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지난번에 차일혁 총경 얘기를 하였지요? 차일혁 총경 이야기를 하다 보니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생각납니다.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두류봉으로 내려가다 왼쪽 지능선을 타고 내려간 산자락에 있는 벽송사 뒷산 선녀굴에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은거하였었죠. 정순덕은 다른 빨치산 대원 이은조, 이홍이와 이 굴에 은신하다가 1962년 2월 발각되어 도주합니다. 그러나 고향인 인근 산청군 내원골로 피신하였다가 결국 1963월 11월에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습니다. 나중에 총상을 입은 다리는 잘라냈고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최후의 빨치산이 1950년대도 아닌 1963월 11일에까지 있었다는 것과 그것도 최후의 빨치산이 여자라는 것에 놀라실 것입니다. 사실 정순덕은 처음부터 빨치산은 아니었습니다. 산으로 들어간 남편을 찾아내라는 토벌대의 고문에 못 이겨 남편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남편도 죽고 대부분의 빨치산이 사살되면서 최후의 빨치산이 된 것이지요. 정순덕은 자신이 산으로 들어가게 된 동기를 이렇게 얘기하지요. 고문이 한두 번으로 끝났던 게 아니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내라며 참나무 몽둥이로 무차별 타격을 가하는데 혀를
▲ 인간에 대한 예우가 끔찍했고, 예술을 사랑했던 차일혁 총경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기자] 저번에 차일혁 총경에 대한 글을 기고했는데, 차일혁 총경이라는 분을 전혀 몰랐던 분들에게는 그 시대에 그런 분이 있었나 하는 놀라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당시 시대 상황에 어떻게 빨치산 대장의 장례를 치러줄 수 있었느냐 하는 놀라움이 컸을 것입니다. 사실 차대장이 처음부터 장례를 치러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차대장이 사살 보고를 하니 경찰 간부가 이현상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 서울로 보냅니다. 우리 사회에 꼭 이렇게 과잉 충성하는 사람들 있죠? 그런데 이대통령이 보기 싫다고 거절하여 창경원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가 시신은 다시 돌아왔는데 이현상의 친척들도 시신 인수를 거부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차대장은 토벌을 함께 한 정인주 총경과 상의하여 정중히 화장해주기로 한 것이죠. 왜 있지 않습니까? 역사를 보면 치열하게 싸우다가 상대방 적장을 죽였을 때 적장으로서 예우를 갖춰 장사지내는 얘기 말입니다. 차대장도 서로 한판 겨루었던 상대로서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적장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이후 정인주 총경은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 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 ▲ 6.25 전쟁 중 구례 화엄사 소각을 면하게 한 차일혁 총경. 그는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위의 글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토벌대 대장 차일혁 총경이 전북일보에 기고하였던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라는 글입니다.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극한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당시 남쪽의 토벌대 대장이 이런 글을 썼다는 것에 좀 의아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차대장은 한민족이 이데올로기에 찢겨 서로 죽고 죽이는 것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이현상을 사살하고도 차대장은 이현상의 시신을 적장에 대한 예를 갖추어 섬진강 다리 밑 하동 송림 주변 백사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탕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위 시는 1922년 3월 《신생활》이라는 잡지에 실렸던 수주 변영로 선생의 시 봄비입니다. 화곡로를 따라 서울시를 막 벗어나면 고강지하차도가 있는 삼거리에 수주 변영로 선생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는데, 매번 좌회전하면서 수주 선생을 쳐다만보고 가다가 어느 날은 수주 선생을 뵈기 위해 차를 세웠습니다. ▲ 부천시 고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안산을 오른 적이 있는데, 그 때 안산에 오르기 전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잠시 들렀습니다. 안산이라고 하면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연세대 뒷산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바로 이 산 반대편 자락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있는 것이죠. 하긴 이날 같이 등산하는 분들 중 대부분이 안산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독립문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니 바로 앞에는 서재필 박사 동상이 있습니다. 서재필 박사가 이끄는 독립협회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웠기에 당연히 이곳에 서재필 박사 동상이 있겠죠. 이번에 독립문을 자세히 보니 독립문 앞에 두 개의 큰 초석이 있습니다. 무얼까 하고 보니 헐어버린 영은문의 주초(柱礎)이더군요. 여태 무심코 지나쳐서인지 독립문 앞에 영은문의 주초가 있는 줄은 모르고 지냈습니다. ▲ 사적 제32호 서울 독립문(문화재청 제공) 또 그 옆에 독립관이 있어, 어? 독립문 세울 때 그 옆에 독립관도 세웠었나? 하며 보니, 영은문 옆에 있던 모화관인데, 서재필 박사는 영은문은 헐면서도 모화관은 그대로 두고 독립관으로 이름만 바꿔 사용하였네요. 독립관은 일제강점기 때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한글로 쓰인 비석중 가장 오래된 비석을 보러 갔습니다. 이 비석은 1536년(중종 31)에 이문건이 자기 아버지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 신씨의 묘를 합장하면서 묘 앞에 세운 비석으로 문화재 이름은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입니다. 원래 이 앞에는 고령 신씨의 묘만 있었고 이윤탁의 묘는 태릉 자리에 있었는데, 이윤탁의 묘를 이리로 합장하면서 아들 이문건이 영비(靈碑)라는 제목으로 비석을 세우면서 여기에 한문과 함께 한글도 새긴 것이랍니다. 조선 시대 묘비에 한글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는데, 그럼 이문건은 왜 여기에 한글을 새겼을까요? 한글 비문을 현대어로 하면 이렇습니다. 신령한 비다. 쓰러뜨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이제 짐작이 가시겠지요? 이문건은 한문을 모르는 상놈들이 묘를 훼손시킬까봐 이를 경고하기 위하여 이 한글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 서울 노원구에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비석 이윤탁 한글영비(한글靈碑)(문화재청)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예전에는 비만 있었는데 지금 한글고비는 비각 안에 곱게 모셔져 있고, 또 예전보다 더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서울 강북에 초안산(楚安山)이라는 해발 114.1m의 야산이 있는데, 녹천역 뒷산이 바로 초안산입니다. 전에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창작스튜디오를 갔을 때 바로 근처에 초안산이 있어서 올라가보았습니다. 왠 무덤들이 그리 많은지... 요즈음 형성된 공동묘지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공동묘지입니다. ▲ 내시들의 공동묘지가 있는 초안산(楚安山) 왜 여기에 조선시대 공동묘지가 있을까요? 조선시대 경국대전이나 속대전에는 한양에서 십리(4.7km) 이내에는 무덤을 쓰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서울의 4소문 가운데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고 하여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렀지 않습니까? 이 문으로 나간 시체가 10리를 바로 벗어난 곳에서 편히 쉴 곳으로 최적지가 바로 초안산이었습니다. 도봉산, 북한산 일대도 자격 요건에는 해당되지만, 이 산들은 산세도 험하고 돌산이라 묏자리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였지요. 더군다나 풍수지리로도 초안산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안 이씨 문중에서도 초안산에 묘역을 써서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군요. 그런데 초안산에 입주한 망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시입니다. 내시들은 동류의식이 있어 죽어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신항서원에 배향된 또 다른 인물에 충암 김정(1486-1521) 선생이 있습니다. 충암은 제주 오현단의 시초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즉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 선생을 모시는 충암묘를 제주시에 지은 것이 시초가 되어 1682년(숙종 8) 귤림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고, 1695년(숙종 21) 송시열 선생이 여기에 배향됨으로써 5현단이 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제주 오현단의 다섯 현인중 3명(송인수, 김정, 송시열)이 청주 지역 사람이네요. 참 제주의 명문고등학교 오현고등학교의 이름이 바로 이 오현단에서 유래된 것은 제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충암은 중종 때 조광조를 도와 훈구파의 척결에 앞장섰는데, 그렇기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와 함께 척결 대상에 올랐지요. 다행히 영의정 정굉필의 옹호로 죽음만은 면하고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 대전 동구 신하동에 있는 충암 김정 무덤 옆의 사당. 사당에는 부인 송 씨의 부인의 정려각이 있다.(문화재청 제공) 진도 벽파진에 있는 정자 벽파정의 현판에는 충암의 시 벽파를 떠나며(渡碧波口號)가 걸려있답니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청주 표충사에 들렀을 때, 표충사를 물러나와 신항서원도 들렀습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 3)에 유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청주지역의 첫 번째 사원으로 건립되었고, 1660년(현종 10)에 신항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신항서원에는 송인수, 박훈, 경연 등 15-17세기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배향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곳에도 당쟁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청주 지역의 유림들을 둘로 갈라놓았습니다. 이런 분쟁의 씨앗을 심은 것이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입니다. 송시열은 신항서원에 율곡 이이를 추가로 배향하면서 배향 순서를 기존에 배향된 청주 출신 성리학자들을 제치고 이이를 맨 앞으로 하였습니다. ▲ 송인수, 박훈, 경연 등 15-17세기 청주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을 배향한 신항서원(문화재청 제공) 더욱이 송시열이 화양동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신항서원은 노론이 주도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게 되어, 신항서원 운영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이 불만을 갖게 되었죠. 이후 청주지역에서는 자파의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자파의 서원을 추가 건립하는 등으로 14개의 서원이 난립하였다는군요. 이런 것도 한 원인이 되어 이인좌의 난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전에 재판 때문에 청주지방법원에 갔을 때에, 재판을 끝내고 우암산 밑의 표충사(表忠祠)에 들러보았습니다. 표충사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충신을 배향하는 사당입니다. 표충사는 바로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읍성으로 쳐들어갔을 때 반란군에 의해 죽은 충청병사 이봉상과 비장(裨將) 홍림, 영장(營將) 남연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지요. 충청병사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현손(玄孫)입니다. 원래는 3충사라고 했다가, 1736년에 표충사로 사액 받은 것이라고 하네요. ▲ 충청북도 기념물 제17호 청주 표충사 (淸州 表忠祠), 문화재청 제공 그런데 표충사에서 제 눈길을 끈 것은 위 3명의 충신들 보다는 기생 해월입니다. 일개 기생이 표충사에 함께 있다니 이상하지요? 해월은 비장 홍림의 애인으로 해월의 열녀문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생과 열녀라. 이것도 뭐가 잘 안 맞는 조합 같은데, 실은 비장 홍림이 살해당하자 해월이 홍림의 뒤를 따라 자결을 하였기에 열녀문을 세워준 것입니다. 곧바로 자결한 것은 아닙니다. 홍림이 살해당할 때 이미 뱃속에 홍림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기에, 아이를 낳아 7살까지 키우다가 자결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