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현된 움집의 내부모습 ▲ 움집 현장 ▲ 움집의 평면도 [그린경제/얼레빗= 최우성 기자] 몽촌토성이 있는 서울 올림픽공원 안에는 올림픽 때 만든 공원시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발자취도 남아있다. 올림픽공원을 만들면서 발굴조사를 마무리하고 세운 몽촌토성내 백제초기 움집박물관은 2000년 전의 사람들이 어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자료관이다. 지금 생각하면 저런 곳에서 어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작고 초라해서 집이라기 보다는 헛간 같은 곳이지만, 사람은 애초에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속에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차츰 문명이 발전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런 형태의 움집마저도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속에서 튼튼한 나무를 잘라다가 기둥 겸 서까래를 세우고 그 위에는 갈대 등을 얹어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시설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살던 사람에 견주면 큰 진전인 것이다. 이런 움집도 없던 시절 사람은 기껏해야 동굴 같은 곳을 찾아눈과 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집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서나서부터 사람은 동굴을 차지하기 위해 동물들과 싸우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집을 지을
▲ 토성의 목책 전경 ▲ 목책의 측면 ▲ 방어를 위해 설치한 목책 ▲ 목책의 정면 ▲ 토성아래 설치한 목책 재현품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올림픽공원의 언덕으로바뀐 몽촌토성과 그 토성에 설치했을 것으로 보는'목책의 재현품'이다. 한성 백제의 역사시작은 하남 위례성이라 했지만, 그 동안 발굴 결과로는 궁궐이 들어설 만한 곳들에 대하여는추정할 뿐 정확히 어디가 백제의 궁궐터였고, 관아와 민가들은 어디였는지, 또 그 규모는 어떻했는지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동안 급속한개발과정에서 온국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무지로 국가가 살피지 못하는 사이에 땅속의 유물들이 손실되어갔고, 성내 궁궐과 관아터들도 많이 손실된 탓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로는 풍납동 풍납토성 안쪽에 아파트 재개발을 위해서 지하실을 파다가 발견된 유물들 그리고 일부 백제의 건축물 유구와 도로유구등이 발견되어,풍납토성의 안쪽이 궁궐등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고, 이곳 몽촌토성도 백제시대의 토성이었음은 분명히 밝혀졌고, 백제시대의 읍성의 형태와 규모도 일부 발굴조사되었다. 그 유물들은 현재몽촌토성 안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너무도 미흡하지만 백제시대의
▲ 높이 1.5m 내외인 동종의 전체모습 한국종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한 고려시대 종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원만한 곡선에 상부에는 용과 음관인 만파식적이 있고, 몸체는 종유와 당좌와 보살상이 그려져있다 ▲ 용의 한쪽발에 여의주를 들고 있고, 한쪽발은 허공을 누비는 듯하다. 포효하는 듯한 용의 얼굴과 자세가 무척 생동감이 넘친다. 용의 몸체에는 똑바로선 음관이 있어 한국종만의 특징도 잘 보여준다. 이 음관을 만파식적이라 부르며, 종을 침면 그 소리에 온갖 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여 만들었다. ▲ 종의 상부 4귀에 돋아있는 종유로 9개가 연꽃 봉우리 모양이다. ▲ 종을 치는 당목이 닿는 당좌 ▲ 4면에 새겨진 기도하는 보살상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높이 약 1.5m 안팎의 고려시대 종으로 그리 크지는 않은 동종이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형태는 한국의 범종으로서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종의 등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지추밀원사 호부상서 상징군 조 와 처 하원군부인이 천수무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사바세계 중생의 고통이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가득하길 기원하며 쇠 70근을 시주하여 만들었다, 별장 동정 한정 동량 지유가 동
▲ 두물머리 배다리 ▲ 배다리와 현대식 다리 ▲ 배다리에 쓰인 배(보수시 활용?) ▲ 배다리처럼 보이지 않는 배다리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두물머리에서 세미원으로 물로 나뉜 길을이어주는 배다리! 섬과 섬, 섬과 육지, 강의 이쪽과 저쪽, 물이 있어 서로 떨어진 곳이라면 그 곳이 어디든 사람이 오고가고, 물건이 전달되려면무엇인가 이어주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개울이나 시냇물처럼 얕은물 이라면성큼성큼 건너뛰는돌다리가 필요하고, 강폭이 넓고 깊이가 깊어지면, 돌다리로는 안되니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가지를 얹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씌운섶다리라도 놓아야 이쪽 저쪽을 오갈 수 있다. 그러나 섶다리는매년 홍수가 지면 흔적도 없이 떠내려 가버리니, 가능한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는 돌을 쌓아 다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고인돌처럼 넓은 돌판을 올려놓으면 돌다리가 되나, 이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하기에,이런 돌다리는 흔치가 않다. 지금 남아있는 이런 다리는 진천 농다리가 있고, 자연석이 아닌잘 다듬어서 만들면 현재로서는장충단 공원의 수표교나, 청계천의 광통교, 뚝섬의 살곶이다리 등이 있다. 건너야할 강폭이 더 넓고 깊어지면 돌이나 나
▲ 가신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세워진 백범기념관 ▲ 백범기념관 정면 ▲ 백범기념관 1층에 있는 백범석상의 정면. 청춘을 나라 독립에다 바치고 늙어서광복을 맞이했으나 또 다시 분단의 아픔을 보고 통탄하던 백범김구선생.. ▲ 석상의 옆모습. 이루지 못한 통일의 꿈은 언제 이뤄질지...!!! ▲ 이른 아침에 백범의 뜻을 기리는 시민 한 분이 한동안 묵념을 드리며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 백범의 무덤에 시들어가는 국화꽃다발이 놓여있다. 이루지 못한 통일의 꿈 때문에 아직도 편한 영면의잠을 못들고 있을 듯 하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조선 말 1876년 강화도 불평등조약을 맺던 해에 태어나 1949년 한국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동포의 총탄에 쓰러진 한민족의 지도자로 온 생을 바쳤던 백범김구선생 ! 나라가 외세들의 각축장이 되고, 일제의 야욕에 발버둥치다가 결국 조선이 망하는 것을 보고, 그는 오랜 방황을 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그는혼자 잘사는 것을 포기하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며, 일제가 병합해버린 내조국 조선땅을 건지기 위해 남의 땅 중국에서하루 하루 끼니를 거르면서도임시정부를 꾸리는데 온 힘을
▲ 마지막 까지 든실한 열매를 알차게 ▲ 꽃은 다 지고 이제는 연밥만이 가득한 연밭. 계절의흐름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듯! ▲ 고개숙인 연봉. 속에는 알차게 익은 연자들이 있겠지요?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한가위가 지나고나니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확연하다. 강가에는 새벽 물안개가 피어나고,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이 찾아오니, 만물은 다시 결실의 때를 맞이하여, 다음 해를 기약하며 부지런히 알곡이 여물도록 서두르며,겨울 준비를 하고 있다. 진흙밭의 더러운 물속에 뿌리를 박고서 화려한 꽃을 피운다하여 진흙 밭은 사바세계요, 화려한 연꽃은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낸다 하여 불교의 상징이 된 연꽃도, 그 화려하게 뽐내던 늦봄부터 한여름 내내 피어나던꽃들도이제는 꽃은 간데없고,열매를 맺느라 여념이 없다.. 비가 올 때면 한잎 따서 우산으로 쓸 수 있을 만큼 넓고 넉넉한 연잎도 하루가 다르게 그 푸르름이 변해간다. 연자씨앗을 가득 담은 연밥도 더 이상 새로운 욕심부리지 않고 할일을 다한 듯 고개를 숙인다. 가을이 깊어감을 연밭의 갈색연방(연자를 담은 봉오리)의 고개숙인 모습에서 실감한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
▲ 여명을 카레라에 담는 사진가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밤잠을 설치고 새벽 길을 찾아온 두물머리! 새아침의 아름다운 풍광을 열심히 담고 있는 사진가!! 멋진 장면 많이 담았겠지요??!!!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 방화수류정 전경. 복잡한 현태의 지붕구조는 평면구조가 복잡해서 생긴 것. ▲ 방화수류정 현판.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은 송나라 시인 정명도의 시에서 따왔다. ▲ 방화수류정을 담는 외국인 ▲ 방화수류정의 1층 출입문. 벽돌을 무지개처럼 쌓았다. ▲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방화수류정은 수원 화성의 북수문 언덕 위에 있다. 수원시(화성)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물길을 가로질러 화성의 북쪽수구에5개의 홍예가 있는 화홍문을 설치하였고, 그 화홍문의 동쪽 언덕 위에 방화수류정을 지었다. 이 정자는전시 북수문을 통해 들어오려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요새였고, 평시에는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는 정자요, 누각으로지어진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그 모양이 무척 화려하고 지붕의 구조도 아주 복잡하다. 방화수류정이라는누각의명칭은 송나라 시인 정호(호, 명도)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운담풍경오천(雲淡風景午天) 방화수류과전천(防花隨柳過前川) 에서 나온 것이다. 송나라 정호는 그의 아우 정이천과 함께 2정자(二鄭子)로 불릴만큼 유학에탁월한 학자였으며, 불교와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학문은 불교의 심오한 철학을 유학에
▲ 화성 동북포루에서 본 화성-1 ▲ 화성 동북포루에서 본 화성-2 ▲ 화성 동북포루에서 본 화성-3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수원 화성을 탐방하다 보면 누각형으로 지은 건물에 판벽으로 둘러 싸인 포루가 있다. 그 포루에 올라보면 총구멍이 뜷려있는 곳이 있는데그 총구멍으로 본 주변 화성의 경치들도 아름답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 중문 회랑 근처에서 본 정림사탑. 강당 회랑터에 소나무를 심었다 ▲ 정림사탑과 강당. 금당자리는 잔디밭으로 덮여있고 뒤에 강당건물에는 석불이 모셔져 있다. ▲ 강당에서 본 정림사지 석탑. 본래 강당은 스님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곳으로 넓은 공간이다. ▲ 정림사지 석탑은 2층기단에 쌓은 5층석탑이다. 이 탑의 특징은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탑으로 백제의 미적 감각이 잘 드러나는 탑이다. ▲ 대각선 방향에서 올려본 정림사지 석탑 ▲ 측면에서 위로 올려본 정림사지 석탑 ▲ 소정방이 평백제탑이라 새겨놓아서 소정방이 세운 탑으로 오해하였던 적이 있다. ▲ [탁본 사진] 정림사지 5층석탑의 1층 탑신부에 소정방이 새긴 낙인같은 문신. 이를 새기고 백제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잔치를 벌였고, 후대에 그를 기념하여 시까지 짓고 이를 새겼다고 한다. ▲ 정림사의 가람배치. 연지, 중문, 탑, 금당, 강당으로 질서정연하며 강당과 중문은 주변에 회랑을 두었다. 마치 경복궁의 근정전 후면부터 근정문에 이르는 회랑을 두른 듯하다. ▲ 정림사의 가람배치 모형도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백제의 마지막 왕도인 부여의 왕궁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