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단속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는데, 그 창건내력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덕왕 7년(748) '이순'이 창건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경덕왕 22년(763) '신충'이 지었다는 설이다. 처음 창건기에 나오는 '이순'은 젊은 시절부터 불심이 깊어 부처님을 정성으로받들었는데, 젊은 시절부터 말하기를나이 오십이 되면 출가하여 절을 짓기로 발원하였다. 그러던 그가 50살 되는 해, 현재의 위치에는 이미작은 암자가있었는데, 이곳 암자에들어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고, 차츰절을 크게 중창하고 단속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763년 당대의 충신어었던'신충'이 지리산으로 두 친구와 유람을 왔다가스님이 되었는데, 임금은 신충의 능력을아껴그를 중책에 쓰려고두번이나 불렀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신충은 왕의 부름에 답하기를 "신은사문이 되어 임금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 까지 임금의 복을 빌겠습니다"고 하며 나오지를 않자임금은 그제서야 그의출가를허락하였다고 한다. 현재 단속사터의 경내 한 복판에는 절터의동서쪽으로삼층석탑 두기가 남아 있는데, 절터의 본당(극락전 또는 대웅전)이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명산으로 지리산을 빼고 말할 수 없다. 지리산은 그 높이가 1,915m의 천왕봉을 최고봉으로 제석봉 촟대봉 명선봉 반야봉 토끼봉 삼도봉 노고단 등 1,700m를 넘는 봉우리들이 솟아있으나, 설악산과는 달리 바위들이 솟아나 보이지 않고 온통 숲으로 쌓여있어 품이 넓어 누구나 받아줄 것 같은 넉넉함을 느낄 수 있는 산이다. 품이 넓은 지리산에는 그냥 들어가도 얼마든지 살수 있는 어머니 같은 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지리산은 산의 넓이가 넓어 많은 골짜기가 있으며 곳곳에 한국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산으로, 예부터 신성시 하면서 살아왔다. 그리하여 그 이름도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방장산(方丈山)으로도 불린다. 지리산은 지리적으로는 백두산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등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리다 설악산을 지나 강원도 태백산을 기점으로 남서쪽으로 꺾여서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덕유산을 지나 한국 남쪽의 중간에 높고 넓게 자리하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에 걸쳐 넓게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의 주변으로는 골짜기마다 많은 큰 절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큰 절들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지리산의 주변에 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남 창녕에 있는 우포는 한국에 있는 복합용도의 습지다. 우포는 토평천 동쪽에 제방을 쌓아서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경계의 바깥에는 논이 많이 있고, 반대방향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산사이에 흐르던 물이 바로 빠져나가지 않고 넓게 고여있었던 자연호수로, 그 아래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 역할도 한 것이다. 우포는 본래 지금보다 훨씬 큰 늪지였으나, 농경지로 개간하기 위하여 인공으로 제방을 쌓아 그 면적이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 면적은 2,000,000평방미터에 이르며, 늪의 깊이는 사람이 내려서도 가슴정도로깊지 않지만 물속에는 붕어를 비롯한 민물고기들이 많이 살고 있다. 늪지는 진흙 뻘로 가득하여 언듯보면 더러운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바다의 갯뻘처럼 더러운 물을 받아들여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포는 크게 우포늪, 목포늪, 사지포, 쪽지벌 등 4개의 늪으로 나뉘어 있으나, 보통 4개의 늪을 대표로 우포로 불린다. 우포는 지질학적으로 1억 4천만년 전인중생대 경상계 퇴적암과 퇴적암이 뚤고 들어간화강암으로 그 바닥지질이구성되었는데, 늪은 지질학적인 형성층보다 훨씬 뒤인 신생대에 습지로 형성되었다. 이후 빙하기와 간빙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팔공산 주변에는 많은 절들이 있다. 그 가운데 큰 절만 살펴보면 동화사, 부인사, 송림사, 은해사가 있다.팔공산과 접하고 있는 경북의 시군은 경산시, 칠곡군, 영천시, 대구광역시가 있으며,그 산 높이도 해발 1192m에 이른다. 전라도 광주에 명산 부등산이 있다면 경상도 대구에는 명산 팔공산이 있는 것이다. 이 팔공산에 있는 많은 절들 가운데는 고려시대 초조대장경을 새기고봉안했던 부인사가 있는데, 부인사는 몽골의 침략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초조팔만대장경의 일부는 지금도 일본 교토 남례사(南禮寺)에 남아서 전하고 있다. 조국을 떠난 초조대장경판의수는 1,715판이다. 조국을 떠나 타국에 있지만, 화재를 당하고도 살아남아 있어줌 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고, 제자리를 떠나서 아쉽기도 하다. 오늘은 경상도의 명산 팔공산의 많은 많은 절들 가운데 영천에 있는 은해사를 돌아본다. 은해사의 창건은 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개창한 절로 처음 이름은 해안사라고 하였다. 이 해안사를 고려원종 5년(1264) 흥진국사가 중창하였다가, 조선 명종 1년(1546) 그 위치를 이전하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영천에는 영산전으로 유명한 거조사가 있다. 거조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절이라고 하나창건당시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경내에 자리한 영산전은 고려 후기에 건축된 건물로연대가 오래된 한국 전통건축물로 꼽힌다. 영산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영축산을 재현한 전각이다. 그 때 영축산에는 무수한 사람들과 신들이 모여들어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을 들었다고 하며, 그 설법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깨달은 사람들 곧 아라한들이 설법을 듣는 모습을 재현하여 영산전을 세운 것이다. 그런 영산전이 있는 거조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면 신라 효성왕 2년(738) 원참법사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하는 설과경덕왕(742~765)때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의 역사가 신라까지 올라가는오래된 거조사는 경상북도 내 명산인 팔공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아미타불이 머물고 있다는 뜻에서 거조사(居祖寺)라고 불렀다. 이 거조사는 다른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 부처님을 주존불로 모신 전각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삼막사는 관악산의 남쪽 삼성산에 있는 오래된 절이다. 삼성산은 관악산보다 낮은 해발 480m로그 이름은3인의 성인이 장막을 치고 수도하였다고 하여 붙은 이름인데, 통일신라 초기 원효, 의상, 윤필, 3인의 성인이 함께 수도하다가 절을 지었다고 하여 삼막사라고 했다. 삼막사지에 따르면, 삼막사는 원효스님이 처음 창건하였고, 신라 말에는 도선국사가 중건하면서, 한때는 관음사라고 불렀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중수하고 다시 삼막사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말에는 나옹화상도 무학대사와 함께 이곳에 잠시 머물렀으며, 조선을 개국하고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국운 융성을 기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조선 초기인 1398년 왕실의 도움으로 여러 전각들도 중건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억불의 시대로 접어들어중창불사는 크게 이루지 못하고겨우 명맥을 유지하였고, 1880년 고종17년에 현재의 명부전을 짓고 이듬해 칠성각을 중건하였다.조선조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볼 때, 동서남북 방위별 명찰 중에 속해 남쪽을 대표하는 절이기도 하였다. 조선조 서울을 중심으로 4대명찰은 동쪽에는 불암사, 남쪽에는 삼막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창녕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역사유적으로는 삼국시대 이전 가야시대부터 유적들이 남아있다. 험한 바위산인 화왕산의 산마루 근처에는 넓은 부분에 산성을 쌓았는데성의 둘레길이가 2.6km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이 화왕산의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관룡사가 위치하고 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관룡사는 창건연대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창건된 절로 역사도 깊다. 신라의 불교공인은 법흥왕14년(527)으로 관룡사의 창건은 신라 진평왕 5년(583) 증법국사가 처음 개창했다고 전하며, 관룡사의 창건은 신라의 절 들 가운데서는 매우 빠른 시기이다.이후 관룡사는 신라에서 8대 사찰로도 이름이 높았다. 관룡사는 600년 대 원효대사가 있을 때는 제자 1천명을 모으고 화엄경을 설법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관룡사라는 절의 이름은 창건주 증법국사가 절을 지을 때 화왕산 위에 있는 3개의 연못에 살던 아홉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는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후의 많은역사는 기록된 것이 전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든 건축물과 그 안에 있던 기록들이 불에 타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처님과 관련한 그림을 불화라고 하는데 불화 중에 가장 큰 불화는 괘불이다. 괘불은 대웅전처럼 부처님을 모신것이 아니라, 대웅전 밖에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의식의 주인공으로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그린 불화이다. 이런 불화는 주로 부처님 오신날 또는 영산재 수륙재 등 많은 신도들이 모일 때, 절에 온 많은 신도들이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안으로 다들어가기 어려운 날 대웅전 밖에 괘불대에걸고 법회를 하기 위하여 조성하였다. 그런 괘불은 너무 커서행사가 끝나면 족자처럼 둥글게 몰아서, 보관함에 넣어서불전의 뒷편에 주로 보관하고 있다. 이런 괘불은 행사에 많은 신도들이 모이는 큰 절에 주로 있는 것으로, 괘불이 있는 절은 그것 만으로도 절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괘불의 원류는 유목민인 몽골인들이 창안한 불화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목초지를 찾아 말을 타고 늘 이동하는 생활을 하기때문에 이동하면서도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말에 실을 수 있는 크기의 이동에 편리한 두루말이식으로 부처님 그림을 그려서 가지고 다니면서 예불을 했던데 유래한다. 이런 불화가한국에는 고려 후기 몽골시기에전해져 괘불이 생겨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오백나한이란 오백명의 '나한'이란 뜻인데, '나한'이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가운데사람으로는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하는 말로, 본래는 '아라한'이었다. 그런데, '아'자를 빼고 부르기 쉽게 '나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람이 깨달음을 위하여 수도정진하면 그 깨침의 정도에 따라, 4단계를 거쳐야 아라한이 된다고 하는데, 그 첫째단계는 '수다원' 단계이고, 둘째단계는 '사다함'인데 사다함과에 이른 사람은 한번은 윤회해야 하는 단계이며, 셋째단계는' 아나함'이고, 마지막 단계에 이른 수도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아라한'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단계로 불가에서는 중생계에서는 부처님과 같은 단계로 여기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많은 수도자들이 부처님처럼 '아라한'과의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부처님은 수많은 아라한과에 든 제자들을 거느리고 주요 경전을 설하고 또수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부처님처럼 해탈의 경지에 들었기에 그 능력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불자들에게는 자신의 작은 소원정도는 이루어줄 수 있는 능력있는 의탁자로 아라한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생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 곁에는 살아서 바보라는 말 듣기를 좋아했던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정치인으로 쉽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자기 옆에 무수히 많았지만 그 길을 마다하고 굳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가 그 길을 택하여 갔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 길은 비록 어렵지만 바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노무현을 우리는 바보라고 불렀다. 그런 바보 노무현은 그 길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던 많은 국민들이 있어서 천신만고 끝에 바보들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 나라를 바보들의 세상이 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된 뒤 그는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했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바보를 손가락질하며 비아냥댔고, 그를 따르던 많은 국민들은 그를 보호하거나 변호해주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는 어렵사리 대통령직을 마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피폐한 고향농촌을 되살리는 일에만 매진하고자 하였으나 현실정치에서는 그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뒤에도 끊임없는 뒷조사와 먼지떨이, 그리고 누명이 씌워지자 그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던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