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왕조실록>에 풍운뢰우(風雲雷雨)는 87번이나 등장한다. 이후 문장은 기우제나 산천제와 연결되는 문장이다. * (풍운뢰우제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다) 임금이 풍운뢰우제(風雲雷雨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세종실록⟫6/2/3) ‘기우제(祈雨祭)’란 낱말은 모두 822건 등장하는데 세종 때 92건, 숙종ㆍ영조 때도 90여 건이 된다. 세종 때 가뭄이 심한 탓도 있었겠지만 단지 비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에 대비한 간척, 저수지, 수로 문제 등 여러 일과 연결되어 있으며, 세종 때 농사에 관해 관심이 컸다는 방증도 되겠다. 세종 때를 중심으로 비에 관한 기사들을 보자. * (풍우 재앙이 심한 영춘ㆍ단양에 조세를 면제하다) 충청도 도관찰사 이종선(李種善)이 계하기를, "영춘(永春)ㆍ단양(丹陽)에 풍우(風雨)의 재앙이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어, 손실(損失)이 8, 9분에 이르렀으니, 원하옵건대, 금년 조세(租稅)는 한 섬[石] 이하의 것은 면제하여 주기를 비옵나이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4/10/5) * (장마가 계속될 것 같아 밀·보리가 성숙하는 대로 재촉하여 베게 하다) 경기 감사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그 역사를 보자. 《세종실록》 25년(1443) 12월 30일 기사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다’라고 되어 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ㆍ중성(中聲)ㆍ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 속된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세종실록⟫25/12/30) 이후 잠잠하다가 다시 세종 28년에 기사가 나온다. 3년 동안 훈민정음에 대한 음운연구와 구체적인 시행방안 등의 연구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어 세종 28년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진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이 있다.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정치를 펴는 데 있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로 인재들을 모으고 합당한 임무를 주고 뒤에서 보조해 주는 데 있었다. 임금이 인재등용의 중요성에 대해 이조에 전지한다. 이조에 전지하기를, "정치하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관원이 그 직무에 적당한 자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지나니, 그 직위에 있는 동반 6품과 서반 4품 이상으로 하여금 현직이나 해직 중을 가리지 말고 슬기로움과 씩씩함이 뛰어나서 가히 변방을 지킬 만한 사람과 공정하고 총명하여 가히 수령직에 대비할 수 있는 자와, 사무에 능숙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극히 번거로운 자리에 감당할 수 있는 자 3명을 각각 천거하여 임용에 충당하게 하되, 혹 그 인재를 알기 어렵거든 과목마다 반드시 각기 한 사람씩을 찾아서 구할 것 없이 다만 아는 대로 〈쓸 만한 사람〉 3인을 천거하게 하라. 만약 사정에 따라 잘못 천거하여, 〈그 사람이〉 재물을 탐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그 해가 백성에게 미치게 한 자는 율문을 살펴서 죄를 과하되, 조금이라도 가차 없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5/11/25) 인재 추천을 통해 임용에 임하되 정사를 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