우리 높으니 옥이 만 층이라 창 바로 앞에 물 흐르니 어린아이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