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 서울은 3·1운동의 시작점이자 중심지다. 인사동에서 시작된 만세는 탑골공원을 거쳐 종각에 이르렀고, 덕수궁, 서울역, 창덕궁 앞을 거치면서 서울 전역에서 울려 퍼졌다. 이 함성은 곧 8도로 퍼졌고, 나라밖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그날, 서울은 ”만세도시“였다. 서울의 골목과 길들은 ‘만세길’이었다, 서울 사람들은 거대한 ‘만세인’들이었다. 3.1운동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19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다시 한 번 그날의 감격이 재현되고, 나라를 빼앗겼던 뼈아픈 역사와 3.1운동의 정신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공간들이 시민들을 맞는다. 3.1운동의 발상지인 삼일대로 일대(안국역~종로2가)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쉬며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적 상징가로로 다시 태어난다. 독립선언문이 보관됐던 ‘독립선언문 배부 터’(현 수운회관 앞), 3.1운동 이후 민족운동 집회장소였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등 5개 거점별로 쉼터 같은 시민공간 조성이 완료됐다. 앞서 작년 9월 독립운동 주제역사로 변신을 완료한 지하철 안국역에는 기미독립선언서가 새겨진 ‘100년 계단’(지하 2~3층)이 새롭게 조성돼 3월 시민 발길을 기다린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 17일(일) 낮 2시부터 도쿄 릿쿄대학 예배당에서는 윤동주 시인 서거 74년을 맞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1917~1945) 추도식이 열렸다. 릿쿄대학(立敎大學)은 북간도 출신인 윤동주 시인이 1942년 2월 말 일본에 건너가 10월까지 8달 동안 이 대학 문학부 영문과 학생으로 공부하던 곳이다. 이후 윤동주는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으로 편입하기까지 이 대학 캠퍼스에서 ‘쉽게 씌어진 시(1942.6.3.)’를 비롯하여 5편의 시를 남겼다. 이날 릿쿄대학 예배당 열린 “시인 윤동주와 함께(詩人尹東柱とともに) 2019” 추도회는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 대표 야나기하라) 주최로 순수한 일본인들의 추도행사였다. 2008년부터 시작된 추도회는 올해로 12년째를 맞이하며 이날 행사는 2부로 나뉘어 1부는 김대원 사제(司祭, 릿쿄대학 성직자)의 집전으로 기도회와 자화상 등 시 7편의 시낭송의 시간을 통해 청년 윤동주 시인의 삶을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3시부터 시작된 2부 행사는 가수 윤형주 씨의 ‘이야기가 있는 작은 음악회’ 시간으로 이어졌다. 윤형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 16일(금)은 윤동주(1917-1945)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지 74년을 맞는 날이다. 윤 시인의 순국날을 기려 윤동주 시인이 유학했던 교토 도시샤대학과 하숙을 했던 교토조형예술대학 다카하라 캠퍼스에서는 각각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추도회가 열렸다. 도시샤대학(16일)과 교토조형예술대학(15일)에서 각각 거행된 윤동주 추도회에는 윤동주 시를 완역한 시인 우에노 미야코 씨가 직접 참여하였으며 기자와의 전화 통화로 상세한 추도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6일 오후 1시 30분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에서 열린 추도회는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 ‘도시샤코리아동창회’ 주최, 도시샤코리아연구센터 후원으로 주오사카대한민국 오태규 총영사, 양호석 영사를 비롯하여 도시샤교우회 나카무라 유우이치 부회장 등 100여명의 참석자들이 헌화, 시낭송 등을 통해 청년 윤동주 시인의 순국의 의미를 되새겼다. 추도회를 마친 뒤에는 노가미 다츠히코(野上龍彦, 전 치쿠마출판 편집장) 씨의 ‘청년시인 윤동주’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노가미 씨는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소개한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의 글을 일본 교과서에 실어 일본인들이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꽤 오래전 일이다. 어린이 책을 전문으로 만드는 ‘상수리’라는 출판사 이름이 찍힌 명함을 건네며 나를 찾아 온 사람이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책을 만들려고 하는데 함께 책을 만들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나는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책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3권 작업을 마칠 때였다. (2019년 1월 10권 완간) 뜻은 아주 좋으나 어린이를 위한 책을 집필할 시간이 없어 정중히 사양하고 대신 어린이 책에 들어갈 여성독립운동가를 추천해주는 것으로 마무리한 적이있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이해하기 쉬운 내용으로 풀어 쓴 글과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곁들인 《나는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라는 책이 나에게 배달되었다. 2013년 2월의 일이다. 김일옥 작가가 쓰고 백금림 화가가 그린 책을 드는 순간 무척 설레고 기뻤다. 이 땅에 어린이를 위한 여성독립운동가 책의 등장은 우리 모두가 함께 축하할 일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하고도 전혀 사회의 조명을 받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일을 상수리 출판사에서 해냈구나 싶어 울컥 눈물이 났던 기억이 새롭다. 이 마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애국지사 노순경의 가족역사전시회’는 묻혀있는 가족들의 독립운동사를 알리기 위해 마련한 전시회입니다. 3.1만세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돌 기념으로 여는 이번 전시회는 원주시립중앙도서관 전시실에서 열흘간 열 예정입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니 저희라도 챙겨야하는 것이지요. 개관식은 특별히 하지 않고 2월 20일부터 28일까지 자료 전시를 합니다.” 간호사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인 노순경 애국지사의 외손자인 김영준 선생은 전화통화에서 이번 전시회에 대한 취지를 그렇게 말했다. 노순경 지사의 아버지는 노백린 장군이다. 가족의 역사라고는 했지만 이번 전시회는 노순경 지사(대통령표창. 1995), 노순경 지사의 아버지 노백린(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 장군, 노순경 지사의 시아버지 박승환(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 노순경 지사의 오라버니 노선경(건국훈장 애족장. 1990), 동생 노태준(건국훈장 독립장. 1968) 등 온 집안이 독립운동을 한 가족이다. “우리 집안의 어르신들인 이분들은 일제침략기 굴곡진 역사에 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 헌신과 희생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분들입니다. 이는 한 개인의 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다리 높이 떠 지저귀는 곳 /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내 상전 위하여 땀 흘려가며 / 그 누른 곡식을 거둬들였네 내 어릴 때 놀던 내 고향보다 / 더 정다운 곳 세상에 없도다. 이는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다. 2년 전 필자는 후쿠오카 형무소 담장에서 마나기 미키코 씨와 이 노래를 불렀다. 마나기 미키코 씨는 후쿠오카지역에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모임인 <후쿠오카・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의 대표다. 철창 속에서 머나먼 북간도의 고향땅을 그리며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절규했을 윤동주 시인이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웠던 기억이다. 오는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27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한 날이다. 한글로 시를 쓴다는 이유를 들어 제국주의 일본은 젊은 청년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앞날이 창창한 꿈 많던 청년의 죽음은 일본 땅 전역에서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이 숨져간 곳에 사는 사람들은 <후쿠오카・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를 통해 윤동주 시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늘은 선생님 보따리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한글문화연대 대표 이건범이 주시경 선생님께 올립니다. ‘주보따리’ 주시경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글문화연대라는 시민단체의 대표 이건범입니다. ‘한글’, 선생님께서 지으신 이름이죠? 1908년에 만든 <국어연구학회>의 이름을 1911년에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에 <한글모>로 바꾸셨던 걸로 압니다. 1910년 경술국치 뒤로 ‘국어’란 곧 일본어였으니 ‘국어’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때 처음 사용하신 ‘한글’이라는 말이 세종대왕께서 만든 훈민정음의 새 이름으로 자리를 잡은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선생님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꾸려간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안하고 ‘조선말 큰 사전’ 편찬에 적용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이래 ‘한글’이라는 이름은 학계와 민간에서 두루 쓰였습니다. 1926년에 처음 기린 한글날은 그 이름이 ‘가갸날’이었지만,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바뀌었고, 조선어학회의 동인지 이름도 <한글>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지금 저희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이천만 겨레를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100년전 오늘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당당히 알린 날이다. 그날의 함성으로부터 어느새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재일본 한국YMCA와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공동주최로 ‘2.8 독립기념식’을 열고 있는데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특별히 그 의미가 깊다. 기념식이 열리는 재일본 한국YMCA 건물 입구에는 2.8 독립선언 돌 기념비가 서있다. 2·8 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기념비는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재일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적지에서 불굴의 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한 장한 행동을 기리고자 1982년 세웠다. 동경 유학생들이 주축으로 일어난 2.8 독립선언 선포식은 삽시간에 절망에 빠져있는 고국에 전해졌고 급기야 3.1운동의 활화산을 뿜어내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19년 1월 유학생들은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었다. 이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그제(2월 4일)는 입춘이었지만 설날 연휴 중인 한국에서는 입춘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지나버린 느낌이다. 설날 연휴가 아니었더라도 특별한 입춘 행사가 없는 게 우리 풍습이긴 하지만 건양다경(建陽多慶)과 같은 입춘축을 붙이는 모습 정도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은 어떠한가? 일본에서는 입춘에 대한 풍습이 남아있어 곳곳에서 입춘 행사를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입춘을 절분(세츠분, 節分)이라 해서 사악한 귀신을 몰아내기 위한 콩 뿌리기(마메마키) 행사를 전국의 절이나 신사(神社)에서 행한다. “복은 들어오고 귀신은 물러가라(후쿠와 우치, 오니와 소토, 福は內、鬼は外)”라고 하면서 콩을 뿌리고 볶은 콩을 자기 나이 수만큼 먹으면 한 해 동안 아프지 않고 감기도 안 걸리며 모든 악귀에서 보호 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절분(세츠분, 節分)은 보통 입춘 전날을 말하는데 이때는 새로운 계절이 돌아와 추운 겨울이 끝나고 사람들이 활동하기도 좋지만 귀신도 슬슬 활동하기 좋은 때라고 여겨서인지 이날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콩 뿌리기(마메마키) 행사를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는 것이다. 절분행사는 예전에 궁중에서 시작했는데 《연희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마리아(1892. 6. 18. ~ 1944. 3. 13.) 선생을 2019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김마리아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며, 마리아는 개신교의 세례명인데 독실한 개신교신자였던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김마리아라 선생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어 교육계ㆍ기독교계ㆍ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였고 선생은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