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붉은 동백꽃이 담벼락에 활짝 피었다 / 곱디고운 나비도 한 마리 그 곁엔 꿀벌도 춤을 춘다 / 어느새 좁은 골목길 메운 사람들 참새처럼 재잘재잘 / 누가 먼저 꽃을 그리기 시작한 걸까? 꿈 없던 마을에 / 향기를 한 아름 선사한 무명의 화가들 / 그들은 동피랑의 천사들이어라. - 이한영 ‘동피랑 마을’ - 경남 통영에는 동화 같은 벽화로 가득한 ‘동피랑 벽화마을’이 있습니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통영시 동호동, 정량동, 태평동, 중앙동 일대의 언덕 위 마을을 일컬으며 여기서 ‘동피랑’이란 이름은 ‘동쪽 벼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벼랑 위에 들어선 집이 주는 이미지처럼 이곳의 집들은 크고 번듯한 집이라기보다는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집들과 조붓한 골목길로 이뤄진 집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대부분 도회지에서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통째로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현대식 주거지인 아파트를 짓게 마련인데 이곳 동피랑 벽화 마을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통영시가 동포루(東砲樓,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이 있던 자리)의 복원과 공원 조성 목적으로 이 일대를 철거하려고 하자 ‘푸른통영21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도화서 화원으로, 한국적이고 운치 있는 멋진 작품을 그린 화가입니다. 그런가 하면 ‘씨름’, ‘무동’, ‘빨래터’, ‘점심’ 같은 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박하고 사실적인 그림 곧 풍속화를 많이 그렸지요. 여기 '서당'이란 이름의 그림도 역시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당시 서당에서 공부할 때 일어난 재미난 풍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서 한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회초리가 훈장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동몽선습》이나 《명심보감》을 외우지 못해 방금 종아리라도 맞은 모양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으며, 훈장마저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습니다. 대부분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데 갓을 쓴 기혼자도 있습니다. 정면이 아닌 사선구도의 짜임새 있는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데 배경은 역시 아무것도 없이 비워 놓았습니다. 종이에 수묵담채 곧 먹으로 그린 위에 엷게 색을 칠한 그림입니다. 요즘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체벌과 매질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만 훈장 옆에 놓인 가느다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마 전 우리는 “경찰, 입양아 폭행 양부 구속영장…의식불명 상태”라는 충격적인 보도를 보았습니다. 지난 5월 11일은 입양문화의 정착과 국내 입양의 활성화를 위하여 만든 “입양의 날”이었지요. 여기서 수양부모(收養父母)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수양아버지와 수양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데려다 길러 준 부모를 이른다.”라고 풀이합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 남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받아들이는 수양부모 풍습이 있었으며 친부모가 있어도 자식의 수명을 길게 하려고 수양부모를 삼기도 했습니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4월 24일 기록에 보면 ‘군사의 수양부모에 대한 상례규정’을 정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조 참의 김자지(金自知)가 아뢰길 “3살 이전의 수양은 곧 자기 아들과 같이한다.’ 하였으니, 이를 보면 그 말을 따라야 마땅하나, 군관들에게는 안 될 듯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옳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는데, 이는 국방의 의무 중에 수양부모 상을 당하면 어찌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수양부모로 삼고 나면 아이의 친부모는 그 수양부모에게 선물을 하며, 수양부모도 아이에게 선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5월 27일 국립국악원은 매주 한 편, ‘국악인’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GugakIN 人’입니다. 한글은 전혀 없고, 알파벳과 한자를 섞어 이상한 글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호의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는 조항을 위반한 것입니다. 제나라 말과 글을 사랑하지 않고 외국어 쓰기는 즐기는 이러한 행태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태는 국어사전들의 잘못된 이끎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말글연구회 회장을 지낸 고 정재도 선생은 “우리 사전들에는 우리말에다가 당치도 않은 한자를 붙여 놓은 것이 많다. 우리말이 없었다는 생각에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데 우리는 한자 없이도 우리말을 쓰는 겨레다. 우리말이 한자 때문에 없어진 것이 많은데 그나마 남아있는 우리말도 한자말로 둔갑시키고 있다.”라고 말했지요. 북한 《조선말대사전》에서는 ‘부실하다’를 우리말로 다루어 “①다부지지 못하다 ②정신이나 행동이 모자라다 ③실속이 없다 ④충분하지 못하다 ⑤넉넉지 못하다 ⑥미덥지 못하다”처럼 풀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林亭秋己晩(임정추기만) 숲 속 정자엔 가을이 이미 깊이 드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詩想)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를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 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위 시는 경기도 파주 화석정에 걸린 것으로 율곡 이이가 8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입니다. 화석정은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경치가 빼어난 곳이지만 최근에 이 앞쪽으로 새로이 길이 생겨 예전의 절경은 구경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유서 깊은 곳이 선조 임금과 관련이 있는데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왜놈들을 피신하다 다다른 곳이 바로 여기 화석정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에 다다른 곳인데 앞에는 벼랑 끝 물길이요 뒤에는 왜놈 병사들이 벌떼 같이 몰려옵니다. 그때 한 신하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날마다 일찍 일어나 이부자리를 네 손으로 개어 깨끗한 곳에 두어라. 이어 비를 가지고 자리를 깨끗하게 쓸고 머리는 얼레빗으로 빗고, 빗을 빗통에 넣어 두어라. 이따금 거울을 보며 눈썹과 살쩍을 족집게로 뽑고 빗에 묻은 때를 씻어 깨끗하게 해라. 세수하고 양치하며 다시 이마와 살쩍을 빗질로 매만지고, 빗통을 정리하고 세수한 수건은 늘 제자리에 두어라.” 윗글은 안평대군, 한석봉,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4대 명필의 하나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유배지에서 딸에게 절절히 쓴 편지 일부입니다. 자신은 유배를 떠나고 아내는 목을 매 죽어 부모 없이 홀로 남은 딸에게 이광사는 사랑을 담아 편지로 가르침을 주었지요. 여기에 두 번이나 나오는 살쩍은 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을 말합니다. 그런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던 선비들도 망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살쩍을 망건 안으로 밀어 넣으려 “살쩍밀이”라는 빗을 썼지요. 살쩍밀이는 대나무나 뿔로 얇고 갸름하게 만듭니다. 깔끔한 선비들은 살쩍밀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머리를 가지런히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정한 차림을 중시하여 매일 아침 첫 일과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인 1919년 오늘(5월 26일) 양한묵 애국지사가 서대문 감옥에서 향년 56살로 순국하였습니다. 양 지사는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체포당한 뒤 심문하는 담당검사에게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당당히 밝히며 항일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양 지사는 이렇게 당당하였기에 가혹한 고문이 집중되었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옥중순국 한 분이 된 것입니다. 양 지사는 1904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보안회를 설립하고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설립된 공진회에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또 1905년에는 헌정연구회를 창립하고, 호남의 교육발달을 목표로 1908년에 창립된 호남학회에서는 임시회장과 평의원으로 선임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등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약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지요. 양 지사는 또 천도교의 원로로서 천도교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천도교대헌을 기초하였으며, 《도경(道經)》ㆍ《무체법경(武體法經)》을 비롯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선비들이 차지하는 사랑방에는 선비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구들이 있습니다. ‘사방탁자(四方卓子)’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다과(茶菓), 책, 가벼운 꽃병 등을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탁자를 말합니다. 선반이 너덧 층으로 되었으며 널빤지로 판을 짜서 가는 기둥만으로 연결하여 사방이 트이게 했지요. 사방이 터졌기 때문에 사방탁자라고 하는데 제일 아래층은 장(欌)형식으로 짜인 것도 있습니다. 골격이 가느다란 각목으로 이루어지는 이 가구는 강도에 있어서나 역학적인 면에서 짜임새가 단단해야 하므로 골조(骨組)로는 참죽나무ㆍ소나무ㆍ배나무를, 널빤지 재료로는 오동나무 ㆍ소나무를 쓰고, 앞면은 먹감나무나 느티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려줍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는 사방탁자가 시렁 위에 책, 꽃대, 꽃병, 취우(翠羽, 비취 깃으로 만든 귀한 물건), 병, 향로, 찻잔 등 문방가구를 늘어놓는 문방구를 거느리는 것이자 서실의 사치스러운 구경물이라며 이를 극찬한 바 있습니다. 간결한 구성과 쾌적한 비례로 좁은 한옥 공간을 시원하게 보이는 효과를 주고 있는데, 이러한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현대적 감각에 가장 가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위 시는 김광섭 시인의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 일부입니다. 1960년대 초반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성북동 산 일대는 막 주택 단지로 개발되던 때였기에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었는데 시는 이 시기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이 파괴되면서 거기에 깃들여 살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도 오갈 데 없이 쫓기는 새가 되고 가슴에 금이 가고 말았지요. 이 시는 삶의 터전인 자연의 품을 잃어버린 아픔을 일상어로 노래했기에 오래도록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김광섭 시인은 모교인 중동학교에서 10년 동안 교단에 섰는데, 이때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ㆍ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 암송을 강요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하는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사월이라 한여름이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 비 온 끝에 볕이나니 날씨도 좋구나 /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주 울고 / 보리 이삭 패어 나니 꾀꼬리 소리 한다 /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 바쁘구나 / 남녀노소 일이 바빠 집에 있을 틈이 없어 /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농가월령가’ 4월령에 나오는 대목으로 이즈음 정경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여덟째로 ‘소만(小滿)’입니다. 소만이라고 한 것은 이 무렵에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차기[滿] 때문이지요. 또 이때는 이른 모내기를 하며, 여러 가지 밭작물을 심습니다. 소만에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 먹고 죽순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 먹는 것도 별미지요. 이때 온 천지가 푸르름으로 뒤덮이는 대신 대나무만큼은 ‘죽추(竹秋)’라 하여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합니다. “죽추(竹秋)”란 대나무가 새롭게 생기는 죽순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느라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 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하지요. 소만 때는 겉으로 보기엔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