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용은 여러 문화에서 발견되는데 우리에겐 친숙하거나 존경스러운 초월자로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어떤 민족에게선 혐오와 공포의 상징인 악마로서 나타나기도 하지요. 그런가 하면 거북은 상상의 동물인 용과 달리 세상에 실재하는 동물입니다. 그 거북은 장수를 상징하여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꼽히지요. 그런데 그 용과 거북을 합쳐놓은 상상의 동물은 무엇일까요?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636호 “서수모양 주전자”가 있습니다. 바로 몸통은 거북, 머리와 꼬리는 용의 모양을 한 주전자입니다. 높이 14cm, 길이 13.5㎝, 밑지름 5.5㎝인 이 주전자는 경주시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것이지요. 흡사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나오는 현무(玄武)를 연상시키고 있어 무덤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뜻을 담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무(玄武)는 북방(北方)의 신으로 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과 함께 사신(四神)의 하나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모양새를 보면 뒷머리에 지느러미가 6개 있는데, 쑥 내민 혀, 툭 튀어나온 눈은 해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등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강화도 마니산 줄기가 서쪽으로 쭉 뻗어 내리다 세 발 달린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모습을 닮아 봉우리를 이루룬 정족산(鼎足山)이 있습니다. 그 정족산에는 단군(檀君)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산성 삼랑성(三郞城)이 있고 삼랑성 내(內)에 정남향을 향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천년고찰, 바로 전등사(傳燈寺)가 있습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에 자리잡은 전등사는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등사에는 다른 절과는 다른 독특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바로 대웅보전 지붕을 떠받치는 ‘나부상(裸婦像)’ 곧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이 있지요. 부처님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자가 있을까요?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만큼이나 여러 차례 불이 났었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부상은 17세기 말에 만들어졌다고 짐작합니다. 이 나부상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지요.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던 도편수가 절 아래 사하촌 한 주막의 주모와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도편수는 돈이 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전 한 뒤안길에는 “이면도로 안전한 교통환경 조성을 위한 제한속도 하향”이란 기다란 펼침막(현수막)이 붙어있었는데 이면도로, 조성, 하향 같은 한자말로 온통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자말들 가운데 “이면도로”는 국립국어원이 펴낸 《국어대사전》 올림말에 없으며, 대신 <행정 용어 순화 편람(1993년 2월 12일)>에 “‘이면도로’ 대신 순화한 용어 ‘뒷길’만 쓰라”고 되어 있지요. 《국어대사전》에는 “이면도로”가 없는 대신 “이면(裏面)”만 올림말로 설명되어 있는데 그 뜻을 보면 “1. 뒷면, 2.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고 풀이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이면도로”는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란 어색한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이면도로”보다는 뒷쪽에 있는 길이란 뜻으로 우리말인 뒤안길 또는 속길로 하면 뜻이 명확해지고 어린아이도 알기 쉬운 말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은 '올레길'을 비롯하여 우회로를 뜻하는 '에움길' 같은 아름답고 정겨운 토박이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또한, ‘우로 굽은 길’, ‘좌로 굽은 길’ 같은 말을 도로 표지판에 새기고 있는가 하면 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백과사전 격인 책들이 나왔습니다. 먼저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芝峰類說)》이 시작이고, 영조임금의 명으로 1770년에 나온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성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따위가 그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조선 후기 때 문신이자 학자인 서유구(徐有, 1764~1845)가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의 책 900여 종을 참고로 하고 시골 마을에서 보거나 수집한 문헌 자료를 정리해서 1827년(순조 27)에 엮어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백과사전의 하나입니다. 《임원경제지》는 농업 일반을 다룬 ‘본리지’, 푸성귀(채소)를 쓴 ‘관휴지’, 꽃을 설명한 ‘예원지’, 의생활에 필요한 농잠ㆍ직조ㆍ염색을 쓴 ‘전공지’, 농사에 가장 중요한 날씨와 절후를 다룬 ‘위선지’, 요리법과 조미료, 술 담그는 법이 있는 ‘정조지’, 몸을 보신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보양법’ 따위가 있습니다. 특히 향촌에서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여러 예법은 ‘향례지’에 담아 관혼상제, 향음주례, 향사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9월 7일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는 신라 왕족의 무덤 가운데 하나인 사적 제512호 ‘경주 서봉총’ 재발굴한 성과보고서를 펴냈다고 밝혔습니다. 이 서봉총은 서기 500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서에서 특별히 눈에 띈 것은 무덤 둘레돌[護石]에 큰항아리를 이용해 무덤 주인공에게 음식을 바친 제사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된 것입니다.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역사기록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서봉총 남분의 둘레돌에서 조사된 큰항아리 안에서 동물 유체 곧 뼈, 이빨, 뿔, 조가비 등이 많이 나와 당시 제사 음식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재발굴의 독보적인 성과지요. 이번에 확인된 동물 유체 7,700점 가운데는 조개류(1,883점), 물고기류(5,700점)이 대다수지만 아주 특이하게 바다포유류인 돌고래, 파충류인 남생이와 함께 성게류가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신경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 복어도 발견되었는데 이렇게 동물 유체에서 연상되는 복어 요리, 성게, 고래 고기는 당시 신라 왕족들이 아주 호화로운 식생활을 즐겼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호라. 개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이익을 추구하고, 위협에 겁을 먹어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었으니,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국민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가운데 줄임)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이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이는 1905년 오늘(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장지연 선생이 <황성신문>에 〈오늘이여, 목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라고 쓴 논설의 일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우리 겨레는 함께 통분해 하며, 목놓아 울었습니다. 오늘은 제81주년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은 지청천, 차리석 두 분의 제안을 받아 해마다 11월 17일을 전국 동포가 함께 기념할 순국선열기념일(殉國先烈紀念日)로 정했습니다. 이때 11월 17일로 한 까닭을 임시의정원은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하게 된 이 날을 앞뒤로 많은 선각자가 망한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므로 국가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산조(散調)”는 한국 전통음악에 속하는 대표적인 기악 독주곡인데 19세기 말 김창조(金昌祖)의 가야금산조를 시작으로 거문고산조, 대금산조, 해금산조, 피리산조, 아쟁산조 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산조를 연주할 때는 장구의 반주가 필수적이며, 처음에는 느린 진양조로 시작하여 점차 중모리ㆍ자진모리ㆍ휘모리로 빨라집니다. 우조(羽調, 오음의 하나인 ‘우’ 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조로 다른 곡조보다 맑고, 씩씩함)와 계면조(界面調, 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주는 음계로 서양음악의 단조와 비슷함)가 있고, 감미로운 가락과 처절한 애원조(哀願調, 애처롭게 사정하여 간절히 바라는 )의 가락이 있지요. 산조(散調)는 말뜻 그대로 '허튼 가락', 또는 '흩은 가락'에서 유래한 것인데 산조 이전에 있었던 여러 민간 음악이 산조 속에 녹아 하나가 되었습니다. 연주장소, 연주자 등 연주조건에 따라 즉흥적인 감정표현을 중시하는 음악입니다. 산조는 전통 사회의 해체기에 생겨난 것으로 해체기의 "흐트러짐","불안함" 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개성미를 추구하여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해방감을 안겨준 곧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민중음악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신이 옛날 대마도를 정벌한 뒤, 왜선을 추격하여 전라도 연해변 섬을 돌아보니 거기는 소나무가 무성하나 뭍(육지)과 거리가 멀어서 왜구들이 매양 배를 만들기 위해 오는 것이니,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대마도에 배를 만들 만한 재목이 없으므로 반드시 전라도 섬에 와서 배를 만들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세종실록》 3년(1421) 8월 24일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왜구들이 조선 바닷가를 침범하는 가장 큰 목적은 배를 만들기 위한 소나무를 구하기 위함이지요. 이때 보고를 했던 이순몽은 “바닷가에 있는 소나무를 모조리 베어 왜선이 오는 않도록 함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지만, 세종임금은 "어찌 다 벨 것이 있겠는가?"라며 들어주지 않습니다. 대신 병선을 가지고 들어가서 소나무를 보호하면서 배를 만들도록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등 궁궐을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는데 이는 소나무가 나무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의 폭이 좁으며 강도가 높고, 게다가 잘 뒤틀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또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뎠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소나무는 나무의 속 부분이 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193호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이 있습니다.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병 1점과 잔 3점의 유리제품이지요. 병은 높이 25㎝, 배지름 9.5㎝이고, 잔① 높이 12.5㎝, 아가리 지름 10㎝ 잔② 높이 8㎝, 아가리 지름 10.5㎝ 잔③ 높이 10.5㎝, 아가리 지름 9.5㎝의 크기입니다. 병은 연녹색을 띤 얇은 유리제품으로 김둥근꼴의의 달걀 모양으로 물을 따르기 편하도록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좁게 오므렸습니다. 가느다란 목과 얇고 넓게 퍼진 나팔형 받침은 페르시아 계통의 그릇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에는 10개의 가는 파란빛 줄이 있고, 아가리에는 약간 굵은 선을 돌렸으며, 손잡이에는 굵은 파란빛 유리를 ㄱ자로 붙였습니다. 손잡이에 금실이 감겨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무덤에 넣기 전 이미 손상되어 수리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모두 심하게 깨진 상태로 발굴되었으나 다행히 원형을 알아볼 수 있게 복원되었습니다. 병과 잔①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한 모음을 이루었던 것으로 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08년 오늘(11월 11일)은 소설가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이 원각사를 세워 자신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처음 공연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이인직이 《혈(血)의 누(淚, 1906)》, 《귀(鬼)의 성(聲, 1908)》, 《치악산(雉岳山, 1908)》, 《은세계(銀世界, 1913)》 따위 신소설을 쓴 작가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특히, 《혈(血)의 누(淚)》는 첫 장편소설로서 본격적인 신소설의 효시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배웠지요. 그러나 이윤옥 시인의 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2011》에 보면 “《혈의 누》 작가 이인직이 일본 유학시절 스승인 미도리 교수에게 찾아가서 일본과 조선의 병합을 부추긴 일”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또 이인직은 한말 을사5적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리는 친일파 이완용의 비서로 을사늑약의 막후 조정자로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최근 저는 이 수상(이완용을 말함)을 만나서 빨리 거취의 각오를 결정하시도록 삼가 아뢰었습니다. 2천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만 일본 사람과 함께 나아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