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신라시대 쇳물을 녹여서 만든 미소짓는철부처님이다. 정교한 조각술과주물기법에 감탄사가 절로 나는 아름답고 당당한 부처님이나, 본래 서산 '성주사'에 모셔졌던 부처님이 조선조 500여년 불교의 탄압으로 성주사절은 폐사가 되고, 불상과 불탑만 폐허속에 나뒹굴다가 1918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수습되어, 여기 저기 거쳐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오게 되었다. 모든 생명있는 존재는 그 무엇이든 성주괴공(成住壞空 어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서, 한동안 머물다, 상황이 변하면 파괴되고, 결국 본래자리 공으로 돌아간다)한다는 불법(佛法)의 진리 과정 중에 한 장면임을 생각하게 한다. 언젠가 현재의 모습마저도 사라질 날이 있을 것이지만, 가능한 그리 되지 말고한민족의 부처님으로 당당한 모습 오래오래볼 수 있길 빌어본다. 이런 생각 또한 어리석은 중생의 짧은 생각이겠지만 ... !!!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 대리석 불감, 상 중 하 3단으로 구분된 불감 ▲ 불감의 상부 , 천상의 세계를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 ▲ 불감의 몸통, 부처님과 좌우에는 보살과 제자가 협시하고 있는 모습 ▲ 불감의 하부. 부처님을 호위하는 역사가 좌우에 있고, 불감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 금동보살 서있는 모습 ▲ 작은 속불들로 발해의 서울인 상경성에서 발굴된 불상들 ▲ 2불이 함께 있는 모습(석가불과 다보불)으로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불의 설법이 맡다고 증명하는 다보불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이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중인 발해유물임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발해는 한민족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과 부여를 거쳐 형성된 고대왕조로,한반도 내에 있던통일신라와 오랫동안 공존하였었다. 그러나우리는 오랫동안발해가 우리와 같은한민족의 형제왕국이었다는 것을 잊고 살아왔다.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으로 공격하여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의 유민들과 그 지역의또다른 한민족 계열의 사람들이 고구려의 영토위에 다시 세웠던 왕조로698년~ 926년까지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토인 남만주일대에서 한반도 북부지방에서 광대한 영토와 한민족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 숲에 안긴 길상사 극락전 본래 전각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다. ▲ 길상사 경내로 들어오는 신도들 ▲ 극락전 앞에 핀 코스모스 ▲ 길상사의 아담한 석등 ▲ 법정스님의 초상화가 있는 진영각 올해 마지막 꽃무릇이 피어있다. ▲ 법정스님 초상화가 있는 진연각 현판 ▲ 법정스님의 진영각을 나오는 스님 ▲ 길상화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서울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절로 성북동에 길상사가 있다. 길상사는 최근세의 정치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요정 대원각이라는 유명한 곳이었다. 이 요정은 길상화(김영한)이라는 노 보살이 무소유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글을 써오던 법정스님의참다운 수행승모습에 반하여 평생 갖은 고생과 역경을 이기고, 이룩했던 자신의 전 재산을 아무런 댓가없이 법정스님에게 기부하여 절로 다시탄생한 것이다. 요정이 절이 될 수 있다는 좋은 예이니, 본래부터 '어떠한 모습' 이란 존재하지 않은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길상사는 본래부터 절로 가꾸기 위한 것이 아니어서전각의 배치가 우리가 많이 보아오던 절의 격식에는 잘 맞지 않지만, 산과 계곡사이에 지어진 건물들을 모두 이용하여 절의 전각과 숙
▲ 늦게 핀 꽃무릇 ▲ 시들어가는 꽃무릇 ▲ 화려한 외출을 끝내고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매년 9월이면 전국의 많은 절들에는 꽃무릇이 빨갛게 피어난다. 잎과 꽃이 따로 피기에 서로 만날 수 없는 연인을 연상한다하여 상사화로도 불리우는 꽃무릇이절 주변을 한동안 아름답게 장식하고 이제 잎을 피우기 위하여시들어간다. 서울에서는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의 앞마당과 계곡쪽에도 꽃무릇이피어나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이제 그 화려함도 거두는 듯하고, 나무 그늘 밑에마지막 남은 몇송이의 꽃무릇을 보고, 또 시들어가는 꽃을 보며, 어김없이 변화하는 계절을 느낀다. 꽃무릇은 참으로 신비롭다. 지구상의 다른 꽃들은 봄이면 피어나고 가을이면 시드는데 꽃무릇은 봄에는 잎이 지고, 남들이 시들기 시작할 가을 초입이 되면 땅속에 숨겨두었던 뿌리가 서서이 깨어나 녹색의 꽃대를 올리고, 그 꽃대에서 새빨갛게 꽃이피어난다. 꽃잎도 다른 화초류들처럼 둥근 모양이 아니라 굽은 바늘처럼 날카롭게 피어나면서도 화려함을 자랑한다. 그 꽃잎에 햇빛에 비치면 더욱 화려한 자태를 보여준다. 이렇게 피어난 꽃은 10일 정도 피었다가 스르르 시들어간다. 하지만 시드는 꽃잎은그 아름답던
▲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치료하기 위한 영약을 담는 청자정병주전자 ▲ 용머리 형태의 입을 단 청자주전자. 흙으로 빗여만든 용머리 모양이 섬세하다. ▲ 몸통의 모양을 참외의 모양에서 차용한 청자주전자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고려청자 중에서 주전자를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첫번째 청자정병은 고려시대 불교의 의식에 주로 썼던 것으로 고려불화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늘 가지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정병에는 버드나무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버드나무는 옛날부터 약재로 많이 썼던 까닭이며, 현재에도 버드나무잎에서 추출한 약재는 아스피린의 주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두번째는 용머리모양의 주둥이를 한 섬세한 청자주전자이다. 모습이 무척 깔끔하고 화려하다. 고려 귀족들의 화려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이런 주전자에 술을 마신다면 그 맛 또한 더욱 일품이었을 것이다. 셋째는 몸통을 참외 모양을 한 주전자로 참외 줄무늬가 잘 표현되었다. 술을 담을 때에는 참외꼭지같은 뚜껑을 열고 술을 담았고, 주전자 입과 손잡이는 별도로 만들어 붙였다.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고려청자들로, 900년 전의 조상님들의 미적 감각과 기술을 보면서 새삼 감탄하지 않을
▲ 재현된 움집의 내부모습 ▲ 움집 현장 ▲ 움집의 평면도 [그린경제/얼레빗= 최우성 기자] 몽촌토성이 있는 서울 올림픽공원 안에는 올림픽 때 만든 공원시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발자취도 남아있다. 올림픽공원을 만들면서 발굴조사를 마무리하고 세운 몽촌토성내 백제초기 움집박물관은 2000년 전의 사람들이 어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자료관이다. 지금 생각하면 저런 곳에서 어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작고 초라해서 집이라기 보다는 헛간 같은 곳이지만, 사람은 애초에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속에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차츰 문명이 발전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런 형태의 움집마저도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속에서 튼튼한 나무를 잘라다가 기둥 겸 서까래를 세우고 그 위에는 갈대 등을 얹어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시설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살던 사람에 견주면 큰 진전인 것이다. 이런 움집도 없던 시절 사람은 기껏해야 동굴 같은 곳을 찾아눈과 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집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서나서부터 사람은 동굴을 차지하기 위해 동물들과 싸우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집을 지을
▲ 토성의 목책 전경 ▲ 목책의 측면 ▲ 방어를 위해 설치한 목책 ▲ 목책의 정면 ▲ 토성아래 설치한 목책 재현품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올림픽공원의 언덕으로바뀐 몽촌토성과 그 토성에 설치했을 것으로 보는'목책의 재현품'이다. 한성 백제의 역사시작은 하남 위례성이라 했지만, 그 동안 발굴 결과로는 궁궐이 들어설 만한 곳들에 대하여는추정할 뿐 정확히 어디가 백제의 궁궐터였고, 관아와 민가들은 어디였는지, 또 그 규모는 어떻했는지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동안 급속한개발과정에서 온국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무지로 국가가 살피지 못하는 사이에 땅속의 유물들이 손실되어갔고, 성내 궁궐과 관아터들도 많이 손실된 탓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로는 풍납동 풍납토성 안쪽에 아파트 재개발을 위해서 지하실을 파다가 발견된 유물들 그리고 일부 백제의 건축물 유구와 도로유구등이 발견되어,풍납토성의 안쪽이 궁궐등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고, 이곳 몽촌토성도 백제시대의 토성이었음은 분명히 밝혀졌고, 백제시대의 읍성의 형태와 규모도 일부 발굴조사되었다. 그 유물들은 현재몽촌토성 안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너무도 미흡하지만 백제시대의
▲ 높이 1.5m 내외인 동종의 전체모습 한국종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한 고려시대 종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원만한 곡선에 상부에는 용과 음관인 만파식적이 있고, 몸체는 종유와 당좌와 보살상이 그려져있다 ▲ 용의 한쪽발에 여의주를 들고 있고, 한쪽발은 허공을 누비는 듯하다. 포효하는 듯한 용의 얼굴과 자세가 무척 생동감이 넘친다. 용의 몸체에는 똑바로선 음관이 있어 한국종만의 특징도 잘 보여준다. 이 음관을 만파식적이라 부르며, 종을 침면 그 소리에 온갖 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여 만들었다. ▲ 종의 상부 4귀에 돋아있는 종유로 9개가 연꽃 봉우리 모양이다. ▲ 종을 치는 당목이 닿는 당좌 ▲ 4면에 새겨진 기도하는 보살상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높이 약 1.5m 안팎의 고려시대 종으로 그리 크지는 않은 동종이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형태는 한국의 범종으로서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종의 등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지추밀원사 호부상서 상징군 조 와 처 하원군부인이 천수무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사바세계 중생의 고통이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가득하길 기원하며 쇠 70근을 시주하여 만들었다, 별장 동정 한정 동량 지유가 동
▲ 두물머리 배다리 ▲ 배다리와 현대식 다리 ▲ 배다리에 쓰인 배(보수시 활용?) ▲ 배다리처럼 보이지 않는 배다리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두물머리에서 세미원으로 물로 나뉜 길을이어주는 배다리! 섬과 섬, 섬과 육지, 강의 이쪽과 저쪽, 물이 있어 서로 떨어진 곳이라면 그 곳이 어디든 사람이 오고가고, 물건이 전달되려면무엇인가 이어주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개울이나 시냇물처럼 얕은물 이라면성큼성큼 건너뛰는돌다리가 필요하고, 강폭이 넓고 깊이가 깊어지면, 돌다리로는 안되니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가지를 얹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씌운섶다리라도 놓아야 이쪽 저쪽을 오갈 수 있다. 그러나 섶다리는매년 홍수가 지면 흔적도 없이 떠내려 가버리니, 가능한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는 돌을 쌓아 다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고인돌처럼 넓은 돌판을 올려놓으면 돌다리가 되나, 이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하기에,이런 돌다리는 흔치가 않다. 지금 남아있는 이런 다리는 진천 농다리가 있고, 자연석이 아닌잘 다듬어서 만들면 현재로서는장충단 공원의 수표교나, 청계천의 광통교, 뚝섬의 살곶이다리 등이 있다. 건너야할 강폭이 더 넓고 깊어지면 돌이나 나
▲ 가신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세워진 백범기념관 ▲ 백범기념관 정면 ▲ 백범기념관 1층에 있는 백범석상의 정면. 청춘을 나라 독립에다 바치고 늙어서광복을 맞이했으나 또 다시 분단의 아픔을 보고 통탄하던 백범김구선생.. ▲ 석상의 옆모습. 이루지 못한 통일의 꿈은 언제 이뤄질지...!!! ▲ 이른 아침에 백범의 뜻을 기리는 시민 한 분이 한동안 묵념을 드리며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 백범의 무덤에 시들어가는 국화꽃다발이 놓여있다. 이루지 못한 통일의 꿈 때문에 아직도 편한 영면의잠을 못들고 있을 듯 하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조선 말 1876년 강화도 불평등조약을 맺던 해에 태어나 1949년 한국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동포의 총탄에 쓰러진 한민족의 지도자로 온 생을 바쳤던 백범김구선생 ! 나라가 외세들의 각축장이 되고, 일제의 야욕에 발버둥치다가 결국 조선이 망하는 것을 보고, 그는 오랜 방황을 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그는혼자 잘사는 것을 포기하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며, 일제가 병합해버린 내조국 조선땅을 건지기 위해 남의 땅 중국에서하루 하루 끼니를 거르면서도임시정부를 꾸리는데 온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