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명절 단오입니다. 단오는 단오절, 단옷날, 천중절(天中節), 포절(蒲節:창포의 날), 단양(端陽), 중오절(重午節, 重五節)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우리말로는 수릿날이라고 하지요. 단오의 '단(端)'자는 첫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이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합니다. 수릿날은 조선 후기에 펴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이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었다고 했으며, 또 수리란 옛말에서 으뜸, 신(神)의 뜻으로 쓰여 '신의 날', '으뜸 날'이란 뜻에서 수릿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해에 세 번 신의 옷인 빔(비음)을 입습니다. 설빔, 단오빔, 한가위빔이 바로 그것이지요. 단오빔을 ‘술의(戌衣)’라고 해석한 유만공의 《세시풍요(歲時風謠)》 할주(割註, 본문 바로 뒤에 두 줄로 잘게 단 주)에 따르면 술의란 신의(神衣), 곧 태양신을 상징한 신성한 옷입니다. 수릿날은 태양의 기운이 가장 강한 날이지요. 단옷날 쑥을 뜯어도 오시(午時)에 뜯어야 약효가 가장 좋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태양신[日神]을 가장 가까이 접하게 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매어나 볼까 에헤야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1930년 신불출(申不出, 1905~?)이 작사한 '노들강변'입니다. 문호월 작곡, 박부용 노래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 우리 음악사에 불멸의 민요곡으로 자리 잡은 노래지요. '노들강변'은 오케레코드사에서 음반으로도 제작됐는데 신불출은 원래 만담가로 더욱 유명합니다. 일제강점기에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지요. 신불출은 특유의 화술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일제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면서 툭하면 경찰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인기 높던 그의 음반은 자주 불온작품으로 걸려 판매금지를 당했습니다. 그의 만담작품 '말씀 아닌 말씀'에는 "사람이 왜 사느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가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자라는 말을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일본을 뜻하는 왜(倭) 자가 떠오르게 하는 중의법을 써 '왜놈을 없애야 한다'라는 뜻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또 자신의 이름을 불출(不出)로 바꾼 것은 '이렇게 일본 세상이 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대한 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 일체 납세를 거부하자! / 일본 물자를 배척하자! / 조선인 관리는 일체 퇴직하라! / 일본인 공장의 직공은 총파업하라! /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지 말라! / 일본인 교원에게는 배우지 말자! / 일본 상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자! /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 군대와 헌병을 철거하라! / 투옥 혁명수를 석방하라! / 보통교육은 의무교육으로! / 교육 용어는 조선어로! /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철폐하라! / 일본 이민제를 철폐하라!” 이는 1926년 6월 10일 순종(純宗, 재위 1907~1910)의 인산일(因山日, 임금ㆍ황태자ㆍ황태손과 그 비들의 장례날)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 당시 뿌려진 격문의 하나입니다.(출처 《사회과학사전》, 이석태, 1946)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하신 6.10만세운동 선열을 기리고 그분들의 독립정신을 기억하기 위한 ‘제95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을 10일(목) 저녁 6시 10분, 훈련원공원(서울 중구)에서 연다고 밝혔습니다.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일제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一區耕鑿水雲中(일구경착수운중) 물과 구름 낀 가운데에 한 뙈기 밭 갈고 우물 파니 萬事無心白髮翁(만사무심백발옹) 만사에 무심한 백발의 늙은이라네 睡起數聲山鳥語(수기수성산조어) 산새들 지저귀는 몇몇 소리에 잠깨 일어나 杖藜閑步遶花叢(장려한보요화총) 지팡이 짚고 산책하며 꽃들 구경하네 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벗 안응휴에게 지어준 한시입니다. 하지만 이는 안응휴에 대한 찬사(讚辭)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삶의 지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이 흐르고 구름 낀 가운데에서 한 뙈기의 밭을 갈고 우물을 파니 안응휴는 낮잠을 자다가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깨 일어나 지팡이 짚고 산책하며 꽃들 구경한다고 노래합니다. 이 시에 대해 허균(許筠)은 《국조시산》에서 “초탈하고 뛰어나 미칠 수가 없다.”라고 평하였고,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에서, “문장과 성리학은 그 경계(境界)에 이르면 한 몸이다. 당나라 한유(韓愈)가 문으로 도를 터득한 사람인데 성혼이 바로 그러하다.”라고 했습니다. 성혼은 “학문이란 어버이(父母)를 섬기고, 형(兄)을 따라 함으로써 당연함을 얻는 것이다. 마음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축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빗장수비'를 아실 것입니다. 이탈리아 축구 대표 팀 ‘아주리 군단’은 ‘빗장수비’로 유명하지요. 아무리 뚫으려 해도 빗장을 지른 것처럼 뚫리지 않는 수비 덕분에 붙은 별명입니다. 한옥 문에는 이 빗장이 또 다른 자물쇠 구실을 합니다. 한옥을 짓는 마지막 매듭이 빗장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 전통건축은 빗장에 공을 들였습니다. ‘빗장’은 문을 닫은 뒤 그 중간쯤에 나무나 쇠로 만들어진 긴 막대를 가로질러서 열리지 않도록 하는 막대입니다. 구멍을 파 빗장을 질러 넣어 걸리도록 덧대어 놓은 나무를 둔테(빗장걸이)라고 하지요. 빗장에는 주로 거북무늬가 많이 쓰이는데 그 까닭은 거북이 십장생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거북머리인 귀두(龜頭)는 남성의 생식기를 닮아 생명과 다산(多産), 번창의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는 빗장을 풀겠습니다. / 어둡고 험한 세상 살면서 / 가리고 잠갔던 / 마음의 빗장을 풀겠습니다.” 석정희 시인은 그의 시 <빗장을 풀고>에서 이제는 마음의 빗장을 풀겠다고 합니다. 요즘 대다수 문에서 쓰는 도어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해학과 예술성이 빗장 하나에도 곁들여 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참외라는 이름에서 ‘참’의 의미는 / 그 이치를 내 따져 알 수 있다네 / 짧은 놈은 당종(唐種)이라 부르고 / 긴 놈은 물통이라 부른다지 / 베어놓으면 금빛 씨가 흩어지고 / 깎아놓으면 살이 꿀처럼 달지 / 품격이 전부 이와 같으니 / 서쪽 오이란 말과 한가지라네” 위는 조선중기의 이응희(1579-1651)가 지은 “참외[眞瓜]”라는 시인데 어찌나 토속적이고 소박한지 한 편의 풍속화 같다는 평을 듣습니다. 이렇게 자세한 묘사한 시도 있지만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참외는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이 좋다. 작으면서도 씨가 적은데 매우 달다.”라고만 나옵니다. 또 참외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그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부터 참외를 즐겨 먹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일제강점기에 나오던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에는 알록달록한 개구리참외, 겉이 노란 꾀꼬리참외, 색깔이 검은 먹통참외, 속이 빨간 감참외, 모양이 길쭉한 술통참외, 배꼽이 쑥 나온 배꼽참외, 유난히 둥그런 수박참외 등이 소개돼 다양한 종류의 참외가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밖에 쥐똥참외라는 것도 있었는데 맛이 없어 아이들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에 돌림병이 크게 유행하여 사람이 많이 죽는지라, 임금이 한성부에 명하여 집계하여 보니 죽은 자가 4백 57인이 되고, 또 병조에 명하여 호군(護軍) 다섯 사람으로 하여금 성문을 지키면서 사람의 주검이 문을 나가는 것을 헤아려서 아뢰라고 하였다. 좌찬성 황보인(皇甫仁)이 고려 숙종(肅宗) 때의 옛일에 따라 돌림병 귀신에게 제사지내어 예방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는 《세종실록》 세종 29년(1447) 5월 1일 치 기록으로 서울에 돌림병이 돌아 심각했음을 얘기하면서 돌림병 때문에 귀신에게 제사지내기까지 했다는 기록입니다. 우리말로 돌림병(한자말로는 전염병)이라 부르는 병들은 《조선왕조실록》에만도 259건이 검색될 정도로 고통을 받았지요. 특히 지금은 별것 아닌 홍역 같은 돌림병에도 쩔쩔 매곤 했는데 홍역이 돌면 세 갈래 길에 짚을 십자 모양으로 깔아놓고 “벼슬떡”을 올려놓고, 마마신이 가기 전에 떡을 잘 먹고 가시라고 비손하는 이 행위를 했는데 이를 사람들은 “마마배송”이라 했지요. 그때에 견주면 의학이 엄청나게 발달했는데도 지난해부터 온 세상을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로 사망자도 많이 나왔을 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붉은 동백꽃이 담벼락에 활짝 피었다 / 곱디고운 나비도 한 마리 그 곁엔 꿀벌도 춤을 춘다 / 어느새 좁은 골목길 메운 사람들 참새처럼 재잘재잘 / 누가 먼저 꽃을 그리기 시작한 걸까? 꿈 없던 마을에 / 향기를 한 아름 선사한 무명의 화가들 / 그들은 동피랑의 천사들이어라. - 이한영 ‘동피랑 마을’ - 경남 통영에는 동화 같은 벽화로 가득한 ‘동피랑 벽화마을’이 있습니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통영시 동호동, 정량동, 태평동, 중앙동 일대의 언덕 위 마을을 일컬으며 여기서 ‘동피랑’이란 이름은 ‘동쪽 벼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벼랑 위에 들어선 집이 주는 이미지처럼 이곳의 집들은 크고 번듯한 집이라기보다는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집들과 조붓한 골목길로 이뤄진 집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대부분 도회지에서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통째로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현대식 주거지인 아파트를 짓게 마련인데 이곳 동피랑 벽화 마을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통영시가 동포루(東砲樓,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이 있던 자리)의 복원과 공원 조성 목적으로 이 일대를 철거하려고 하자 ‘푸른통영21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도화서 화원으로, 한국적이고 운치 있는 멋진 작품을 그린 화가입니다. 그런가 하면 ‘씨름’, ‘무동’, ‘빨래터’, ‘점심’ 같은 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박하고 사실적인 그림 곧 풍속화를 많이 그렸지요. 여기 '서당'이란 이름의 그림도 역시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당시 서당에서 공부할 때 일어난 재미난 풍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가운데서 한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회초리가 훈장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동몽선습》이나 《명심보감》을 외우지 못해 방금 종아리라도 맞은 모양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으며, 훈장마저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습니다. 대부분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데 갓을 쓴 기혼자도 있습니다. 정면이 아닌 사선구도의 짜임새 있는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데 배경은 역시 아무것도 없이 비워 놓았습니다. 종이에 수묵담채 곧 먹으로 그린 위에 엷게 색을 칠한 그림입니다. 요즘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체벌과 매질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만 훈장 옆에 놓인 가느다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마 전 우리는 “경찰, 입양아 폭행 양부 구속영장…의식불명 상태”라는 충격적인 보도를 보았습니다. 지난 5월 11일은 입양문화의 정착과 국내 입양의 활성화를 위하여 만든 “입양의 날”이었지요. 여기서 수양부모(收養父母)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수양아버지와 수양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데려다 길러 준 부모를 이른다.”라고 풀이합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 남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받아들이는 수양부모 풍습이 있었으며 친부모가 있어도 자식의 수명을 길게 하려고 수양부모를 삼기도 했습니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4월 24일 기록에 보면 ‘군사의 수양부모에 대한 상례규정’을 정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조 참의 김자지(金自知)가 아뢰길 “3살 이전의 수양은 곧 자기 아들과 같이한다.’ 하였으니, 이를 보면 그 말을 따라야 마땅하나, 군관들에게는 안 될 듯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옳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는데, 이는 국방의 의무 중에 수양부모 상을 당하면 어찌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수양부모로 삼고 나면 아이의 친부모는 그 수양부모에게 선물을 하며, 수양부모도 아이에게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