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7 (토)

  • 흐림동두천 30.2℃
  • 흐림강릉 32.2℃
  • 흐림서울 31.2℃
  • 구름많음대전 31.9℃
  • 구름많음대구 30.6℃
  • 구름많음울산 32.0℃
  • 광주 27.1℃
  • 구름조금부산 30.4℃
  • 구름많음고창 29.5℃
  • 제주 30.7℃
  • 흐림강화 29.5℃
  • 구름많음보은 30.6℃
  • 흐림금산 30.7℃
  • 흐림강진군 30.4℃
  • 구름많음경주시 33.3℃
  • 구름많음거제 29.6℃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전체기사 보기


간행언청(諫行言聽, 간하면 행하고 말하면 들어주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가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간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과제가 정해지면 좋은 해답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그리고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갔다. 특히 임금이라면 백성을 보는 눈이 신하들이 보는 관점과 다를 수 있는데 세종은 신하들의 건의[소, 訴]를 비교적 잘 받아들였다. 이의 대한 한 증거로 신하가 직접 임금을 평가하는 말을 한 증거가 허조의 졸기에서 나왔다.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허조의 졸기) 좌의정 허조(許稠)가 졸(卒)하였다. 허조는 경상도 하양현 사람인데 나이 17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9살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뒤에 은문(恩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자기의 시관(試官)을 가리켜 일컫는 말) 염정수(廉廷秀)가 사형을 당하였는데, 문하생(門下生)과 옛 부하이던 아전들이 감히 가 보는 이가 없었는데, 조(稠)는 홀로 시체를 어루만지며 슬피 울고, 널을

락어토론(樂於討論, 토론을 즐겨 하시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4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가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간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과제가 정해지면 토론하여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갔다. 이 가운데 특히 필요한 문제는 좋은 해답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토론을 즐겨하시다 (성균 생원 방운 등이 회암사의 대대적인 수리와 아울러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상소하다) 성균 생원 방운(方運) 등이 상서하기를, "신 등이 그윽이 천하의 도리를 살피옵건대, 바른 것이 있고 사특한 것이 있사와, 바른 것이 오르면 우리의 도가 행하여... 이제 우리 주상 전하께옵서는 하늘의 운행이 질서 있음을 본받으시어 이(离, 주역의 괘명)를 잇고 밝음을 향하사, 몸을 다스리시되 항상 조심하시고 삼가심을 잊지 아니하심에 이르시고, 덕(德)이 비록 성하시나 더욱 토론을 즐겨하시고, 열성(列聖)의 아름다운 법을 본받으시어 만대에 길이 힘입을 것을 넓히려 생각하셨나이다. (그 결과) 노비의 수효를 감하여 관부(官府)에 적(籍)을

문어농부(問於農夫, 농부에게 까닭을 묻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3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가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간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과제가 정해지면 토론하여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갔다. 이 가운데 특히 필요한 문제는 해당 관련된 사람에게 물었다. 농민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농사법을 개량해 나갔다. 다른 임금에게서 찾을 수 없는 세종 7년의 한 예가 있다. (심한 가뭄으로 농사 사정을 알아보고자 서문 밖에 나가 두루 살피다.) 임금이 말하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다. 소나기가 잠시 내렸으나, 안개가 끼고 흙비가 왔을 뿐이다.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여 이렇게 되니, 장차 벼농사 형편을 나가 보리라." 하고, 드디어 서문 밖에 나가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 대언(代言, 승지)들에게 말하였다. "금년 벼농사는 모두들 ‘꽤 잘 되었다.’라고 하더니, 오늘 보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오늘 본 영서역(迎曙驛) 홍제원의 땅은 비옥한 편인가 메마른 편인가." 하니 지신사 곽존중(郭存中)이 대답하기를, "이들 땅은 원래

고제이문(古制以聞, 옛 제도를 조사하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2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임금에게 고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의제가 되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더욱 연구하여, 그것도 두뇌집단인 집현전의 집단지성을 통하여 좋은 해법을 찾아 현장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나갔다.’(以爲恒式) 그 가운데 경연 등을 통해 옛 문헌을 공부하고 현실에서 고쳐 나갈 길을 찾으려 했다. 그 첫 번째 과제로 옛 문헌이나 관례를 찾는 ‘고제이문(古制以聞)’이 있다. 둑제(纛祭)에 대한 의견 한 예로 세종 12년 둑제를 지낼 때 무반의 참여 여부를 문헌에서 찾는다. 이에 무반의 배제를 허락지 말 것을 건의한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교지(敎旨)를 받자온즉, ‘서반(西班)에서 호군(護軍, 정4품의 무관) 이상은 둑제(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둑[纛]에 지내는 국가 제사)를 지낼 때 재계(齋戒,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함)를 드리지도 않고 배제(陪祭, 임금을 모시고 함께 제사 지냄

광문편부(廣問便否, 좋은지 나쁜지를 널리 물어보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1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일처리에 앞서 문제점을 조사하고 옛 문헌과 자료를 살피고, 여러 사람에게 물으며, 관계자와 토론하며 더 좋은 방안을 찾으려 했다. 답을 찾은 후에는 항식(恒式, 항상 따라야 하는 형식이나 정해진 법식)으로 법제화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옳고 그른 것인지 널리 물었다. 여기 세종 4년에 한증소의 이익과 무익에 대해 논의한 예가 있다. 예조에 전지(傳旨)하기를, "병든 사람으로 한증소(汗蒸所)*에 와서 당초에 땀을 내면 병이 나으리라 하였던 것이, 그 탓으로 죽은 자가 흔히 있게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널리 물어보아(廣問便否)’, 과연 이익이 없다면 폐지할 것이요, 만일 병에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가서 보도록 하되, 환자가 오면 그의 병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기운이 약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4/ 8/ 25) * 숯이나 도자기를 굽고 남은 가마 속 열기로 땀을 내 몸의 독소를 배출하던 곳 또 다른 예로 세종 17년 좌의정 최윤덕이 국경방비에 따른 군사시설정비, 무

사가독서(賜暇讀書, 출근하지 말고 책을 읽으라)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10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사가독서는 조선 시대 젊은 문신들이 임금의 명으로 직무를 쉬면서 글을 읽고 학문을 닦던 제도다. 세종은 국가의 지식확대와 전문가 양성을 위해 문신들에게 출근하지 않고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글을 읽던 곳을 독서당(讀書堂) 또는 호당(湖堂)으로 불렀기 때문에 독서당 제도 또는 호당 제도로 부르기도 한다. 세종 2년(1420) 3월에 집현전을 설치한 뒤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 재행(才行)이 뛰어난 자를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고 그 경비 일체를 나라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세종 8년(1426)에 문신 가운데서 덕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아 사가(賜暇 : 휴가를 줌) 하도록 하여 집에서 공부하게 한 것이 그 시초로, 집현전의 대제학 변계량이 임금의 명령을 받고 이를 행하였다. (집현전 부교리 권채 등을 불러 집현관으로서 독서에만 전념하라고 명하다)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 권채(權綵)와 저작랑(著作郞) 신석견(辛石堅)ㆍ정자(正字)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회보소민(懷保小民) : 백성을 편안하게 보호한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9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회보소민 : 태종공정대왕 휼추선지 회보소민(太宗恭定大王, 遹追先志, 懷保小民), 《세종실록》 9/3/16) 세종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백성 통칭 소민(小民)을 품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린 백성에 대하여 소인, 평민, 우민 등의 호칭이 있다. 소인(小人) : (양녕이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다) 신의 들은 바로 미루어 보면 경사대부(卿士大夫,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 이외의 모든 벼슬아치의 아우른 말)부터 여염집 소인[서민]들까지도 모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세종실록》 1/1/30) 평민(平民) : 양녕(讓寧)이 항상 말하기를, 평민들과 더불어 같이 살고, 사냥으로써 스스로 마음 즐기기를 원한다.(《세종실록》 즉위년 11/7) 정신적으로 하위에 있다는 뜻으로는 우민(愚民)이란 호칭이 있다 민(民)에서 신민(新民) 그리고 생민(生民)으로 민은 약하다. 이러한 민을 세종은 자기 일을 하는 신민(新民), 항심을 갖고 일을 의식할 줄 아는 생민(生民)이 되기를 바랐다. 민(民)은 백성 민이라 하고 사람을 가리킨다. 뜻으로는 ① 사람 ② 잠을 자다의 眠(면)과 통용된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母(모) 자나 女(여) 자의 상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