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백범이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옥에서 수감 중 탈옥하여 전국을 떠돌 때, 백범은 잠시 마곡사에서 승려로 출가하기도 합니다. 불교에 대한 뜻도 있었겠지만, 몸을 숨기기 좋다는 것도 계산에 넣었겠지요. 백범의 법명은 원종(圓宗)입니다. 백범에게 공손하게 출가를 권유하던 하은당 스님은 백범이 일단 머리를 깎자, 태도가 180도 돌변하여 백범을 구박하기 시작합니다. 백범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욕을 하고, 장작 패고 물 길어오는 온갖 궂은일을 시킵니다. 백범은 6달 만에 마곡사를 떠납니다. 당장 환속한 것은 아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좀 더 공부를 하겠다는 구실로 마곡사를 떠난 것이지요. 백범이 떠난 뒤 하은당 스님은 사고로 죽습니다. 석유통 속의 기름이 질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본다며 불붙인 막대를 석유통에 넣었는데, 아! 글쎄! 석유통이 폭발하는 바람에 곁에 있던 보경당 스님, 포봉담 스님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간 것이지요. 저런! 그렇게 하더라도 부처님이 보호해주실 것으로 믿었나? 세 스님이 함께 저 세상으로 가자 마곡사는 총회를 열어 사찰 재산을 관리하고 법통을 이어갈 스님으로 원종 스님을 뽑습니다. 원종 스님이라고 하니까 금방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서울법대 최고지도자 과정(ALP) 6기 동창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정우철 회장님이 참석한 동기들에게 책을 선물해주셨네요. 평소 독서를 많이 하시는 정회장님은 책을 읽다가 감명을 받은 책이나 다른 사람들도 같이 보았으면 하는 책은 다량으로 구입하여 주위 지인들이나 자신의 회사 직원들에게 선물합니다. 전에 사무실로 정회장님을 방문하니, 회장실 옆방을 아예 서가실로 꾸며놓았더군요. 정회장님이 이번에 선물한 책은 일본의 소설가 와타나베 준이치(1933 ~ )가 쓴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다산초당)》라는 책입니다. 책 표지에는 부제로 ‘초조해하지 않고 나답게 사는 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부제를 보니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네요. 이 책은 초조해하지 않고 나답게 살려면 둔감해져야 한다는, 와타나베가 의사로서 소설가로서 자신의 인생에서 체득한 지혜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2007년 2월에 나온 이 책은 일본에서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군요. “인생은 연극무대다.”라는 말이 있지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자신의 본래 모습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에서 벗어나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그 동안 《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리즈를 내면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했던 이윤옥 교수가 이번에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을 냈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로 선정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한 책에 모은 것이지요. 지금까지 국가유공자로 선정된 여성독립운동가는 모두 298명인데, 이윤옥 교수는 여기에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이자 왕산 허위 집안의 손녀인 허은 지사(1907~1997)와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지사(1889~1979)를 포함하여 300인 인물사전을 냈습니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여성독립운동가가 어찌 이들 뿐이겠습니까? 이보다 훨씬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제가 전에 하얼빈 동북지방 열사기념관에 갔을 때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한국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자료를 볼 수 있겠더군요. 책을 펼치고 우선 명단을 주욱 훑어봅니다. 대부분 이름들이 낯선 이름들이거나, 이름은 귀에 익지만 선뜻 그 분의 활동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 이름들입니다. 이중에서 3.1만세운동 때 고문으로 죽은 유관순 열사와 북쪽의 유관순이라는 동풍신 지사의 이름이 먼저 들어옵니다.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알만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蓮花蓮葉覆紅欄(연화연엽복홍란) 연꽃잎은 붉은 난간 뒤엎고 綺閣依然泛木蘭(기각의연범목란) 단청 좋은 정자에 놀잇배 떠있네 潑潑游魚偏戱劇(발발유어편희극) 펄펄뛰는 고기는 연못이 놀이마당 有時跳上錄荷盤(유시도상녹하반) 때때로 연잎위로 솟구친다네. 천안 광덕산을 오르다가 발견한 시비(詩碑)에 적힌 시의 앞부분이다. 19세기 전반의 여류시인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 1813 ~ ?)의 시다. 시비를 지나 좀 더 오르다보면 운초의 무덤도 볼 수 있다. 평안남도 성천 기생의 무덤이 왜 광덕산에 있을까? 지금부터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운초는 원래 양반집 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퇴기(退妓)의 수양딸로 들어간다. 퇴기가 괜히 수양딸을 받겠는가? 퇴기는 운초가 방년(芳年)의 나이가 되자 운초를 성천 기적(妓籍)에 넣는다. 운초는 기생이 되자 금방 뭇사내들의 뜨거운 눈길을 받는 기생이 된다. 단순히 용모가 아름답다고 하여 뭇사내들이 찾고 싶은 기생이었던 것은 아니고, 운초의 매력은 가무음률은 물론 뛰어난 그녀의 시문(詩文)에 있었다. 어느 해에 유관준이 신관사또로 성천에 온다. 유관준은 운초라는 명기(名妓)를 자신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번 6월 EBM 조찬 포럼의 강사는 가수 윤형주 씨였습니다. 통기타를 들고 중간 중간 노래를 들려주며 자신의 삶을 얘기해주시는데, 다른 어느 때 강연보다도 회원들이 집중해서 듣더군요. 제 고교 10년 선배이시니 벌써 고희를 넘기신 것인데도, 어쩜 그리 젊으신지요. 복장도 청바지에 양복 윗도리로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젊음이 넘쳐나십니다. 가수 윤형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의학도이던 윤형주는 대학시절 통기타 가수로 떠서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습니다. 그 후 많은 히트곡을 작곡하고 노래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듣자마자 알 수 있는 수많은 인기 시엠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깊은 맛을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는 온누리교회의 장로가 되어 선교활동에도 열심이고, 또한 해비타트 이사장으로서 직접 망치를 들고 집 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기도 합니다. 70년대에 윤형주, 조영남, 송창식, 이장희, 김세환, 양희은 등 통기타 포크송 가수들의 인기는 참 대단했지요. 저도 그 시대에 중ㆍ고ㆍ대학교를 다녔기에 그들과 그들의 노래를 사랑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세월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중부 제3터널을 통과하면 고속도로는 곧바로 경안천에 다리를 적신다. 그러면 바로 오른쪽으로 높이 140m의 야산이 바짝 다가서 있고, 고속도로는 이 야산의 발등을 타고 지나간다. 바로 이 야산 자락에 비운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이 잠들어 있다. 난설헌의 무덤에서 고속도로까지 직선거리로 불과 100m!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쌔~앵~”하며 난설헌의 옆을 지나가지만, 과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이 허난설헌 옆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중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무갑산이 난설헌의 묘를 내려다보고 있다. 태양이 뜨겁게 대지를 달구는 8월의 어느 날 무갑산에 올랐다가 난설헌의 묘를 찾았다. 고속도로 밑의 토끼굴을 지나 난설헌에게 다가가니 먼저 송덕비가 눈에 띈다. 중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이 속한 안동김씨 문중에서 흔쾌히 땅을 내놓은 것을 기리는 송덕비로, 2000년 1월에 시행자인 한국도로공사와 건설사인 쌍룡건설이 세운 송덕비이다. 묘역으로 다가가는데, 난설헌 무덤 왼쪽으로 아기 때 죽은 난설헌의 두 아이의 무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기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송상현’ 하면, 대개 임진왜란 때 절대적인 열세 속에도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떠올릴 것입니다. 청주 흥덕구 수의동 묵방산 자락에 가면 충렬공 송상현의 무덤이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송상현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이었으나, 선조가 순절한 송상현의 공을 높이 사 두사충에게 명하여 명당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인데, 풍수지리를 잘 봐, 선조가 두사충에게 묘자리를 잡아달라고 명한 것이지요. 그런데 송상현의 무덤 옆에는 평소 송상현에게 시종 들던 여인들의 무덤은 있지만, 정작 그의 아내의 무덤은 옆에 없습니다. 부인의 무덤은 그곳에서 1km 정도 떨어진 황구산 기슭에 있습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그것도 충신의 무덤 옆에 어떻게 아내의 무덤 대신에 다른 여자들의 무덤이 있는 것일까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청주지법 재판이 있을 때 짬을 내어 충렬공의 묘소를 들러보았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먼저 강상촌(綱常村)이라는 마을 표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임금이 일부러 묘토를 하사하니, 충렬공의 후손들이 충렬공의 사당과 무덤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들어오니, 제 책상 위에 한 우편물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무얼까? 가위로 봉투 윗부분을 자르고 조심스레 봉투를 거꾸로 드니, 안에서 <오두막집 이야기>라는 하얀 표지의 시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때마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정오의 햇살을 받아 시집은 자신의 하얀 살갗을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오두막집 이야기>는 부산의 김성수 법무사가 책방에서 사서 저자의 친필 싸인까지 받아 저에게 보내온 시집입니다. 그런데 시집을 낸 성종화 시인도 법무사이네요. 법무사가 시집을 냈다? 그것도 오랜 세월 검찰에서 근무했던 법무사가? 그러나 성종화 법무사는 원래 시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중3 때 이미 <추석>이라는 시를 『학원』지 발표하였고, 50년대 학원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소년 문사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리고개도 넘기기 힘들 만큼 너나없이 가난하던 1950년대를 보내야했던 소년문사는 고교 졸업 후 계속 문학의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성 법무사는 안정적인 밥을 찾아 검찰 일반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범죄와의 전쟁 일선에서 자기 맡은 바 일만 열심히 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물관이나 전시회를 다니다보면 조선의 한글 편지들이 전시된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편지의 속성상 편지에는 편지를 주고받는 이들의 은밀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이고, 또 편지에는 그 시대의 문화가 흐릅니다. 그리고 붓으로 쓰는 글씨에는 서예의 멋과 예술의 향기가 서려 있구요. 이런 조선의 편지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던 박정숙 박사가 그 동안의 연구물을 모아 《조선의 한글편지》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조선의 편지를 통시적으로 연구한 전문적인 논저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는데, 박정숙 박사가 큰일을 하셨네요. 저는 전에 한 모임에서 처음 박 박사님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며칠 후 박 박사가 이 책을 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모임에서 《조선의 한글편지》를 쓰셨다는 말을 듣고, 내가 관심을 가지긴 하였는데, 이렇게 책까지 보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관심이 있는 책을 받게 되니 그 기쁨은 더욱 커집니다. 참! 이 모임에 대해서 한 말씀 드려야겠네요. 모두 5명이 만났는데, 모임의 배경은 같이 인문학적 책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수필집이 되겠네요. 모임은 최근에 《사임당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제가 작년 10월에 서울법대 문우회 회원이 되면서 여러 문우회 회원들의 시집과 책을 소개했었지요? 이번에도 한 권 소개합니다. 박영희 선배가 펴낸 시집 <그 잠깐 소낙비에>입니다. 지난 연초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이 시집을 받았습니다. 박선배로부터 직접 받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박선배는 그 날 참석하지 못 하시고 시집만 보내셨네요. 박영희 선배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자 선배입니다. 저보다 16년이나 위인 대선배이시지요. 그 시절에 여자가 서울법대 들어간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는데, 경남여고를 졸업한 박선배는 아마 경남여고에서도 수재로서 이름을 날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박선배의 시집은 문우회 다른 회원들의 시집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습니다. 시집 가운데서도 시조집이라는 것이지요. 아마 박선배는 처음 시를 쓰시다가, 정형적인 시조의 운율에 맛을 느끼면서 시조로 정착하신 것 아닐까요? 아래에 박선배의 시조 몇 수를 소개합니다. 속삭임 산 그늘 묻은 여울에 잔설이 아직인데 꿈조차 없는 밤을 모로 누워 뒤척인다 이른 봄 매화 멍울에 가만가만 듣는 비 꿈조차 없는 밤이라고 하였는데, 몹시 피곤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