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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백부의 독립운동 밝혀낸 장조카의 40년 집념

독립운동가 윤재환 의사, 순국 83년 만에 포상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뜻깊은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윤재환 선생의 정부포상 받게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윤재환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 2021.8.5.-

 

이는 8월 15일 광복절을 열흘 앞둔 8월 5일,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글 속에 들어 있는 독립운동가 윤재환(尹載煥, 1918~1938, 20세로 순국) 의사(義士)에 관한 ‘포상안내문’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 포상안내문을 받아든 팔순의 장조카 윤용택 (82)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피어보지도 못한 약관의 나이에 저승으로 떠나버린 비련의 독립운동가 백부(큰아버지) 윤재환 의사의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기 위해 뛰어온 지난 4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에는 “윤재환 의사는 1934년 3∼4월 경기 개성에서 송도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학생조직인 AM회 내지 서남회(일명 소나무회) 학생 반원으로 회원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음.”이라고 간략히 나와 있지만 사실 이 기록은 윤재환 의사의 목숨을 바꾼 독립운동 공적에 견주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윤재환 의사는 국내에서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밀착 미행, 불시 가택 수사 등으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1936년 8월 27일 고베(神戸)에서 ‘조선인학우회’ 서기로 활동하였고, 이후 도쿄 법정대학(法政大学)에서 수학하면서 ‘1938년 재 동경유학생 독립운동사건’에 깊숙이 관여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들어가 심한 고문을 받았고, 이로 인해 1938년 10월 16일 일본 적십자병원(현 일본적십자의료센터)에서 스무 살의 나이로 순국한 사실 등은 이번 포상에서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 대통령표창에 그쳤다.

 

비록 백부 윤재환 의사의 독립운동 공적을 100%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지난 8월 15일, 제76주년 독립유공자 포상자 247명 속에 한 분으로 선정된 사실에 깊은 감회에 젖어 있는 윤재환 의사의 장조카 윤용택 선생을 9월 7일, 그의 집무실서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대담 내용이다.

 

 

 

직계후손이 없는 윤재환 의사, 조카인 저는 남인가요?

[대담] 윤재환 의사의 장조카 윤용택 선생의 한 맺힌 40년

 

 

- 백부 윤재환 의사의 독립유공자 표창장을 받아든 소감을 말해 주십시오.

 

  “지난 8월 24일(화),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식에서 백부 윤재환 의사의 표창장(대통령 표창)을 받아들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1938년, 약관 20세 나이에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순국하신 뒤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계시다가 순국 83년 만에 국가로부터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백부의 명예를 회복하게 되어 조상님께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윤재환 의사는 어떤 분이셨나요?

 

  ”백부는 충남 서산 출신으로 조부 윤경용의 3남 5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신 분입니다. 제가 6.25당시(11살) 서산에 계신 증조부(윤영설) 댁에 놀러 가면 서당 훈장을 하시던 증조부께서는 언제나 조부 윤경용의 인품과 생활 태도 등이 남달랐다고 하시면서 슬하의 3남 5녀 중 특히 장손인 윤재환(백부)과 그 동생 윤부환(저의 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백부는 남달리 영특했고 수재성을 드러냈었는데 그런 백부께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독립운동으로 20세에 순국하셨으니 집안 어르신들의 비통한 마음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백부의 유해를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모시고 돌아와 선영에 장사 지낸 뒤 큰 슬픔을 이기지 못하던 조부와 조모는 1년 사이로 돌아가시고 가세도 기울었지요. 이후 윤재환 의사의 동생인 저의 아버지(윤부환)께서 집안의 장손이 된 것입니다.“

 

- 백부의 독립운동 공적을 알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저는 백부께서 순국하신 2년 뒤인 1940년에 태어났기에 백부에 관한 이야기는 증조부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의 어머니(유영자)로부터도 백부 이야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습니다. 당시 일본 유학중이던 백부께서 방학 때면 잠시 귀향하였는데 그때마다 일본 형사들이 백부를 미행하고 가택 수색 등을 하는 바람에 이후부터 백부는 방학 때도 귀국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자라면서 백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희 윤씨 문중의 기둥이신 백부께서 동경 유학중에 독립운동으로 체포, 구금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저는 백부님의 독립운동 사실을 규명하여 명예회복을 해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지요. 저의 반평생은 백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느라 싸운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그동안 윤재환 의사의 독립운동 사실이 규명 안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그 공적을 찾아주었다면 백부의 독립운동 규명을 위해 반평생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전문가도 아닌 후손들이 각종 증거자료를 수집한다는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지요. 그동안 백부의 독립운동 자료를 찾기 위해 백부께서 다니던 학교, 유학처인 일본 법정대학, 사망한 일본적십자병원, 대학 동문회 등을 찾아다니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료를 수집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일본 쪽 자료를 쉽게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증언해줄 분들도 제가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1980년대는 백부님 사후 40여 년이 지난 뒤였으므로 많은 분이 타계한 상태에다가 생존한 분들도 고령으로 기억을 되살려 증언을 듣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특히, 백부께서 고문으로 초주검 상태에 빠졌다는 전갈을 받고 조부께서 부랴부랴 일본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가서 보니 기골이 장대하던 백부는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고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온몸이 탈골 상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부께서 계속 간호를 할 처지도 못 돼 얼마간 곁에서 지키고 있다가 귀국길에 올랐는데 귀국하여 집에 당도하자마자 백부가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고 다시 달려가 유해를 수습해오는 상황이었으니, 어찌 그 경황에서 백부의 사망진단서 등을 챙겨올 수 있었겠습니까?

 

절망하고 있던 차에 2005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조사위원회’가 발족하여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백부의 일본에서의 활동 자료, 병원 사망 자료 등이 없을 뿐 아니라,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얻은 증언 자료 등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진실규명불능’이라는 결론을 통보해와 한동안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 이번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데 큰 도움을 준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인가요?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조사위원회’에 걸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백부의 자료를 더 찾아서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직접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일본 쪽 자료 제출 요구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그때 도움을 준 곳이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이하,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이태룡)였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일본적십자병원(현 일본적십자의료센터) 등의 자료 협조를 구하는 등 최선의 노력과 함께 제가 수집한 백부의 자료들을 검토하여 미비한 자료 보완을 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이번에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반평생에 걸친 백부의 한을 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백부님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데 힘을 실어준 독립운동사연구소의 이태룡 소장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 말씀 올립니다.

 

특히, 백부의 자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묻혀있던 인천송도고등학교의 독립운동사가 재조명되어 백부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송도고등보통학교(당시) 출신 100여 분도 함께 독립운동 공적을 발굴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인천송도고등학교가 명실상부한 항일독립운동의 본산지였음이 밝혀진 사실 또한 감개무량한 일입니다.”

 

- 윤재환 의사의 독립운동 공적을 말해 주십시오.

 

  “백부님은 1933년 신사참배 거부로 공주 영명고등보통학교(당시 13살)에서 퇴학당하여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 그 뒤 식민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1934년 2월부터 4월에 걸쳐 수차례 ‘코민테른조선레포트회의’에서 활동하다가 4월 22일 동대문 경찰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6월 12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백부님은 일본 경찰의 감시와 미행 등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8월 27일 고베에서 ‘조선학우회’ 서기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일본 도쿄의 법정대학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38년 ‘재 동경유학생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의 혹독한 고문 끝에 일본적십자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하다가 결국 10월 16일 20살의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 정부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늦었지만 백부님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준 점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유족으로서 국가기관에서 요구하는 자료 수집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유족들은 전문적인 지식도 갖추고 있지 않을뿐더러 시간과 경비 등이 많이 들어 그들이 요구하는 자료를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기골이 장대한 백부님께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잡혀가 스무 살 나이로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순국하셨는데 당시 의무기록문서가 없다고 순국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유족에게는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입원한 병원을 직접 방문했던 조부 등의 증언도 채택되지 않았고요.

 

 

 

어릴 때부터 제가 잘못을 하면 증조부님은 백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종손인 저에게 바른길을 가라고 훈계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기골이 장대함과 늠름함이 백부를 많이 닮았다면서 백부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20세로 순국의 길을 걸으신 백부님! 백부님은 저의 인생을 비춰주신 큰 등불입니다.

 

백부는 저뿐만 아니라 윤씨 집안의 장손이자 희망 그 자체였던 분입니다. 그런 백부께서 20세로 결혼도 하지 못한 채 순국하셔서 아우인 저의 아버지께서 장손이 되셨고 그 뒤를 제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국가보훈처에서는 유족으로 직계존비속만 인정하고 장조카는 유족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국가에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유관순 열사도 직계존비속 없이 조카만 있음)

 

저희 집안은 독립운동 가문입니까? 아니면 일반 가문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유족 연금 등 국가 보상을 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한 집안의 명예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집안의 장손으로 윤재환 의사의 뒤를 이어가는 사람인데 직계가 아니라고 ‘유족’ 아닌 ‘남’ 취급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윤재환 의사의 장조카인 윤용택 선생과 대담하면서 내내 안타까웠던 점은 ‘스무 살로 일본땅에서 순국한 사실을 ‘오로지 서류만으로 입증하라’는 국가기관의 ‘서류제일주의’ 의식이었다. 때는 1938년이 아니던가! 비행기로 날아다닐 수도 없던 그 시절, 아버지(조부)가 죽어가는 아들(윤재환 의사)을 면회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일본 적십자병원에 다녀왔고, 다시 건너가 죽은 아들의 유해를 안고 돌아와 고향땅 선영에 장사 지낸 사실을 그 어떤 서류로 챙겨놓았어야 했단 말인가!

 

시계를 거꾸로 돌려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일본 경찰에 고문당해 조선인 청년이 죽었다’라는 일본 의사의 진단서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을까 의심스럽다. 그런 모든 정황을 자료로 제출하지 못했기에 윤재환 의사의 장조카 윤용택 선생은 팔순의 나이까지 백부의 명예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야 했다. 늦었지만 이번 8.15 포상에 윤재환 의사의 공적이 인정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공적의 일부만 인정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큰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밝히는 일에 반평생을 바친 장조카 윤용택 선생의 눈물로 점철된 세월에 무한한 응원의 손뼉을 치며 대담을 마쳤다. 대담을 마치고 나온 밖은, 초가을 비가 눈물처럼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