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혹한의 눈보라 속 / 펄럭이는 만장으로 슬픔을 감추고 떠난 임 세 살배기 어린 딸 / 어이 남기고 서둘러 가셨는가! 많이 배우고 잘난 여자들 일제에 빌붙어 동포를 팔아먹고 / 더러운 입 놀려 호의호식할 때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라 외치던 / 서른 해 짧은 생 마감하며 던진 화두 죽어서도 차마 놓지 못할 / 광복의 그 찬란한 꿈 고이 간직하고 떠나시라고 / 가시는 걸음걸음 흩뿌리던 하얀 눈송이 / 희고 순결하여라. 이는 여성독립운동가 박원희(朴元熙, 1898.3.10.~1928.1.5, 2000년 애족장) 지사의 불꽃 같은 삶을 노래한 필자의 시다. 남편 김사국(金思國, 1895.11.9.~1926.5.8, 2002년 애족장) 지사와 함께 부부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박원희 지사는 1925년 4월 29일, 무남독녀 딸 사건(史建)을 낳았다. 일제에 강탈된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라는 뜻에서 부부는 딸 이름을 사건(史建)이라 짓고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옥고를 겪었던 부부는 고문 후유증으로 어린 딸이 3살 되던 해에 2년 차이로 숨을 거두는 바람에 딸 사건(史建)은 고아로 성장하게 되는 가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삼형제 아들이 모두 죽어 이제 며느리들이 독신이 되었다. 큰아들은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상옥(김상옥 의사)은 객지로만 다니다가 밥 한 그릇 못해 먹이고... 왜 왔드냐? 왜 왔드냐? 거기(상해) 있으면 생이별이나 할 것을...” 이는 독립운동가 탄압의 본거지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조선총독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김상옥 의사의 어머니 김점순 지사(1861-1941, 1995년 대통령표창)의 이야기다. 1923년 1월 22일 밤 8시, 김상옥(1889-1923, 1962년 대통령장) 의사는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편 동일당이란 간판집 모퉁이에서 창문을 향해 폭탄을 힘차게 던졌다. 순간 천지를 진동하던 굉음은 그간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조선인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소리요, 피맺힌 절규와도 같았다. 김점순 지사의 금쪽같은 아들 상옥은 이렇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한목숨을 나라에 바쳤다. 막내아들 김춘원(1990, 애족장)도 그렇게 형 김상옥을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필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하여 나라 안팎을 찾아다니다가 오래전 김상옥 의사의 어머니가 김점순 지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뜻깊은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윤재환 선생의 정부포상 받게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윤재환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 2021.8.5.- 이는 8월 15일 광복절을 열흘 앞둔 8월 5일,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글 속에 들어 있는 독립운동가 윤재환(尹載煥, 1918~1938, 20세로 순국) 의사(義士)에 관한 ‘포상안내문’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 포상안내문을 받아든 팔순의 장조카 윤용택 (82)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피어보지도 못한 약관의 나이에 저승으로 떠나버린 비련의 독립운동가 백부(큰아버지) 윤재환 의사의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기 위해 뛰어온 지난 4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에는 “윤재환 의사는 1934년 3∼4월 경기 개성에서 송도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학생조직인 AM회 내지 서남회(일명 소나무회) 학생 반원으로 회원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음.”이라고 간략히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