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인공지능이 며칠 걸릴 고민을 단 몇 초 만에 해결해 주는 시대입니다. 기술의 진보는 우리에게 여유를 약속했습니다. 물리적 노동에서 해방된 인간은 마땅히 그 남겨진 시간에 여유로운 행복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봅니다. 절약한 시간은 휴식이 되어 돌아오는 대신, 더 빠른 생산과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재투입됩니다. 10시간 걸리던 일이 1시간으로 줄어들면, 우리는 남은 9시간 동안 노는 것이 아니라 9배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재촉당합니다. 효율성이라는 이름의 채찍은 우리를 잠시도 멈춰 서게 두지 않습니다. 과거에 느림은 무능이 아니라 삶의 호흡이었습니다. 편지 한 통이 닿기를 기다리며 설렘의 숙성 시간을 가졌고,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떨어지는 잎새를 감상할 줄 알았습니다. 그 여유의 빈틈 속에서 예술이 태어났고, 사색이 깊어졌으며, 비로소 자아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느림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자 도태의 징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로딩 중인 화면의 3초를 견디지 못하고, 영상의 배속을 올리며 정보의 파편을 삼키기에 급급합니다. 삶의 밀도는 높아졌을지 모르나, 그 속에 담긴 영혼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조직의 쇠락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는 제국의 멸망이 칼날의 부러짐이나 성벽의 무너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질서의 미세한 균열에서 시작됨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거대한 조직이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순간은 화려한 불꽃이 꺼질 때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실금이 가기 시작할 때입니다. 조직의 수명이 다해갈 때 나타나는 첫 번째 징후는 이름과 실재의 괴리입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보다 눈앞의 편의를 택하고, 명분 없는 결정을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 시작할 때 조직의 뿌리는 흔들립니다. 사마광은 이를 예(禮)의 상실이라 불렀습니다. 상벌이 엄격함을 잊고, 공을 세우지 않은 자가 자리를 차지하며, 원칙이 권력자의 기분에 따라 휘어질 때 구성원들은 더 이상 조직의 내일을 믿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값어치가 무너진 자리에 탐욕과 기회주의가 돋아나는 것입니다. 조직이 정점에 올랐을 때 지도자의 주변에는 향기로운 말들이 가득 차기 마련입니다. 자치통감은 수많은 군주가 직언(直言)의 쓴맛을 버리고 아첨(阿諂)의 단맛을 택했을 때 어떤 파국을 맞이했는지 처절하게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하늘의 별이 제 자리를 지킴으로써 밤의 길잡이가 되듯, 진정한 충신이란 존재 또한 그러합니다. 충신은 단순히 윗사람의 그림자가 되어 발걸음을 뒤쫓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어 군주가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을 비추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진정한 충성은 입으로 달콤한 말을 나불대는 감미로운 복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서늘한 칼날 같고, 때로는 거친 바다 위를 버티는 무거운 닻과도 같습니다. 군주의 명(命)이 떨어질 때마다 "예"라고 화답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순종입니다. 군주의 명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 때 목숨을 걸고 "아니옵니다"라고 고하는 것은 오직 책임감의 무게를 아는 충신만이 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아첨하는 자는 군주의 기분을 살피지만, 충직한 자는 나라의 내일을 살핍니다. 그에게 군주는 섬겨야 할 대상인 동시에, 함께 올바른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충성은 눈앞의 권력에 머물지 않고, 대대손손 이어질 국가의 안녕을 향해 뻗어있습니다. 충신의 언어는 때로 쓰디쓴 약과 같아 귀를 아프게 하지만, 결국 나라를 살리고 백성들의 삶을 보존케 합니다. 자신의 안위보다 군주의 눈과 귀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바람 한 점 없는 오후,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옹기장이의 손길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옹기장이는 찰흙을 정성껏 쌓아 올려 둥근 외형을 만들지만, 정작 그 그릇을 그릇답게 만드는 것은 그가 만진 진흙이 아니라, 그 진흙이 감싸안은 텅 빈 공간입니다. 노자는 일찍이 이 고요한 빈칸의 값어치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릇을 쓰는 까닭은 그 단단한 흙을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안의 비어 있는 공간에 물건을 담기 위함이며, 방에 머무는 까닭은 벽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벽과 벽 사이의 빈 곳에 우리 몸을 뉘기 위함입니다. 존재(有)가 우리에게 이로움을 준다면, 비어 있음(無)은 우리에게 쓸모를 선물합니다. 우리의 삶 또한 하나의 그릇과 같습니다. 우리는 평생 그 그릇을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고, 남보다 더 다양한 지식과 명예, 소유물로 가득 채우려 애씁니다. 그러나 그릇이 가득 차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없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그릇은 결국 금이 가기 마련입니다. 마음의 그릇에 나라는 아집과 욕망이라는 집착이 꽉 들어차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진심도, 삶의 새로운 경이로움도 담아낼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비움은 결코 상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순욱은 조조가 아꼈던 최고의 전략가이자 정치적 동반자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가 있었죠. 순욱은 한나라의 신하로서 조조를 도와 도탄에 빠진 한나라를 재건하려고 했고 조조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으로 천하를 통일한 뒤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순욱은 조조의 창업을 결사반대합니다. "조공께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본래 한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안심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땅히 충절을 지키고 겸양해야지, 결코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 발언으로 조조는 순욱이 더 이상 자신의 야망에 동행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조조는 전장에 있던 순욱에게 도시락 하나를 보냅니다. 순욱이 떨리는 손으로 그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네게 줄 녹봉은 없다." 곧 너와 나의 인연은 끝났고, 너를 신하로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너는 이제 필요 없는 존재다." 곧 빈 그릇처럼 너의 쓰임새는 다했으니 알아서 거취를 결정하라는 압박이었죠. 순욱은 조조의 의중을 즉각 파악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바쳐 보좌했던 주군이 자신에게 절교를 명했다는 사실에 절망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오늘날 우리는 눈부신 물질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화려함을 구할 수 있고, 소유의 크기가 곧 존재의 높이로 치환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창고가 가득 찰수록 마음의 문틀에는 먼지가 쌓여갑니다. 물질적 풍요라는 화려한 비단 보자기가 사실은 정신적 빈곤이라는 앙상한 뼈대를 가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유산은 무엇일까요? 숫자가 적힌 통장은 비바람에 휩쓸려가는 모래성일 뿐이지만, 아이의 내면에 심어준 가치관과 슬기(지혜)는 평생을 비추는 꺼지지 않는 등불입니다. 부모가 밤잠을 설쳐가며 쌓아 올린 통장의 잔고는 자녀에게 안락한 침대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평온한 잠까지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물질은 유한하며, 외부의 파도에 쉽게 마모됩니다. 반면, 올바른 가치관은 삶의 폭풍우 속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는 단단한 뿌리가 됩니다.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어떤 사람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가르침은, 아이가 무너진 순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복원력이 됩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정답이 없는 문제들이 아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중국 사람들은 역대의 나라 가운데 당나라를 제일 좋아합니다. 당나라 때 태평성대가 많았고 문화적으로도 가장 화려한 업적을 남겼으니까요. 당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찬란한 번영을 이룬 왕이 당태종입니다.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가 위대한 통치를 한 뒤편에는, 황제의 서슬 퍼런 위엄 앞에서도 서늘한 직언을 멈추지 않았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위징(魏徵)이지요. 그가 당 태종에게 올린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는 단순히 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가 아니라,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경계하려 했던 인간의 고뇌와 이를 일깨우는 날카로운 통찰이 담긴 작품입니다. 창업보다 수성(守成)이 어렵다고 합니다. 당태종 이세민은 천하를 얻었으니, 마음이 교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위징이라는 신하가 있었죠. 위징은 곡학아세의 길을 거부하고, 군주의 마음속에 돋아나는 안일함이라는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 붓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간태종십사소」, 곧 '열 가지 생각해야 할 바를 올리는 글'입니다. 위징은 글의 서두에서 장엄한 비유로 포문을 엽니다. "나무를 잘 자라게 하려면 반드시 그 뿌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나라가 융성하는 데는 수백 년의 인내와 고결한 땀방울이 필요하지만, 그 찬란한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은 짧은 순간 단 한 줌의 부패한 흙탕물로부터 시작되곤 합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날카로운 적군의 칼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영혼을 갉아먹는 안으로부터의 침식입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 번째 징조는 귀가 닫히는 것입니다. 권력이 높아질수록 그 정점은 고요한 침묵의 방이 됩니다. 백성의 신음이 소음으로 치부되고, 쓴소리를 내뱉는 충언이 불경함으로 낙인찍힐 때, 나라는 길을 잃습니다. 임금이 자신만을 바라보며 천하를 다 가졌노라 착각하는 순간, 그 뒤편에서는 민심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제방을 허물기 시작합니다. 공적(公的)인 의무가 사사로운 이익의 제물이 될 때, 국가는 껍데기만 남은 고목이 됩니다. 법의 잣대가 사람에 따라 휘어지고, 공정함의 저울이 금권(金權)의 무게에 따라 기울어지는 사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내 편의 허물은 덮고 상대의 티끌은 산처럼 부풀리는 선별적 정의는 공동체의 신뢰라는 근간을 통째로 뒤흔드는 가장 치명적인 독입니다.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것은 내부의 갈등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경제학 교수라고 해서 모두 부자는 아닙니다. 어떤 분야에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현실과의 괴리감은 있게 마련이지요. 같은 의미로 조향사는 향기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가장 매혹적인 향수를 배합하는 조향사의 몸에서는 정작 아무런 향취도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향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냄새를 비워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팽창을 계산하고 수억 광년 떨어진 성단의 일생을 기록하는 천문학자는 그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고 연구하지만 정작 발을 딛고 선 땅 위에서는 단 한 평의 정원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무한(無限)을 사유한다고 해서 그 무한이 그의 영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시인은 정작 현실에서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차가운 차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합니다. 사랑의 본질을 언어로 빚어내기 위해 스스로 외로움이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富)를 연구하는 자가 부유하지 않고, 빛을 연구하는 자가 눈부시지 않듯, 가르치는 자의 위대함은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세계의 깊이에 있습니다. 가르침은 기계적인 지식의 전달을 의미하는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매독환주(買櫝還珠)’는 상자만 사고 진주를 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주객(主客)이 전도된 경우를 이야기하지요. 우리는 때로 눈부신 껍데기에 매료되어 그 안에 담긴 침묵의 본질을 잊곤 합니다. 한비자(韓非子)에는 매독환주(買櫝還珠)의 우화가 나옵니다. 초나라의 한 장사꾼이 진주를 팔기 위해 난초 향이 배어나는 좋은 나무로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상자에 금과 은으로 무늬를 새기고 장식하니, 진주보다 상자가 더 찬연히 빛났습니다. 그것을 본 정나라 사람이 값을 치르고 상자를 샀지만, 그 안의 진주를 꺼내 장사꾼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상자가 아름다워 샀을 뿐, 진주는 필요 없소."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주를 팔기 위해 상자를 꾸몄던 상인은 횡재를 하지요. 이 이야기는 비단 어리석은 정나라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쩌면 수많은 매독환주로 점철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기 위해 대화를 시작하지만, 진실한 공감보다는 세련된 말투와 화려한 수식어에 집착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반지를 준비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랑의 맹세보다 보석의 크기와 상표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본질인 진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