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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동농 김가진이 상해로 떠나면서 쓴 시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7]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國破君亡社稷傾(국파군망사직경)  나라는 망하고 임금도 죽어 사직은 기울었는데

包羞忍死至今生(포수인사지금생)  부끄럼 가득 안고 죽지 못해 지금껏 살아있었네

老身尙有沖霄志(노신상유충소지)  몸은 늙었지만 아직 하늘을 찌를 뜻이 남아있으니

一擧雄飛萬里行(일거웅비만리행)  한 번 날아올라 만리 길을 떠나노라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던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이 1919년 10월 무렵 상해로 떠나면서 쓴 시 ‘上海發行日口號(상해로 떠나는 날에)’입니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고 하면 얼른 친일파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농은 조선의 마지막 대신이었기에 일제의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방적으로 작위를 받았던 것이지요.

 

그 대신 동농은 연금 받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위 시에서 보듯이 동농은 망해버린 나라의 대신으로서 일제 치하를 살아가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3.1만세운동 뒤 대동단이 찾아옵니다. 대동단은 3.1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말 무렵 3.1 운동에 자극을 받아 전협, 최익환 등이 주동이 되어 만든 독립단체로 이들은 동농에게 대동단 총재를 맡아달라고 요청하였고, 동농은 흔쾌히 승낙합니다.

 

그 뒤 동농은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1919년 10월 무렵 아들 김의환과 함께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넘어 상해로 망명합니다. 동농이 망명해오자 상해임시정부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습니다. 일제에게 작위를 받은 조선의 대신이 합류한다면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임시정부의 위상은 한층 올라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당시 일제는 한일합방 당시 조선의 관료들이 전부 쌍수를 들어 한일합방을 환영하였다고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농의 망명은 이런 일본의 허구적 선전을 깨부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고요. 그렇기에 일본은 동농의 망명에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하든 동농을 다시 조선으로 끌고 오려고 하였으나, 미수에 그쳤습니다.

 

대동단은 동농의 상해 망명이 성공한 후, 이번에는 의친왕 이강도 망명시키려고 하였으나, 이 망명 기획은 의친왕이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지금의 단동)역에 내렸을 때, 미리 정보를 탐지하고 기다리던 일경에 의해 수포가 되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참 아쉬운 순간이었지요. 동농은 망명 기차 안에서도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 ‘火車中有作(열차 안에서 짓다)’라는 시입니다.

 

民國存亡敢顧身(민국존망감고신)  백성과 나라의 존망 앞에 어찌 이 한 몸 돌볼까

天羅地網脫如神(천라지망탈여신)  천라지망(天羅地網)을 귀신처럼 빠져나왔네

誰知三等車中客(수지삼등차중객)  그 누가 알까? 3등 객차 속 저 나그네

破笠蔽衣舊大臣(파립폐의구대신)  깨진 갓에 누더기 걸친 옛적의 대신임을

 

* 천라지망(天羅地網) : 하늘과 땅에 쳐진 그물이라는 뜻으로, 피하기 어려운 경계망이나 재액(災厄)을 일컫는 말

 

시를 읊으면서 깨진 갓에 누더기 걸치고 천라지망을 빠져나오는 동농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일경의 흉악한 손아귀를 벗어날 때까지 동농은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요?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조선의 대신들 가운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나선 사람은 동농 딱 한 사람뿐입니다. 눈 딱 감고 일제가 주는 연금을 받고 편히 살 수도 있었을 동농. 그러나 분연히 이를 떨쳐버리고 스스로 형극의 길로 들어선 동농 김가진! 그를 존경합니다.

 

 

동농은 상해에서 대동단의 총재이자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만주의 북로군정서로부터도 고문으로 추대를 받습니다. 김좌진 장군이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올 것을 권유한 것이지요. 77살의 노대신이 이젠 무장투쟁의 길로도 나서려고 하였군요. 그러나 동농이 만주로 건너갈 준비를 하는 동안 그만 1922년 7월 4일 동농은 상해에서 눈을 감습니다.​

 

임시정부의 가장 큰 어른이 가시자 임정은 성대히 장례를 치룹니다. 그리고 동농을 상해 만국공묘에 안장합니다. 동농의 주검은 아직도 상해에 그대로 있습니다. 동농도 벌써 고국으로 모셔와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동농이 충청도 관찰사 시절(1906~1907) 지역 의병장 민종식 등을 체포했다는 일각의 주장으로 이는 미뤄지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독립유공자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서훈도 아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동농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받는 오해일 뿐, 동농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병을 탄압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농의 손자 김자동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주차군사령부의 보고에는 일본군이 체포한 것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당시 힘이 약한 조선의 관찰사가 일본군의 행동을 저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동농은 일본군 몰래 일본군이 잡은 의병을 슬쩍 놔주기도 하였고, 그대로 두면 일본군이 죽일까봐 서울로 보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각의 의문이 있다고 스스로 안락한 자리를 박차고 형극의 길로 들어선 동농을 이대로 방치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동농을 조국의 품으로 모셔오기를 촉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