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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한국 선불교 살려낸 경허스님의 청계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청계산은 경기도 과천시와 의왕시에 걸쳐있는 큰산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볼 때 남쪽의 아름다운 명산이다. 청계산은 근처 관악산(해발 629m) 보다는 약간 낮은 해발 618m에 이르는 산으로 결코 낮은 산이 아니다. 이 청계산에는 의왕시의 고찰인 청계사가 있다.

 

청계사의 창건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때라 하나, 크게 융성한 시기는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 10년(1284) 당시 고려 중신이었던 조인규가 막대한 사재를 중창불사에 투입하면서 부터다. 조인규는 청계사를 원찰로 삼아 100여명의 스님을 상주하게 하고, 자신의 사당을 짓고 자기 집안의 크고 작은 제사를 지내면서 극락왕생을 빌었다.

 

이후 조선으로 나라가 바뀐 뒤에는 이 절을 천태종에 복속시켰으며, 세조 13년(1431)에는 중창주 조인규의 6세손인 조현이 다시 한 번 중창하게 하였다. 그 뒤 연산군 9년(1503), 불교 탄압 당시 한양의 남쪽에 있던 봉은사가 맡았던 선종 본찰의 역할을 이곳 청계사에 맞겨 조선 선종의 본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에 타버려 폐사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국 절을 찾아다닐 때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는 유래를 접하면서 일본이 이웃나라라는 게 유감이라는 생각이 든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렇게 폐사 되었던 청계사는 숙종 15년(1689) 성희스님에 의하여 재창건 되었다. 한편, 청계사는 영조 37년 당시 왕세손이었던 시절 정조가 찾아와 왕실을 위한 기도처로 삼고 밤나무 3,000주를 심어 절 재정에 도움이 되게 한 점은 특이하다.

 

이후 정조13년(1789) 현릉원 재각을 세웠고 정조22년(1798)에는 창건주 조인규의 후손인 조무의가 시주하여 전각의 불사가 이루어졌다. 그 뒤로 조선 후기를 거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가람으로 지어져 내려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고대 화려하게 꽃피웠던 불교학문과 선불교로서의 철학적으로 이름난 고승들이 나타나지 못하여 불교의 사찰이 단순히 죽은 조상의 극락왕생만을 빌어주는 기복불교로서 명맥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철학적, 종교적으로 추락하여 한국땅에서 소멸되어가던 시기인 조선 말기에 다시금 한국의 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1849 ~ 1912)스님이 바로 이곳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뒤 사라진 한국 선불교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청계사에는 경허스님의 승탑과 그의 수제자들인 만공스님, 경월스님, 월산스님의 승탑과 탑비가 세워져있다. 이곳 청계사가 현재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출발지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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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