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변산반도 서쪽 해안가에는 채석강과 적벽강이 있는데 그 이름은 모두 지형 모습이 중국의 땅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 채석강이 시선(詩仙) 이태백의 유래에 따른다면, 적벽강은 송나라의 시인으로 당송 팔대가에 이름이 높은 소동파와 관계가 있다. 소동파는 뛰어난 문장가였으나 47세 당시 실권자였던 왕안석과 불화로 황주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그곳으로 친구인 양세창이 찾아왔다. 소동파는 친구 양세창과 뱃놀이를 하면서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는데, 적벽부는 천하의 명문장으로 지금도 유명하다. 그런데 그 적벽부를 지었던 곳인 양자강의 지류인 적벽강으로 그 풍광이 이곳 부안 변산반도와 닮았다하여 조선의 선비들이 그 이름을 적벽강이라고 한 것이다. 변산반도 적벽강은 화산용암과 퇴적암이 혼합된 페퍼라이트와, 화산석과 퇴적암층이 혼재하고 있다. 또 바위가 깨어져 파도에 뒹굴면서 갈려서 둥근 몽돌이 된 것들과, 그 몽돌들이 바위 암반의 사이에서 휘돌면서 바위 암반을 파서 만든 돌개구멍들도 있어, 한 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암반을 볼 수 있는 매우 특이한 곳이기도 하였다. 또 바로 옆 채석강과 적벽강의 사이에는 옛부터 험한 바다를 삶의 터전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변산반도는 한국의 지형 가운데 지질학적으로 매우 특이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한국의 지형이 대부분 화강암지대고 그 형성은 백두대간에서 시작된 산줄기들이 남으로 뻗어내려오면서 가지치기를 하며 이루어져 있으며, 그 가지와 가지사이에는 주로 서쪽으로 평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남서쪽으로 올수록 평야지역이고, 북동쪽일수록 높고 험하고 깊은 산들로 이루어졌다. 특이하게 변산반도는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쳐 내려온 호남정맥 줄기에서 별도로 떨어져 독립된 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지형으로, 본래는 지하 용암이 분출로 이루어진 화산암이 물에 씻겨 쌓여서 이루어진 검은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변산반도의 산들은 그리 높은 산들은 아니지만 가장 높은 의상봉은 높이 508m에 이르며, 옛부터 호남의 명산으로 불려왔다. 변산반도의 안쪽에는 내변산으로 상당히 험한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변산은 서해로 뻗어 바다에 접하고 있다. 내변산에는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우금산성이 있으며, 그 안에는 천년고찰 내소사와 개암사가 있는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역사적 전쟁의 흔적으로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첫번째 망한뒤 포기하지 않고 왕자풍을 중심으로 복실장군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꽃무릇이 한창인 9월 말 고창 선운사를 돌아서 도솔천을 따라서 4km를 걸어 선운산 깊숙히 들어가면 도솔암이 나온다. 도솔암으로 길을 걷다보면 약 3.5km 정도 쯤에 둥글고 큰 바위동굴이 나타나는데, 이 굴의 이름은 "진흥굴"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이 늙어서 왕위를 버리고 이곳에서 수행을 하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하는 진흥굴이다. 그런데 그때는 백제땅이었기에 진흥왕이 왔을 것 같지는 않다. 전설같은 이야기로 이굴의 영험함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흥굴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도솔암이 나타나고, 도솔암에서 한고개 더 오르면 커다란 바위절벽에 마치 초등학교 어린이가 그린 듯한 모습의 천진스럽고 커다란 선으로 그린 돌부처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도솔암 미륵불이다. 도솔암 미륵불은 언제 조성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세상이 혼란스러운 때가 되자, 이 미륵불의 배꼽에 조선의 운명을 예언하는 비기(秘記)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비기의 내용이 궁금하여 미륵불의 배꼽에 감추어진 미륵불의 비기를 꺼내려고 하였으나, 이곳이 가파르고 높은 절벽이라 감히 오르기도 쉽지않고, 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무더위와 코로나19로 힘겹던 2020년 여름도 한풀 꺾여,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이 지나고 보니 하루가 다르게 계절도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하루에도 동쪽에서 아침에 해가 뜨고 한낮에는 그 강렬함에 뜨겁다가 차츰 기울어 서산으로 기울 때는 그 강렬했던 햇볕도 부드럽고 그윽한 느낌에 아쉬움으로 조금 더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단 1초도 그자리에 머물 수 없는 것이 무한한 영겁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오늘은 서해바닷가 부안의 솔섬에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지는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순간속에 무한 영겁의 세월을 느껴 본다. 오늘 지는 해가 내일 다시 힘차게 떠오를 것을 우리는 알기에 지는 해를 아쉬워 하지 않고, 보내며, 내일 솟을 해에 희망을 걸고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이 있다. 아무리 더위가 심해도, 또 이상하리만큼 덥지않고 지나가는 여름이라도 매년 세월이 흘러 9월 중순이 되면 땅속에 웅크리고 있던 뿌리에서 꽃대가 솟아나 주변을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이 꽃이 바로 가을을 알리는 꽃무릇이다. 꽃무릇은 뿌리덩이 여러해살이 식물로, 꽃과 잎이 서로 다른 계절에 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잎과 꽃이 함께 있는 때가 없기에 둘은 그리워 하지만 영원히 만날수 없다고 하여, 상사화로도 불린다. 꽃무릇의 꽃은 9월 중순에 피어나 9월 하순이면 시들고 말지만, 그 잎은 꽃이 지고 난 뒤 늦가을이면 푸른 난초잎처럼 곧게 피어나, 다른식물들이 다 시든 겨울동안에도 얼어죽지 않고 푸른 잎으로 살아있다가, 다른 식물들이 피어나는 봄이면 시들어 버린다. 그리고 땅위에는 아무런 자취가 없이 여름을 견디고, 가을 찬바람이 불 때면 어김없이 다시 꽃대를 올려서 이처럼 정렬적인 꽃을 피워낸다. 가을의 전령인 꽃무릇은 한국의 남쪽지방인 고창 선운사, 함평 용천사, 영광 불갑사에 많이 피어나며, 그밖에 다른 절들에는 조금씩 군데군데 피어난다.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은 문화재청(청장 정재숙)과 함께 그동안 박물관에 수장 전시되고 있던 유물들 중에 그 값어치를 정당하게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가. 새롭게 국보 또는 보물로 인정되어 그 번호를 새롭게 받은 선조들의 예술작품들을 모아서 오는 9월 27일까지 전시중이다. 이번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 특별전은 지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 동안 지정된 국보・보물 157건 가운데 이동이 어려운 건축 문화재와 중량이 무거운 문화재 등을 뺀 83건 196점을 공개하는 자리로, 국보와 보물 공개 전시로는 사상 가장 큰 규모다. 이번 전시는 기관・개인・절 등 문화재 대여 기관만 모두 34곳이나 되는 만큼 평소에 한 자리에서 보기 힘들었던,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다양한 종류의 국보와 보물이 새롭게 납시는 자리다. 전시는 ▲ 역사를 지키다, ▲ 예술을 펼치다, ▲ 염원을 담다 등 3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마침내 국보가 된 기록유산1부 ‘역사를 지키다’는 우리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다양한 기록 유산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침내 국보로 승격된 《삼국사기》(국보 제322-1호, 옥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조선의 임금들은 중심도읍인 한양의 근처에 그 능들이 펼쳐져있다. 이에 파주에도 두곳의 조선왕릉이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통일로 근처에 있는 파주삼릉(공릉, 순릉, 영릉) 중 공릉을 찾아보았다. 파주 삼릉 가운데 공릉은 조선의 7번재 임금인 세조시절 온갖 권력을 휘둘렀던 한명회의 딸로 세조의 첫번재 아들인 예종의 왕비가 되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원손(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고 만 장순왕후의 능이다. 장순왕후은 1445년 태어나 1461년에 죽었으니, 꽃다운 나이에 죽어, 왕비로서의 예를 갖추지 못한 채 무덤을 썼으며, 뒤에 능으로 승격되었으나, 능의 석물들은 왕비의 능으로는 너무도 빈약한 편이다. 장순왕후는 예종이 왕이 되기 전에 죽기도 하였지만, 예종 또한 1468년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13달만에 죽고말았기에 왕비의 능으로 잘 가꾸질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장순왕후의 공릉을 살펴보면, 능의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정자각으로 인도하는 신도가 있으나, 이 또한 최소한의 형식만 갖추고 있다. 신도를 따라가다 능방향으로 꺾어들면 정자각이 있고, 그 정자각의 뒷편에 소박한 장순왕후의 능이 있다. 능의 앞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파주 장릉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에 있는 조선 제16대 임금(재위 1623 ~ 1649) 인조와 그의 부인 인열왕후가 함께 묻힌 왕릉이다. 파주 장릉은 두사람이 함께 있으나 봉분은 하나이며 능의 앞에 있는 혼유석은 2개가 설치되었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이되었는데, 반정에 성공한 뒤 공신록상 등급에 불만을 품었던 이괄이 난을 일으켰으며, 북방의 여진족을 무시하여 결국 국란을 불러들여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가 결국 내려와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나라 황제를 향하여 항복하였다. 인조는 이를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 당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아무리 청나라가 강한 나라라 하더라도 이들은 유교의 종주국인 명나라를 멸망시킨 오랑캐요 언젠가 반드시 그 원한을 되갚아야할 원수였다. 그리하여 늘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한번도 북벌을 위한 출병은 하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의 국시는 송나라 주자가 세운 유교의 한 학파인 성리학만이 유일한 학문으로 숭상하였다 이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유교경전 중에서도 오직 주자가가 해석한 것만을 믿고 따르고 가르쳤는데 주자가 해석한 것과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은 모두 사문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한국의 산하에는 역사의 현장에서 흥망을 거듭했던 절들이 많다.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산속에 있는 절들이지만 격동기에는 어김없이 그 현장에서 전란의 바람과 우뢰를 피하지 못했다. 오늘은 서울에서 가까운 양평의 사나사(遮那寺)를 찾아 본다. 사나사는 경기도 북부지역에 있는 본찰 봉선사 말사로 그 창건연대는 923년이며 창건주는 대경스님으로 전해오고 있다. 창건주인 대경스님은 제자 융천과 함께 삼층석탑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삼층 석탑이 대경스님이 조성한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현재 절에 있는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는 신라석탑의 전통을 이었지만 규모가 작고, 탑의 상륜부도 변형된 형태이다. 그 이유가 전란으로 없어진 상륜부를 부분적으로 보완해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흡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라의 전형인 불국사 석가탑의 모습과 비례와 구성(2층기단, 3개층의 석탑)이 거의 비슷하며, 다만 그 크기만 작은 편이다. 사나사라는 절 이름은 매우 익숙하지 않은 특이한 이름인데, 이는 불교의 한 부처님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부처님의 이름은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분은 이 세상에 오신 석가모니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청간정(淸澗亭)은 강원도 고성군 동해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지어진 작은 정자이다. 한국인은 옛부터 전망이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풍광을 즐기며, 여름이면 무더위를 식히며, 보이는 자연을 자신의 느낌으로 시를 지었고, 그 중에 내노라 하는 시인들을 이를 목판에 새겨서 정자의 한편에 붙여놓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하였다. 이곳 고성 청간정은 한양에서 강릉을 향하여 걷고 걸어 크고 높다는 대관령을 구비구비 오르고 또 올라 먼 산길을 돌고 강릉으로 내려와, 다시 북쪽 바닷가 길을 따라 오르면서 설악산과 울산바위를 돌아보며, 속초에 다다른다. 속초부터 그동안 걸어온 험한길은 끝나고, 앞으로는 평탄한 길로 왼쪽으로는 험한 설악의 산세를 감상하며, 오른쪽에는 탁트인 파란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금강산까지 쉬엄쉬엄 갈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에 지은 멋진 누각으로 운치있는 정자이다. 속초를 지나 고성에 접어들어 바닷가에 지어진 청간정으로 가는 길은 빽빽한 소나무 숲인데, 역사를 음미하며 옛정취를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을 지나며 들르지 않을 수 없는 명소이기도 하다. 청간정은 백두대간이 동서로 나눈 대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