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갑자기 폭설이 설악산에 내렸다. 지난 2일(화) 부터 이틀 동안 속초시에 내린 눈은 약 100cm에 이른다. 겨울에도 눈구경 하기가 쉽지 않은데, 봄이 시작될 무렵의 폭설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조건 집을 나섰다. 차를 두고 지하철에, 고속버스에 걷기를 거듭하여 세시간 여 만에 설악산국립공원 입구에 닿았다. 눈이 많이 내렸지만 이미 봄이 되어 기온이 높다보니 시내는 빨리 녹아서 조금 질퍽거리는데 설악산국립공원이 가까워질수록 도로와 상가에 상상을 초월하는 눈이 쌓였다. 그야말로 폭설이다. 신흥사쪽에는 차량이 통제된지 이미 오래되어 오로지 걸어서만 국립공원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옛날 같지 않아서 많은 눈을 보기 어려운 요즈음, 이번 속초에 내린 눈은 평생 보지 못할 만큼의 눈이었다. 며칠이면 다 녹아 없어지겠지만 은세계에 빠진 설악은 잠시나마 세상의 시름을 잊을만큼 아름다웠다. 눈 쌓인 아름다운 세계도 사실 잠깐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도 우주의 시간에서 본다면 잠깐일 것이다. 온통 흰눈에 덮인 설악을 올려다보며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 과연 존재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2000년에 가까운 한국불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전국 어디나 절터가 없었던 곳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절들이 있었다. 지금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지역과 가까워 큰 절이 없는 지역인 연천이지만 이곳에도 많은 절들이 있었고 그 규모도 꽤 큰절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연천 오봉사와 스님의 승탑을 찾아본다. 오봉사는 연천 한탄강변 재인폭포 근처에 있는 고찰이었다. 오봉사는 신라시대 창건한 천년 고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타서 옛 자취는 대부분 사라지고, 오직 스님의 승탑 1기만이 외롭게 남았다. 그런데 신라말 이후 한국의 불교는 선종(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님과 같이 된다고 믿는 종파)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은 타계한 뒤 화장하여 유골 중 수습된 사리를 모아서 승탑을 만들었다. 이런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스님들의 승탑은 바로 그 스님의 업적과 덕행에 따라 당대의 예술적 감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승탑만 보아도 당시 제자들이 얼마나 스님을 존경하였는지 신도들은 스님의 깨달음의 정도가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하곤 하였다. 따라서 큰절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성주풀이는 집안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는 전통민요로 집을 지을 때나 새집으로 이사를 할 때 축원하며 부르는 한민족 대표민요로 본래는 무당이 부르는 노래였다. 여기서 "성주"는 집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뜻한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다 보면 성주의 본향이 어디인가를 물으면서 그곳은 안동의 제비원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제비원에는 크나큰 소나무가 있으며 그 소나무의 솔씨를 받아다가 심어서 성주목으로 키워서 집을 지을 때 대들보로 삼는다고 한다. 그러면 집안에 행복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대표적인 민요인 성주풀이가 유래한 안동 제비원의 "이천동마애불"이 있는 "연미사"를 지난 토요일(6일) 찾았다. 연미사가 있는 안동시 이천동은 옛부터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소백산을 넘기 전에 많은 선비들 상인들이 쉬어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제비원(요즈음으로 치면 호텔)로 쉬어가는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면서 험한 산길 소백산 산짐승 산적들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고, 또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면서 마애불에 소원을 빌었다. 그런데 이곳 제비원에는 연(燕=제비)이라는 처녀와 제비가 된 목수 욱바우골 와공과 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임진왜란을 겪은지 30여년 만에 또 다시 당한 외침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병자년(1636년)에 당한 오랑캐의 침략'이란 뜻으로, 임진왜란 후로도 전쟁 대비보다는 당쟁으로 국방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지 못한 결과로 또 다시 침략을 당하여 임진왜란 때는 당하지 않았던 치욕을 당하였다고 하여 한국역사상 최악의 치욕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송파구 삼전동으로 내려와 청나라 황제가 있는 선양을 향하여 삼배구고두(三跪九叩頭禮)(세번 큰절을 하면서 무릅을 꿀고, 머리는 아홉번 땅에 부딪치는 절)의 예로 항복한 뒤 청나라와 화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에서는 청나라는 변방에서 일어난 오랑캐이므로 청나라와 화친하는것은 조선이 사대해야 하는 명나라를 배반하는 일로 청나라와는 화친을 극구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척화파라고 부르는데, 그 중 맨 앞에서 전쟁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홍익한, 윤집, 오달재로 이들을 역사에서는 삼학사(三學士)라고 부른다. 인조가 항복한 뒤, 척화파의 3인은 선양으로 끌려간 뒤 청황제로부터 이제라도 마음을 돌려 청나라를 상국으로 받들 수 있느냐는 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경기도 하남시는 고대 삼국시대 백제가 처음 도읍지로 삼았다는 설이 있는데, 그 근거로는 하남시 이성산성이 백제시대 쌓은 성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의견이 모두 같지는 않지만, 백제의 처음 도읍지가 바로 한강이 흐르는 남쪽의 요충지인 이곳에 산성을 쌓아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그 근처에 왕궁과 관가를 짓고 성을 쌓아 백성들이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근거가 옳다면 도읍의 근처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신앙의 중심처로 서기 400년 대에 지어진 절도 있었을것이나, 현재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근처에서 절터가 발굴된 적은 없다. 그런데 확실히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하남시 이성산성 아래에는 오래된 절터가 있고, 그곳에 고려시대 초기로 평가되는 석탑도 있어, 어쩌면 그 절의 시작은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남시 춘궁동에는 고골 저수지 옆에 석탑이 2기가 서있는데, 하나는 5층이고 다른 하나는 3층이다. 두 석탑은 바로 옆에 세워져있지만,그 규모가 서로 달라 같은 시대에 세워진 것 같지는 않다. 탑의 규모로 보아서는 예부터 매우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보원사는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었던 큰 절이었다. 보원사의 창건은 백제 후기로 생각되는데, 보원사터 근처에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용현리마애삼존불》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용현리마애삼존불》은 백제 후기에 세운 보원사의 주변 기도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원사에 대한 기록은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 체징의 탑비에 나오는데, 보조선사 체징은 827년(흥덕왕2)에 보원사에서 구족계(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율)를 받았다고 한다. 또 신라 후기 효공왕8(904) 보원사는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로 융성하였다고 최치원이 법장화상전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런 보원사는 고려초 광종26년(975)에 당대 고승인 법인국사 탄문이 입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정종 2년(1036)에는 보원사의 계단(戒壇)에서 승과고시로 경전시험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계단(수계를 받는 제단)이 어디였는지 알 수 없으나 보원사에도 통도사 금강계단이나 금산사 방등계단 처럼 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왕산에 보원사가 있다고 한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 사세가 계속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그 이름도 생소한 봉업사(奉業寺)는 안성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폐허지만 한때 봉업사는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함께 고려시대 경기도 3대사찰로 꼽히는 거대한 규모의 절이었다. 절 이름 "봉업"이란 고려의 왕업을 받든다는 의미로, 조선조 서울 근처 왕릉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지었던 절들처럼 왕실과 관련된 절 이름이다. 현재 서울 근교에는 왕능과 관련된 절들로 남양주 봉선사, 강남 봉은사가 대표적인데, 봉선사는 세조의 광릉, 봉은사는 성종과 중종의 능을 관리하기 위한 절이었다. 안성의 봉업사는 고려의 첫 임금인 태조 왕건의 초상을 절에 모시고, 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던 절로 고려가 창건된 뒤 고려광종때 봉업사로 새롭게 중창된 뒤 조선이 들어설 때까지 고려왕실의 보살핌을 받고 융성했던 절이었다, 그러나 절의 흥망성쇠도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랐기에 조선이 들어선 이후 고려의 흔적 지우기 영향으로 봉업사는 조선시대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안성 봉업사가 있던 곳은 안성 죽주산성 바로 아래로 넓은 평지로, 지리적으로 영남에서 서울로 오르는 길목이어서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지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조선조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청계산은 경기도 과천시와 의왕시에 걸쳐있는 큰산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볼 때 남쪽의 아름다운 명산이다. 청계산은 근처 관악산(해발 629m) 보다는 약간 낮은 해발 618m에 이르는 산으로 결코 낮은 산이 아니다. 이 청계산에는 의왕시의 고찰인 청계사가 있다. 청계사의 창건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때라 하나, 크게 융성한 시기는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 10년(1284) 당시 고려 중신이었던 조인규가 막대한 사재를 중창불사에 투입하면서 부터다. 조인규는 청계사를 원찰로 삼아 100여명의 스님을 상주하게 하고, 자신의 사당을 짓고 자기 집안의 크고 작은 제사를 지내면서 극락왕생을 빌었다. 이후 조선으로 나라가 바뀐 뒤에는 이 절을 천태종에 복속시켰으며, 세조 13년(1431)에는 중창주 조인규의 6세손인 조현이 다시 한 번 중창하게 하였다. 그 뒤 연산군 9년(1503), 불교 탄압 당시 한양의 남쪽에 있던 봉은사가 맡았던 선종 본찰의 역할을 이곳 청계사에 맞겨 조선 선종의 본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에 타버려 폐사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국 절을 찾아다닐 때마다 '임진왜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지난 번 찾았던 강화도 고려산 적석사 주변에는 여러 절들이 있다. 그중에 적석사와 같은 시절 세워진 것으로 전하는 절들을 찾던 중 오늘은 백련사를 찾았다. 백련사는 인도에서 온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산꼭대기에 있는 연못에 피어있던 아름다운 5색깔의 연꽃 가운데 하얀연꽃이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 시절 인도에서 온 스님은 고려산 주변에 절을 짓기 위하여 몇날 며칠을 살폈다. 그러다가 하룻밤 꿈속에 나타난 노인이 고려산 꼭대기에 올라보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 뒤 고려산엘 올랐다. 가서 보니 산꼭대기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 아름답게 피어난 화려한 연꽃5송이가 있어, 이를 하늘 높이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이 명당터라 생각하고 5곳에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 스님이 창건한 절은 동쪽에 청련사, 남쪽에 적련사(현재 적석사), 가운데에는 황련사, 서쪽에는 백련사, 북쪽에는 흑련사로 전하고 있다. 5곳의 절 가운데 흑련사의 존재는 확인이 안되고 있지만 이곳을 뺀 4곳의 절은 지금도 같은 전설을 간직한채 그 전설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절들은 고구려시절의 유적이나 유물은 찾을 수 없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강화도는 한민족의 태고적부터 역사유적이 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선사이전으로 따지면 수많은 고인돌들이 있고, 마니산에는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산성과 산의 꼭대기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참성단이 있다. 그리고 이후로 많은 유적들이 있지만, 고려시대 세계를 휩쓸던 몽골과의 투쟁과정에 임시왕도가 되었던 곳이 강화도다. 그런 까닭으로 강화도에는 읍내의 중심에 강화산성이 있고, 그 가운데는 고려궁지가 있었다. 지금은 고려궁지가 얼마나 컸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아쉽지만 고려궁지의 일부만이 남아서 옛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고려는 세계를 휩쓸던 몽골과 싸우기 위하여, 개경을 떠나 급한 물줄기로 나뉘어 섬이된 이곳 강화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투쟁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 힘이 무한하다는 부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자 대구 부인사에 있었던 대장경을 대신할 팔만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는데, 그 팔만대장경의 판각지도 또한 강화도였다. 그렇게 몽골과 투쟁시절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은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 강화도에는 오래된 절들도 많은데, 오늘은 그 가운데서도 고구려시대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절들 중 하나인 적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