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8 (수)

  • 구름많음동두천 13.5℃
  • 맑음강릉 21.3℃
  • 구름조금서울 16.9℃
  • 맑음대전 18.6℃
  • 맑음대구 16.6℃
  • 맑음울산 16.8℃
  • 맑음광주 17.3℃
  • 맑음부산 18.2℃
  • 맑음고창 16.5℃
  • 맑음제주 17.5℃
  • 구름조금강화 13.2℃
  • 맑음보은 11.9℃
  • 맑음금산 15.2℃
  • 맑음강진군 12.5℃
  • 맑음경주시 12.4℃
  • 맑음거제 15.6℃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전체기사 보기


태조부터 세종까지 네 임금 섬긴 허조

몸집이 작고 등이 구부러진 장애도 극복해 꼿꼿이 살다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8]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허조 : 예악(禮樂)제도와 올곧음 세종 시대의 인사들을 살피고 있다. 허조(許稠, 1369~1439)는 조선 초 문신으로 태조ㆍ정종ㆍ태종ㆍ세종의 네 임금을 섬기며 법전을 편수하고 예악제도를 정비하였다.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인데, 나이 17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9살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권근(權近)에게 학문을 배웠다. 생애 · 1383년(우왕 9) : 진사시에 우왕 1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공양왕 2년(1390)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 태조 6년(1397) : 석전(釋奠, 문묘-文廟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6품 관직)로서 지제교(조선시대 임금이 내리는 교서의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직)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 종5품 관직)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집의(사헌부 종3품 관직)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청백리 맹사성의 ‘공당문답’

정계의 음유 시인 맹사성- ②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7]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 황희와 더불어 번영 시대를 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맹사성(孟思誠)이다. 그는 태종과 세종 사이 6조를 두루 걸치며 참판과 판서를 지냈고 세종 9년(1427)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맹사성은 1360년(공민왕 9) ~ 세종 20년(1438)까지의 문신이다. 그는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했으나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전 게재에 이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430년(세종 12년) : (아악 연주의 타당함 등에 대해 의논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하물며 아악은 중국 역대의 제작이 서로 같지 않고, 황종(黃鍾)의 소리도 또한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 아악의 법도는 중국도 정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조회나 하례에 모두 아악을 연주하려고 하나, 황종(黃鍾)의 관(管)으로는 절후의 풍기(風氣) 역시 쉽게 낼 수 없을 것 같다. 우

이순지, 《칠정산내외편》을 쓰다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4]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이순지(李純之, ?∼1465)는 세종 때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조선 전기 대표 천문학자다. 이순지의 출신배경은 장영실과 다르다. 양반 출신에 문과시험도 급제한 문관 관료다. 이순지는 세종 9년(14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서운관 판사 등을 거쳤고, 문종 때에는 호조참의 그리고 단종 때에는 예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고, 세조 때에는 한성부윤(현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많은 사람이 세종 때 과학자 하면 장영실을 떠올리지만, 업적으로 따지면 이순지도 장영실 못지않다. 문관 출신이지만, 한양의 위도를 맞출 정도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순지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천문학자가 된 것은 25살인 1430년 무렵에 세종이 선발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후대 《세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465년 (행 상호군 이순지의 졸기) 행 상호군 이순지가 졸(卒)하다. 이순지의 자(子)는 성보(誠甫)며, 정미년(세종 9년, 142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세종은 달력에 의해 천체의 운행을 추정하는 일이 면밀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을 가려서 산법(算法)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순지가 근본을 캐어 들어가 연

이천, 안순과 함께 간의대를 설치하다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3] 이천(李蓚) - ③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조에 무인 출신으로 세종의 천문의기제작 프로젝트에 이천이 총괄 책임자로 임명되자 이후 명에 따라 실무연구팀을 구성했다. 이 연구팀에는 장영실이 제작 실무 책임자가 되었고 당대의 천문학자인 이순지가 이론을 뒷받침하여 먼저 혼천의를 비롯한 목간의를 제작했으며 계속하여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을 만들어 냈다. 간의대 설치 이전인 세종 18년(1436)에는 천문의기 제작사업이 마무리 단계로 들어가고 있을 무렵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야인(野人)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은 이듬해에 이천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야인정벌의 명을 내렸다.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상언하기를, "대완구(大碗口)가 너무 무거워서 싣고 부리기에 어려워서 실제로 쓸모가 없고, 오직 중완구(中碗口)가 성을 공격하는 데 편리하지만, 소에게 실을 수 없으며, 소완구(小碗口)는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만약에 중완구와 소완구의 중간 정도쯤 되게 다시 만든다면 말에 싣는 데 편리할 것입니다. 신이 본도에서 감독해서 만들려 하오나 도내에서 철물이 없사오니, 청하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