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백성이 잘사는 길을 추구하는[民爲邦本] 세종은 그 실천과정의 하나로 신제(新制, 新製)나 창제를 목표로 삼았다. 그 방법으로는 고전에서 관례를 찾고 토론을 통해 현실에 맞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 이를 실천하고 법제화 해나가려 했다. 여기서 또 하나는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체계화하고 활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각도에 《농상집요》 등에 따라 경작할 것을 권면하다.) 호조에 전지하기를, "각도에 공문을 내어 메밀을 경작하게 하되, 《농상집요(農桑輯要)》ㆍ《사시찬요(四時纂要)》 및 본국(本國)의 경험방(經驗方)으로 시기에 따라 경작할 것을 권면시키라." 하였다.(⟪세종실록⟫5/6/1) 이미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 경험과 논리적인 방법을 종합해 만든 《농상집요(農桑輯要)》ㆍ《사시찬요(四時纂要)》가 있지만 여기에 우리나라 및 각 지역 특성에 맞는 ‘경험방’을 활용하여 경작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전의제조(典醫提調, 궁중에서 약을 짓고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우두머리) 황자후(黃子厚)가 종친 양부 이외에서는 병가에서 말을 보내어 의원을 청할 것을 아뢴 일이 있었다. “병이 나면 치료할 처방 방안으로 《집성향약방(集成鄕樂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안거락업’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업을 즐기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안거락업 : 본도 백성이 다시 들어가서 살게 하지 않는다는 교서를 받들고 이곳에 내려와 펴서 읽어 주면, 사람마다 모르던 것을 갑자기 깨달아서 안거락업(安居樂業)할 것이며, 떠돌아다니는 사람도 모두 고향 마을에 돌아오게 되어 떠돌아다니는 것이 당연히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어리석은 신의 계책입니다. (⟪세종실록⟫ 25/10/24) 함길도 도관찰사 정갑손(鄭甲孫)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지만 여기서는 ㉮모르던 것을 알게 되어 안심하고 ㉯이 땅에 돌아와 업에 기쁘게 종사하고 ㉰안거락업할 것이라는 계획이다. 목표는 모두가 안정되어 업에 종사하여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이는 비록 신하가 올리는 말이지만 당시 세종대 정치의 목표이기도 한 락생(樂生)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직(職)과 업(業)이 등장한다. ‘직’은 맡은 바 일[직무]이고 ‘업’은 일에 임하는 정신적 자세다. 생업은 살아가며 중히 여겨야 하는 일에 임하는 정신이고 천직은 일을 하늘이 준 일이라 중히 여기는 일이다. 업과 생업 : (허조에게 명하여 도도웅와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사맛[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백성이 주가 되는 ‘민위방본(民爲邦本)’의 목표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해 듣고, 간하기를 권하고, 옛 문헌을 조사하여 의제[agenda]를 구하려 했다. 과제가 정해지면 좋은 해답이 나올 때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요즘 정치에서 ‘국민은 언제나 옳다’라는 말을 듣는다. 세종은 신하들의 관점과 달리 백성 편에서 생각해 보려고 애쓴 흔적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에 ‘열민지사(悅民之事)’에 대해서 두 개의 뒷이야기가 있다. 백성이 원망하는 것과 백성을 기쁘게 할 일을 진술하라 세종 25년에 비가 오지 않자 비를 오게 하려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하와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나이 든 자에게 영직(직함만 있고 일이 없는 허직)을 제수하고 환상(還上, 고을의 사창에서 봄에 백성에게 빌려주었던 곡식을 가을에 받아들이던 일)을 면제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게 된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고려 때에는 원단제(圓壇祭)를 지냈었는데, 우리 태종(太宗)께서 참례(僭禮, 분수에 맞지 않는 지나친 예의)의 일은 다 혁파하셨다. 원단제를 혁파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