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간간이 들리던 연탄가스 중독사고 소식이 기온이 내려가는 겨울철에 접어들면서부터 일가족이 밤새 참변을 당하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고아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보건사회부 통계를 보면 지난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이 107명, 그중 여자와 어린아이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망자 수는 해마다 불어가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는 동아일보 1962년 12월 15일 자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는 많은 국민이 연탄을 난방과 밥 짓는 땔감으로 쓰던 때인데 연탄가스 중독 사고 기사가 많으면 한 달에 5~6차례도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기사 제목들을 보면 “세 조손(祖孫, 할아버지와 손자)이 질식사, 연탄가스에”, “가족 거의 몰사, 연탄가스 중독”, “신혼부부 사인 연탄가스 중독” 등 안타까운 소식들이 많았지요. 그러면서 신문은 연탄가스 중독사고를 예방하려면 “창문은 될수록 낮게, 통풍 잘 되고 스며들 틈 없애자”라고 귀띔합니다. 하지만 그때 도시의 서민들 집은 낡은 쪽방들이 많아 방바닥 같은 곳에 연탄가스가 새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비교적 높게 작은 창문이 나 있어서 통풍은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그렇다고 새로 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결 선생은 신라 때 남산 아랫마을에 살았던 사람이다. ‘백결’이란 이름은 가난하여 언제나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지어 부른 이름이다. 백결 선생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거문고로 마음을 달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해 섣달그믐께 이웃에서는 절구에 떡을 찧는 소리가 한창인데 백결 선생 집에서는 떡쌀이 없어 떡을 찧을 수가 없었다. 부인이 슬퍼하며 정월 초하루를 무엇으로 맞을 것인가 하고 한탄했다. 그러자 백결 선생은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부인의 슬픔을 달래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글입니다. “쿵덕 쿵덕” 수확이 끝난 뒤거나 명절을 앞둔 때 가정에서는 곡식을 빻는 공이질 소리가 구성집니다. 이때 쓰는 절구는 사람 힘으로 곡식을 찧거나, 양념을 빻을 때, 또는 메주를 찧거나 떡을 찧을 때 쓰는 것입니다. 지방에 따라 도구ㆍ도구통ㆍ절기방아ㆍ방애(제주도)라고도 합니다. 절구는 재료에 따라 나무절구ㆍ돌절구ㆍ무쇠절구가 있지요. 절구는 보통 두 사람이 맞공이질을 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절굿공이가 딸려 있습니다. 절굿공이는 대개 긴 나무를 깎아 매끄럽게 만드는데, 손잡이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의사는 조선 수탈의 앞잡이였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왜놈 직원들과 일경 등에게 총을 쏘아 죽인 뒤 일제 경찰 4~5명이 쫓아오자 발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는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 그리고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에 세 방을 쏘았습니다. 병원에 실려 간 나석주 의사는 4시간 만에 순국합니다. 앞장서서 조선의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했던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이었습니다. 상해에서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의열단에 가입한 나석주 의사는 동척회사의 침탈과 일본인 이주민들이 농토를 계속 잠식 강점하고 있으며,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항의가 계속 이어지면서 유혈 집단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동척회사와 식산은행을 폭파 파괴할 것을 결심합니다. 의사는 귀국하는 배를 타기 전 동지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되는 것 같소. 성공하던 실패를 하던 나는 결코 살아서 돌아올 사람이 아니니, 이것이 나석주의 유언이라 생각하고 매사에 매진하길 부탁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개와 비슷하지만, 몸집이 크고, 털이 뻣뻣하며, 검푸른색과 황백색의 점으로 이루어진 무늬가 있다. 눈은 고양이를 닮았고, 꼬리는 당나귀, 발은 개와 비슷하다. 물에서 나오면 제대로 걷지 못해 항상 물속에서 헤엄쳐 다니지만 잠잘 때는 물 밖으로 나와 잔다.” 이는 조선 초기 유학자 정약전(1758~1816)이 1814년 전남 흑산도 바다 생물들을 조사하고 쓴 《자산어보(玆山魚譜)》 해수편 올눌수(獸)에 나오는 ‘점박이물범’ 이야기입니다. 점박이물범은 물범과에 속하며 물범 가운데서 가장 작은 동물로, 북태평양에서는 캘리포니아 알류산 해역과 캄차카반도, 지시마, 북해도ㆍ혼슈 등지에 널리 분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백령도 근해에서 300여 마리까지 발견되고 있는데 물범은 멸종위기에 처해있을 뿐만 아니라, 포유류로서 물속에서 생활하는 진귀한 동물이므로 우리나라는 천연기념물 제33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점박이물범은 몸길이 1.4m, 몸무게 90㎏까지 자라며, 앞머리 부위가 둥글면서 높지요. 귓바퀴는 아주 작고, 주둥이는 끝이 협소하면서 가운데에 골이 있고 목은 짧습니다. 앞다리는 앞으로, 뒷다리는 뒤로 향해 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해마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라」하여 耶蘇(야소, 예수 음역어) 탄일로 지키지마는 이것이 진정한 생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고대 교회에서는 혹 정월, 4월, 5월에 탄일을 지킨 기록이 잇고 성경의 기록대로 말하면 야소가 날 때에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지키엇다 하나 12월은 「팔레스타인」의 가장 비 만흔 시절로 목자가 들에 양을 먹일 리가 업는 것이다. 동지일이 천문학상으로 중요한 날로 인정된 것을 중고 독일민족에 발견할 수 잇스니 이 동지일의 제사가 기독교에 들어와서 탄일놀이가 된 것인가 한다.” 이것은 1926년 12월 1일에 펴낸 일제강점기 월간 종합잡지 《동광》 제8호에 실린 ‘크리스마스 잡화(雜話)’란 글 일부입니다. 당시는 조선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지만, 글을 쓴 사람은 크리스마스에 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 글 뒷부분에 가면 크리스마스에 관한 또 다른 재미난 이야기도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굴둑으로 들어와 잠자는 어린애들에게 선물 주는 기특한 노인. 북극의 순록을 타고 하로 밤 사이에 전세계 각색 인종을 다 차례로 찾아간다. 아동들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전 어린아이들이 평상시 입던 한복 가운데 “사규삼(四규衫)”이 있습니다. 사규삼이란 옷자락이 네폭으로 갈라져 있는 데서 나온 이름이라 생각됩니다. 또 사규삼을 “결과복(缺骻服)”이라고도 하는데, 결과복이란 원래 중국에서는 싸움터에서 입는 옷으로 일종의 융복이라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남자아이의 예복 비슷한 구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재(李縡)가 펴낸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에 관한 책 《사례편람 四禮便覽》 관례조(冠禮條)에서는 “남색의 명주 옷감으로 빚는다. 옷깃은 여미게 되어 있고, 소매는 둥글며, 갓을 트고 뒤를 쪼개었다. 비단으로 깃과 소매끝 그리고 옷자락 양 갓과 밑 가장자리를 둘렀다. 선비들이 입는 중치막과 비슷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규삼은 원래 왕세자의 예복이었지만, 남자아이가 어른이 되는 이 예식인 관례 때도 입었는데 관례 때 이 사규삼을 입고, 행전을 치고, 태극(彩屐, 색칠한 나막신)을 신고 임하였습니다. 또한, 이 사규삼을 남자아이가 돌 때에도 입었으며, 평상복으로 입을 때에는 머리에 복건이나 갓을 썼습니다. 귀여운 우리 아이의 돌 때 사규삼을 입히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 앞, 이재명 열사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와 인력거를 타고 가는 매국노 이완용의 어깨를 칼로 찔렀습니다. 그 뒤 도망가는 이완용의 허리 등을 다시 찌릅니다. 그리고 이완용을 완전히 처단하려는 순간 이재명의 호위순사에 의해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됩니다. 재판정에서 이재명 열사는 일본의 핍박에도 자신은 나라에 바친 몸이므로 변론할 것이 없으나, 연루된 동지들은 죄가 없다는 주장을 의연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성재판소는 김정익 등 동지들에게 15년에서 5년형을 선고하고, 이재명 열사에게는 사형을 선고했지요. 그러나 열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이재명 열사는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으며, 1910년 9월 30일 사형 집행으로 24살 나이로에 순국하였습니다. 이재명 열사는 원래 미국에서 안창호 선생이 창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두째이며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동지(冬至)’입니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해’의 부활이라는 큰 뜻을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첨치(冬至添齒)’ 곧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부릅니다. 동지의 특별한 풍속을 보면 다가오는 새해를 잘 계획하라는 뜻으로 달력을 선물하는데 더위를 잘 견디라는 뜻으로 부채를 선물하는 단오 풍속과 함께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지의 또 다른 풍속에는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나 시할머니에게 버선을 지어 선물하는 “동지헌말(冬至獻襪)”이란 아름다운 풍속도 있었습니다. 이날 새 버선을 신고 길어지는 해그림자를 밟으면 수명이 길어진다고도 믿었지요. 그런데 이날 가장 보편적으로 지내는 풍속은 팥죽을 쑤어 먹는 일일 것입니다. 특히 지방에 따라서는 동지에 팥죽을 쑤어 솔가지에 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로부터 우리나라 참된 문장은 오직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이 세 편뿐” 이는 서포 김만중이 자신의 책 《서포만필》에서 송강 정철을 평한 이야기입니다. 484년 전인 1536년 오늘(12월 18일)은 송강 정철(鄭澈, 1536~1594)이 태어난 날이지요. 정철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많은 한글 가사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을 모아 엮은 책이 《송강가사》입니다. 임금(선조)에 대한 충정을 여인의 심경으로 표현한 <사미인곡>, <속미인곡>, 백성들을 계몽하고 교화하기 위해 지은 <훈민가> 등이 《송강가사》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철은 그 마음이 정직하고 그 행동은 올바르며 그의 혀는 곧 직언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미움을 줄 뿐이며, 직에 임하여서는 몸이 쇠척하도록 온 힘을 다했고, 충성과 절의는 초목이라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다 아는 바이니 참으로 이른바 군계일학이며 전상의 맹호라, 만약 그를 벌한다면 이는 마치 주운을 베는 것이나 같다.” 이는 선조 임금이 정철을 평가한 말입니다. 이렇게 침이 마르게 극찬했던 선조는 파직하라는 명을 내리고, 끝내는 귀양까지 보냅니다. 그 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강원도 원주에 가면 사적 제466호 법천사(法泉寺)터가 있습니다. 법천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된 절로 고려 중기에는 대표적인 법상종 절이었으며,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984~1070)가 열반에 든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원래 지광국사탑이 있었습니다. 현재 국보 제101호로 지정된 높이 6.1m의 이 탑은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으로 역대 가장 개성적이고 화려한 승탑으로 꼽힙니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 연꽃, 봉황 무늬 등이지요. 지광국사탑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원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출되었는데 문화재의 불법 약탈과 나라 밖으로의 반출에 대한 나라 안팎의 비난이 거세지자 조선총독부가 압력을 넣어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탑은 6.25 한국전쟁 때 폭탄 피해로 옥개석을 비롯한 상부 부재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는 큰 손상을 입었고, 1957년 시멘트 등 다양한 재료로 덕지덕지 복원했었습니다. 이에 4차례의 정밀안전진단 등을 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