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지도는 종이 위에 그려지지만, 지명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새겨집니다. 백두산에 오를 때입니다. 중국 길림성 용정을 방문했지요. 그곳에는 우리에게 선구자라는 노래로 알려진 많은 지명이 있습니다. 선구자(先驅者) 일송정(一松亭)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海蘭江)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머무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이슬 내릴 때 그리운 검은 머리 서글프게 웃는다 그 옛날 국경을 넘던 그날의 그 노래 말굽 소리 시원하게 들리던 그 노래 비암사(琵岩寺) 쇠북소리 허공에 울려 퍼져도 그날의 굳은 약속 어데로 갔나 거친 들 달려가던 그 기상 어디에 우리 님 오실 날을 기다려 보노라 선구자의 구(驅)는 말 달릴 ‘구’자입니다. 먼저 앞서서 말을 달리는 사람을 선구자라고 부르지요. 남의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외로운 일인가 하는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는 낱말입니다. 해란강 굽어보는 비암산 정상, 외롭게 서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독립군들이 사격 연습을 하며 지표로 삼았던 겨레의 눈동자였고 멀리서 고향을 그리며 찾아온 유랑민들에게는 '여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밤공기가 차가운 창경궁의 서재, 집경당의 촛불은 꺼질 줄 모릅니다. 그 불빛 아래 앉은 정조의 시선은 화려한 궁궐이 아닌, 백성들의 거친 손마디와 이름 없는 이들의 고단한 숨소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아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뒤주 속에서 스러져간 아버지의 비극을 눈으로 보고 자란 소년은, 증오 대신 세상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자신이 겪은 지독한 외로움을 타인의 온기로 바꾸려 했던 정조에게, 백성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가족이었습니다. 정조는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불렀습니다. 하늘의 달이 만 개의 시냇물을 차별 없이 비추듯, 그의 사랑은 신분과 처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서얼들에게 규장각의 문을 열어 재능을 펼치게 했고, 노비들의 가혹한 처우를 개선하며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고민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살피는 자휼전칙(정조가 흉년 등으로 인해 구걸하는 아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제정하여 온 나라에 반포한 우리나라 처음 독립된 아동복지법령서)을 세울 때는 마치 자식을 걱정하는 어버이의 심경으로 붓을 들었습니다. 정조의 인간 사랑이 가장 찬란하게 꽃핀 곳은 수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세상은 끊임없이 속도와 화려함을 성취하라 유혹하지만, 현자의 시선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본질을 향합니다. 그는 계절이 바뀌는 섭리에서 영원을 읽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이름 없는 돌멩이 하나에서도 우주의 질서를 발견합니다. 그의 삶은 요란한 축제가 아니라, 깊은 밤 홀로 타오르는 촛불처럼 형형하고 평온합니다. 현자는 바삐 움직이는 것만이 삶의 정답이 아님을 압니다. 때로는 멈춰서 바람의 방향을 살피고, 자신의 발자국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쥐어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명징한 눈.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부드러운 힘. 타오르는 분노나 깊은 슬픔조차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넉넉한 마음. 그에게 삶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온몸으로 겪어내야 할 아름다운 순례입니다. 현자는 침묵으로 웅변하고, 비움으로 소유합니다. 그의 언어는 간결하되 깊습니다. 수천 마디의 말로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한 번의 깊은 침묵으로 진실을 드러냅니다. 또한 그는 소유가 곧 구속임을 알기에, 손에 쥔 것을 놓을 줄 압니다. 역설적으로 손을 비울 때마다 세상은 더 풍요로운 영감으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경주마의 눈가에는 차안대라는 작은 가죽 조각이 덧대어져 있습니다. 것은 말의 시야를 좁혀 옆에서 달려오는 경쟁자의 기세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결승선이라는 단 하나의 점만을 향해 폭주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각자의 생이라는 트랙 위에서, 보이지 않는 차안대를 찬 채 옆을 보는 법을 잊어버린 경주마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경주마는 자신이 달리는 트랙 옆에 어떤 들꽃이 피었는지, 구경꾼들의 눈빛에 어떤 응원이 서려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오직 채찍 소리와 앞서가는 말의 뒷모습만이 세계의 전부가 됩니다. 우리 역시 속도와 효율이라는 채찍에 쫓겨, 나란히 걷고 있는 이의 손을 외면하고 계절이 바뀌는 길목의 서정을 놓치곤 합니다. 성공이라는 결승선은 선명해질지 모르나, 그 과정에서 만날 수 있었던 수많은 곁의 온기는 시야 밖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지도는 결승선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눈가의 가리개를 벗어 던질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좁아졌던 시야가 넓어지는 순간, 비로소 세상을 가득 채운 천연색의 풍경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옆에서 함께 숨 가쁘게 달리고 있던 동료의 젖은 어깨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어스름한 역사의 지평 위로 두 개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만물을 태워버릴 듯 광기 어린 열기를 내뿜고, 다른 하나는 대지의 숨결을 어루만지며 잠든 생명을 깨웁니다. 전자를 혼군(昏君)이라 부르고 후자를 성군(昏君)이라 부릅니다. 혼군의 시대는 고립된 성벽과 같습니다. 군주의 눈은 아첨이라는 안개에 가려져 세상의 허기를 보지 못하고, 그의 귀는 간신들의 감언이설에 갇혀 백성의 신음을 듣지 못합니다. 그에게 권력이란 백성을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잔입니다. 잔이 넘칠수록 백성의 눈물은 흐르고, 궁궐이 화려할수록 민초의 한숨이 늘어납니다. 혼군이 다스리는 나라는 겉으론 화려하지만, 서서히 침몰하는 난파선과 같아서, 밤은 깊으나 새벽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성군의 시대는 막힘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성군은 자신의 보좌를 가장 낮은 곳에 둡니다. 높은 곳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의 통치는 백성의 아픔이 고인 곳으로 자연스레 스며듭니다. 그는 백성의 근심을 자신의 불면으로 바꾸고, 백성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성군의 언어는 서슬 퍼런 명령이 아니라, 시대를 읽는 혜안과 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삽니다. 손안에는 더 많은 소유를, 머릿속에는 더 다양한 지식을, 마음속에는 더 많은 욕망을 채워 넣어야 비로소 안심되곤 합니다. 그러나 턱끝까지 차오른 소유의 포만감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던가요?. 오히려 꽉 찬 방 안에서는 숨을 쉬기 어렵듯, 과잉된 삶은 종종 우리 영혼의 산소를 앗아갑니다. 역설적으로 비어 있기에 가득 찬 찰나의 경지가 있습니다. 한국화의 미덕은 화폭을 가득 채우지 않는 여백에 있습니다. 그 비어 있는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보는 이의 상상력이 파도치고 바람이 드나드는 유(有)의 공간입니다. 우리 삶도 이와 같습니다. 빽빽한 일정표 사이에 틈을 내고, 움켜쥐었던 손동작을 잠시 멈출 때, 그 빈자리로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소란스러운 소망들을 비워낸 자리에 고요가 들어차는 것, 그것이 바로 충만한 비움의 시작입니다. 조각가가 돌을 깎아내는 것은 무언가를 더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어 그 안에 숨겨진 형상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삶에서 비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의 시선, 부질없는 집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세상은 거대한 파도와 같아서, 때로는 감상적인 이상(理想)만으로는 그 물결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한비가 우리에게 건네는 통찰은 차갑고도 단단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심(利己心)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관계의 역학을 읽어내는 것. 그것은 비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준엄한 생존의 기술입니다. 우리는 흔히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영혼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놓곤 합니다. 하지만 한비는 말합니다. 상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거꾸로 선 비늘, 곧 '역린(逆鱗)'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진정한 처세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아첨이 아니라, 그가 가진 고유한 경계를 존중하는 절제에서 시작됩니다. 말의 무게를 다스리고 침묵의 때를 아는 것, 그것은 타인을 향한 가장 고결한 배려이자 나를 화(禍)로부터 보호하는 단단한 성벽입니다. 세상은 단 한 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고, 한때 나를 구원했던 방식이 이제는 나를 옥죄는 굴레가 됩니다. 과거의 영광이라는 그루터기에 앉아 우연한 행운을 기다리는 수주대토(守株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장자(莊子)는 ‘허실생백(虛室生白)’이라는 아름다운 구절을 남겼습니다. "빈방에 하얀빛이 가득 찬다"라는 뜻입니다. 방이 가구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밝은 햇살이 내리쬐어도 빛이 머물 공간이 없지만, 방을 깨끗이 비워내면 비로소 사방에서 환한 빛이 들어와 가득 고인다는 이야깁니다. 현대인의 마음은 늘 무언가로 꽉 차 있습니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욕심,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들까지. 우리는 마음이라는 방에 쉴 새 없이 짐을 들여놓습니다. 하지만 장자는 말합니다. 마음의 방에 물건이 너무 많으면, 정작 그 방의 주인인 내가 편히 쉴 공간조차 사라진다고 말이지요. 가득 찬 방은 어둡고 답답할 뿐입니다. 지혜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집을 지을 때 어느 집이나 창문을 냅니다. 창문이 정말 쓸모 있는 이유는 유리나 창호로 막힌 모양이 아니라 그 안의 비어 있음입니다. 비어 있기에 빛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바람을 들일 수 있으며, 밖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부족해, 더 채워야 해’라고 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속담에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모양은 투박하고 거칠어도 그 속에 담긴 내용이나 본질이 진국일 때 쓰는 말이지요. 세상은 갈수록 반짝이는 것들에 열광합니다. 매끈한 도자기 같은 얼굴, 화려한 이력서, 번듯한 차림새... 우리는 너도나도 예쁜 그릇이 되기 위해 애쓰며 삽니다. 하지만 정작 배가 고프고 마음이 허기진 날 우리를 살리는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투박한 뚝배기 속의 된장찌개 한 그릇입니다. 뚝배기는 도자기처럼 매끄럽지 않습니다. 거친 흙으로 빚어 투박하고, 때로는 불길에 그을린 자국도 남아 있지요. 하지만 그 거친 표면의 미세한 숨구멍은 장(醬)이 맛있게 익어가도록 숨을 쉬게 해줍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매끈하고 빈틈없는 사람보다, 삶의 굴곡을 겪으며 생긴 적당한 주름과 투박한 손마디를 가진 사람에게 더 정이 갑니다. 그것은 그 거친 껍데기 안에 세월이라는 불길을 견뎌낸 진짜 사람 냄새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뚝배기의 진가는 불 위에서 내려온 뒤에 드러납니다. 얇고 화려한 그릇은 금방 뜨거워졌다가 이내 차갑게 식어버리지만, 두꺼운 뚝배기는 오랫동안 온기를 품습니다. 진정한 인연 또한 뚝배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우리는 타인과 연결될 때 안도감을 느끼며, 때로는 거대한 집단의 일원이 되어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군중이라는 거대하고 매혹적인 파도는 종종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삼켜버리고, 우리를 이성 없는 흐름으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군중심리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익명성입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을 때,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평소보다 과감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개별적인 존재로서 가졌던 도덕적 책임감은 집단 전체로 흩어져 증발해 버립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착각은 무고한 이에게 돌을 던지게 하고, 누군가를 무분별하게 찬양하거나 비난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다수의 선택이 곧 '정답'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한 방향을 가리킬 때, 혼자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눈과 귀를 대중의 의견에 스스로 맞춥니다. 이것이 바로 동조 현상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증명합니다. 다수가 항상 정의는 아니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