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사람이 67년이나 일기를 썼다면 엄청난 일일 것입니다. 조선시대 무관 노상추는 현존 조선시대 일기 가운데 가장 긴 67년 동안 일기를 썼고 최근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를 국역하여 《국역 노상추일기》 펴냈습니다. 《국역 노상추일기》는 18~19세기 조선의 사회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귀중한 1차 사료입니다. 노상추가 1763년(18살)부터 1829년(84살)까지 기록한 일기에는 4대에 걸친 대가족의 희로애락, 각처에서의 관직 생활, 당시 사회의 정황 등 그를 둘러싼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지요. 노상추는 자신의 일기가 후손들에게 타산지석의 교훈이 되기를 희망하며 삶의 경험과 의례 풍습 절차, 올바른 처신 등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국역 노상추일기》를 통해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정제된 자료에는 기록되지 않은 조선 사회의 실상을 더욱 실감나게 엿볼 수 있으며, 조선후기 정치의 비주류인 영남 남인 출신 무관 노상추는 당시 문관 중심의 양반 관료 사회를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특히 노상추의 일기장에는 무관을 깎아내리고, 영남 출신 남인을 차별하는 주류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비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둘째 ‘우수’입니다. 우수날에 비 오면 까끄라기 있는 곡식들, 밀과 보리는 대풍을 이룬다 했지요. 보리밭 끝 저 산너머에는 마파람(남풍:南風)이 향긋한 봄내음을 안고 달려오고 있을까요? 동네 아이들은 양지쪽에 앉아 햇볕을 쬐며, 목을 빼고 봄을 기다립니다.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계절 인사로 "꽃샘잎샘 추위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것도 있지요. 또 봄을 시샘하여 아양을 떤다는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꽃샘추위라는 토박이말보다 정감이 가지 않는 말입니다. 우수에는 이름에 걸맞게 봄비가 내리곤 합니다. 어쩌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은 봄비와 함께 꿈을 가지고 오는지도 모르지요. 그 봄비가 겨우내 얼었던 얼음장을 녹이고, 새봄을 단장하는 예술가일 것입니다. 기상청의 통계를 보면 지난 60년 동안 우수에는 봄비가 내려 싹이 튼다는 날답게 무려 47번이나 비가 왔다고 하니 이름을 잘 지은 것인지, 아니면 하늘이 일부러 이날 비를 주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오늘은 정월 초이렛날로 우리 겨레는 이날 ‘이레놀음’을 즐겼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겨레는 예부터 밥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래서 밥의 종류도 무척이나 많았지요. 먼저 밥의 이름을 보면 임금이 먹는 수라, 어른에게 올리는 진지, 하인이 먹는 입시, 제사상에 올리는 젯메 등이 있습니다. 밥에도 등급이 있다는 말인데 지금 수라ㆍ입시ㆍ젯메를 먹은 사람은 물론 없겠네요. 또 벼 껍질을 깎은 정도에 따라서도 나눌 수 있는데 현미밥부터, 조금 더 깎은 7분도밥과 가장 많은 사람이 해 먹는 백미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밥에 섞는 부재료에 따라서도 나누어집니다. 먼저 정월대보름에 해 먹는 오곡밥, 계절에 따라 나는 푸성귀(채소)나 견과류를 섞어서 짓는 밥이 있으며, 콩나물밥, 완두콩밥, 무맙, 감자밥, 밤밥, 김치밥, 심지어는 굴밥까지 있습니다. 또 계절에 따라서 밥 종류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봄에는 시루떡에 고물로 쓰는 팥을 넣어 만든 거피팥밥, 여름에는 햇보리밥, 초가을에는 강낭콩밥이나 청태콩밥, 겨울에는 붉은 팥 또는 검정콩으로 밥을 해 먹습니다. 그밖에 1800년대 말 무렵 나온 조리서에 처음 등장하는 골동반(骨董飯)이라고 하는 비빔밥도 있고, 옛날 공부하던 선비들이 밤참으로 먹으려고 제삿밥과 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그대들은 다투지 말라. 나도 잠깐 공을 말하리라. 미누비 세누비 누구로 하여 젓가락같이 고우며, 혼솔(홈질한 옷의 솔기)이 나 아니면 어찌 풀로 붙인 듯이 고우리요. 바느질 솜씨가 그다지 좋지 못하여 들락날락 바르지 못한 것도 나의 손바닥을 한번 씻으면 잘못한 흔적이 감추어져 세요(바늘)의 공이 나로 하여금 광채 나니라." 이는 바느질(침선)에 사용하는 자, 바늘, 가위, 실, 골무, 인두, 다리미를 의인화하여 인간 세상을 풍자한 한글 수필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의 인두(인화낭자) 부분입니다. 이젠 잊혔지만, 예전 어머니들이 바느질할 때 쓰던 도구 가운데 화롯불에 묻어 놓고 달구어 가며 옷감의 구김살을 눌러 펴거나 솔기를 꺾어 누르는 데 쓰던 인두가 있었습니다. 인두는 무쇠로 만들며 바닥이 반반하고 긴 손잡이가 달렸지요. 형태는 인두머리의 끝이 뾰족한 것, 모진 것, 둥근 것 따위가 있는데 특히 인두머리가 뾰족한 것은 저고리의 깃ㆍ섶코ㆍ버선코ㆍ배래ㆍ도련 등 한복의 아름답고 정교한 곡선을 만드는 데 썼습니다. 또, 마름질(재단)할 때 재단선을 표시하려고 금을 긋는 데에도 썼는데 지금은 그 역할을 초크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운서(韻書)에 이르기를 ‘동무(同舞)는 바로 마주 서서 춤을 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동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학자 조재삼(趙在三)이 쓴 백과사전 격인 책 《송남잡지(松南雜識)》에는 나오는 말입니다. 이 “동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북한에서 쓰는 말이라고 하여 언젠가부터 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두문불출 골방에 엎드려 한서나 뒤적이는 이가 다 빠진 늙은이는 내 걸음동무다." 이 글은 신경림 시인의 “산동네"라는 시 일부입니다. “걸음동무”는 같은 길을 가는 친구 곧 “동행”을 말하지요. 동무와 비슷한 말로 “벗”과 “친구”도 있습니다. “벗”은 비슷한 나이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말하며,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뜻하지요. 김인호 시인은 <어깨동무>란 시에서 “태풍이 지나간 들 / 주저앉아 버린 벼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 대여섯 포기를 함께 모아 혼자서는 일어서지 못하는 벼들이 서로를 의지해 일어서는 들판”이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네 민속품 가운데는 쌀을 이는 도구로서 조릿대를 가늘게 쪼개서 엮어 만든 ‘조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해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설날 새벽에 사서 벽에 걸어두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복조리’라 합니다. 복조리는 있던 것을 쓰지 않고 복조리 장수에게 산 것을 걸었는데 일찍 살수록 길하다고 여겼지요. 따라서 섣달그믐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 장수들이 “복조리 사려.”를 외치며 골목을 돌아다니고, 주부들은 다투어 복조리를 사는 진풍경을 이루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복조리 장수가 집집마다 다니며 복조리 1개씩을 집안에 던지고 갔다가 설날 낮에 복조리 값을 받으러 오는 지방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조리를 살 때는 복을 사는 것이라 여겨 복조리 값은 당연히 깎지도 물리지도 않았지요. 설날에 한 해 동안 쓸 만큼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놓고 하나씩 쓰면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복조리에는 실이나 성냥ㆍ엿 등을 담아두기도 했지요. 또 복조리로 쌀을 일 때는 복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꼭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었습니니다. 그런데 남정네들은 복조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남녘땅 제주에는 볼거리도 많지만 특이한 먹거리도 많습니다. 그런데 2013년 제주도에서는 자리물돔회, 갈치국, 성게국, 한치물회, 옥돔구이, 빙떡, 고기국수 등을 ‘제주도 7대 향토음식’으로 꼽았습니다. 이 가운데 메밀가루 부꾸미에 채 썰어 데쳐낸 무소를 넣고 말아서 만드는 빙떡은 제주도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한다고 하지요. 빙떡은 메밀 부꾸미의 담백한 맛과 무소의 삼삼하고 시원한 맛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냅니다. 남원읍에서는 말아 놓은 모습이 흡사 멍석과 같다 하여 ‘멍석떡’이라고 하며, 3대 봉양을 제외한 작은 제사에서 약식으로 제물을 차릴 때 꼭 쓴다고 하여 ‘홀아방떡’ 또는 ‘홀애비떡’이라고 하고 서귀포에서는 ‘전기떡’(쟁기떡)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빙떡은 만드는 방법이 복잡하지 않아 빠른 시간에 적은 돈으로 많은 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떡인데 이웃이 잔치가 있거나 상을 당하면 ‘대차롱’(뚜껑이 있는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한 바구니씩 보냈습니다. 이때 부조를 받은 집의 여주인은 떡을 손으로 떼어내어 함께 쫓아온 귀신의 몫으로 밖으로 던져 잡신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한 뒤 모두가 함께 먹는데 남은 것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고려는 일월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천문과 기상 현상을 관측한 기록을 대단히 많이 후세에 남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 475년 동안 일식과 월식이 각각 135건과 226건에 이르고, 심지어 맨눈으로 해의 흑점(黑點)을 관측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해성과 유성(별똥별)이 출현했다는 기록 또한, 많은 양에 이른다고 하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조선시대의 천문도는 여럿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 시기의 천문도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동 권씨 수곡종택(樹谷宗宅) 소장품으로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수장되고 있는 ‘혼천요의(渾天要儀)’는 여러 면에서 고려시대의 진귀한 천문도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한국 천문학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과학문화진흥원 나일성 이사장이 그의 책 《과학고서해제집》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혼천요의(渾天要儀)’는 종이에 그린 천문도로서 제법 큰 가로 82.5cm, 세로 72.5cm의 크기입니다. 다만 천문도 맨 위에 어색한 모양으로 ‘渾天要儀’라고 쓰여 있을 뿐 제작자 이름이 없고, 제작연대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일성 이사장은 혼천요의 오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이천만 겨레를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위는 3.1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도쿄 2.8독립선언서의 일부분입니다. 1910년 조선은 일제의 강압으로 “한일강제병합"을 당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9년 뒤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 청년들은 조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1919년 1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한 뒤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 정부, 일본 국회 등에 보낸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지요. 그러나 이들은 가차 없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나라 밖으로 파견된 사람을 뺀 실행위원 모두를 포함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체포되지 않은 참가자들특히 김마리아, 차경신 지사 등이 조선에 잠입하였고 이후 3.1 독립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