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슬프다 우리 한국 이 좋은 호강산을 헌신 같이 버리고서 그 어디로 가잔 말고 통곡이야 천운이여 강산아 잘 있거라 다시 와서 반기리라 -김우락 지음,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 가운데- 더없이 푸근하고 좋은 강산(好江山)을 헌신짝 같이 버리고 낯설고 물선 타향으로 떠나는 심정이 뚝뚝 묻어나는 노래를 부른 이는 김우락(金宇洛, 1854 -1933) 애국지사다. 김우락 지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대통령)을 지낸 이상룡(1858 – 1932) 선생의 부인으로 이들은 안동의 99칸 대저택인 임청각 등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세워 조국 독립을 위해 최일선에 섰던 분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로만 취급 받던 김우락 지사가 독립유공자로 애족장 추서를 받은 것은 3.1절 100돌을 맞은 올 3월이다. 이는 김우락 지사가 세상을 뜬 뒤 86년만의 일이요, 남편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서훈(1962.독립장)일로부터 따져도 57년만의 일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고 하니 국난의 시기에 남녀 구별 없이 뛰어들어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면서도 여성들은 김우락 지사처럼 항상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서훈을 받기에 하는 말이다. 그냥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세계 독립운동의 으뜸 경상북도" 이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입구에 적혀 있는 글귀다.이곳로비에는3.1절 100주년을 맞이하여 '2019 나라사랑 그리기 대회'에 입상한 어린이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알록달록 칠해진 동심 속에 비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천진난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국난에 대한 인식'이 아름답다. 새싹들 마음에 새겨진 독립운동의 불씨가 꺼지지 않길 비손한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그 당시 석유 한 됫박에 29원이었다. 우리 집은 석유 한 됫박으로 한 달 넘게 등잔불을 밝혔다. 어머니는 석유 타는 게 아까워 일찍 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가난 때문에 한 달에 20원 하는 기성회비를 3년간 내지 못했다. 집안이 기울어 초등학교4,5,6학년의 3년간을 기성회비 한 푼도 못 내고 학교를 다녔다. 선생님이 돈을 가져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내도 나는 집으로 가질 않았다. 집에 간들 돈이 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수진(67) 씨가 쓴 자서전 《머물고 싶은 간이역 1,2》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난 7일(월) 아침 10시, 경기도 하남시(시장 김상호) ‘나룰도서관’에서는 아주 뜻깊은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나룰도서관’에서 지난 4월부터 모두 20회에 걸쳐 진행한 시니어 자서전 문화프로그램의 결실을 맺는 시간이었다. 모두 20여명이 신청하여 의욕적인 자서전 쓰는 시간을 가졌지만 11명만이 끝까지 자서전 쓰기에 살아남아 이날 자서전 출판의 기쁨을 가졌다. 사실 자서전 쓰기가 말 같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룰도서관’의 시니어 자서전 프로그램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대개가 6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마츠리의 나라다. 그 가운데서도 교토의 3대 마츠리는 이름난 것으로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를 꼽을 수 있다. 해마다 10월 22일 열리는 지다이마츠리는 헤이안 천도로부터 1,100년째를 기념하여 명치28(1895)년에 환무천황(桓武天皇)을 제신으로 시작한 마츠리로 올해 124회째를 맞는다. 그러나 올해는 레이와 원년(令和元年, 새로 일왕이 된 나루히토의 연호)으로 황거(일왕이 사는 곳)에서 즉위식 행사가 있어서 26일로 날짜 변경이 예정되어 있다. 마츠리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도구, 행렬 시간 등을 따지자면 7월의 기온마츠리(祇園祭)가 가장 성대하지만 5월의 아오이마츠리(葵祭)나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時代祭)도 꽤 볼만하다. 지다이마츠리 행렬은 교토 어소(御所)를 낮 12시에 출발하여 가라스마도오리 등 시내 4∼5킬로 구간을 행진한 뒤 헤이안신궁(平安神宮)으로 돌아오는 진행이다. 지다이마츠리의 백미는 형형색색의 옛 시대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인데 시내를 행진할 때에는 각 시대별 곧 헤이안-가마쿠라-무로마치-안도모모야마-에도-메이지시대의 옷으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어제(9일) 한글날아침 10시 30분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앞 공터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성방직이 있던 곳으로 어린 소녀들이 여공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곳이라 더욱 뜻깊은자리다. 제막식은 화창한 가을 날씨 속에 영등포 평화의 소녀상 건립시민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최문원 씨의 사회로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영등포 평화의 소녀상은 1,762명의 시민과 94개의 시민사회단체가 하나되어 이뤄낸 결실이었다. 특히 영등포 평화의 소녀상은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18번째로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다른 소녀상보다 더욱 값진 것은서울시 자치구 가운데 영등포구 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념사업 지원 조례를 처음 가결시켰다는 점이다. 어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는 시민추진위원회 관계자들, 채현일 영등포구청장, 윤준용 영등포구의회 의장, 신경민ㆍ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과 함께 동상 제막에 함께 한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모여 축하했다. 제막식은 먼저 영등포평화의소녀상 건립 시민추진위원회 공동대표단이 시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영등포 평화의 소녀상 건립운동을 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8일) 저녁7시, 서울 동자아트홀에서 ‘유라시안 오페라 산쇼다유’ 공연이 열렸다. 이날 공연한 <산쇼다유>는 일본의 소설가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 원작을 감독이자 작곡가인 카와사키 준이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은 헤이안시대(794~1185)를 배경으로 아버지를 찾아나선 한 가족이 인신매매로 어머니와 두 남매가 생이별을 하게되어 수전노인 ‘산쇼다유’ 집안으로 팔려가 겪는 이야기인데 이는 1954년 미조구치 겐지가 영화화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끈적이 있다. 어제 공연한 ‘유라시안 오페라 산쇼다유’는 원작이나 영화와는 또 다른 감흥을 주어서인지 객석은 숨소리하나 없이 조용했다. 막이 오르자 화면 가득히 한 여인이 춤을 춘다. 온 몸을 비틀며 이어지는 춤사위는 어린 남매와 헤어져 사도섬으로 팔려가 눈먼 장님이 된 어머니 같기도 하고 수전노 집안에서 수년간 노예살이를 하며 탈출을 꿈꾸다 결국은 물에 뻐져 죽는 여주인공 안주 같기도 하다. ‘유라시안 오페라 산쇼다유’ 는 원작이 일본 소설인 만큼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무대 중앙의 대형 화면에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 있어 보기 편했다. 배우들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 남자가 있다. 남자의 이름은 칸다타. 이 남자가 불지옥에서 허둥대고 있을 때 지상에서 부처님은 이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 부처님이 연꽃 향이 물씬 풍기는 연못 밑을 우연히 내려다보니 발아래 저 멀리 지옥이 훤히 보였다. 지옥은 아비규환 이었다. 서로 물어 할퀴고 뜯고 난리도 아닌 가운데 어디서 낯이 익은 남자 칸다타를 발견했다. 가만있자 이 남자를 어디서 보았더라. 그렇지 이 남자가 지상에서 거미 한 마리를 밟아 죽일 뻔한 상황에서 이를 살려준 것을 부처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불쌍한 지옥의 칸다타를 위해 부처님은 은실로 된 거미줄 같이 가는 줄을 지옥으로 내려 보냈다. 칸다타는 기쁜 나머지 이 줄을 잡고 지상으로 오를 꿈에 젖어 잠시 행복했다. 있는 힘을 다해 줄을 움켜쥐다가 힘이 빠져 잠시 발아래를 보니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죄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한결같이 칸다타가 움켜쥔 거미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간 칸다타는 기겁을 했다. 이 많은 인간들이 거미줄에 매달리면 줄은 곧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영영 지옥에서 허덕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하였다. 그리하여 몰려드는 죄인들을 향해 고래고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중근(1879.9.2~1910.3.26) 의사’를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산동(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펼치는 한편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1906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계몽운동을 펼쳤고,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의사는 나라밖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으며 1908년 연추(煙秋)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1909년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 단지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를 처단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도쿄 한 복판에 있는 전몰자 묘지인 ‘국립치도리가후치 묘원(國立千鳥ケ淵戦没者墓苑)’은 1959년에 세웠으며 ‘묘지’가 아닌 ‘묘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곳의 총면적은 16.063㎡(4,867평)으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에 나라밖에서 죽은 일본의 군인, 군속, 민간인 가운데 신원이 불명하여 인수되지 않은 유골을 안치하고 있다.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은 가족에게 인계하여 가족 무덤에 안치) 유골을 안치한 납골당인 육각당(六角堂)에는 35만 8,000주(柱, 일본에서 신을 세는 단위) 이상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으나 전범급(戰犯級) 인물은 안치되어 있지 않다. 이곳에서는 일본 후생성이 해마다 전몰자를 위해 배례식(拝礼式)을 거행하며 황족(皇族)과 내각총리대신이 참석한다. 이 묘지는 1950년 필리핀에서 숨진 전몰자 4,822주가 송환되었을 때 이들의 유골을 안치할 곳을 찾지 못해 일본 후생성이 1952년 5월 1일 ‘전일본무명전몰자합장묘건설위원회(全日本無名戦没者合葬墓建設会)를 발족하여 만든 것이다. 처음에 터를 선정할 때에 묘지 터로 여러 곳이 후보로 올랐으며 그 가운데는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두어야 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어제(27)일 낮 2시부터 전남 여수시 여수문화홀에서 여수시와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회장 오룡) 주최로 “의혈지사 윤형숙을 기억한다”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3.1만세운동 100돌 기념으로 열린 이 날 학술세미나는 추모제를 겸한 행사였다. 남도의 유관순이자 호남의 유관순이라 불리는 윤형숙(1900.0.3~1950.9.28, 다른 이름 윤혈녀) 열사는 광주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 재학 중 이 학교 교사 박애순 선생의 지도 아래 급우 60여명과 함께 광주교(光州橋)밑 천변에서 이 지역 주민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시위 도중 일본 헌병대에 의해 왼팔이 잘리고오른쪽 눈의 부상에도 불굴의 의지로 항일정신을 드높였던 윤형숙 열사는평생을 실명 상태로 지내면서도 생애(50살로 순국) 마지막까지 독립정신과 문맹퇴치 등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어제 열린 학술세미나에 앞서 식전행사에서는 고세영(광주수피아여고) 교장과 김유정(광주수피아여고) 총동창회장의 ‘윤형숙 열사’를 기리는 시낭송과 ‘의혈지사 윤형숙의 생애’를 다룬 동영상 상영 등이 있었다. 이어 김성천(여수제일교회 목사), 오준(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