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일본은 불꽃놀이 계절이다. 무더운 여름 밤 크고 작은 강가에서 쏘아 올리는 형형색색의 불꽃은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준다. 십여 년 전 요코하마의 밤하늘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도쿄의 찜통더위에 파김치가 되어가고 있을 때 요코하마에 살고 있는 친구 우키코가 나에게 보여 줄 게 있다며 불꽃놀이에 초대했다. 항구도시 요코하마는 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이면 닿는 곳으로 도쿄보다 집값이 싸고 주거환경이 좋아 도쿄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너무 늦지 않게 오라’는 우키코의 성화에 불꽃놀이 세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벌써 불꽃놀이 장소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불꽃놀이에도 명당자리가 있어서 유로석을 뺀 곳으로 불꽃을 쏘아 올렸을 때 가장 잘 보이는 곳은 아침부터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고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이나 커피숍 역시 좋은 자리를 맡으려는 사람들로 자리 쟁탈전이 보통이 아니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서너 시간씩 불꽃을 쏘아대니 좋은 자리 쟁탈전이 날만도 하다. 한국에서는 한여름의 고정행사인 일본의 불꽃놀이를 하지 않기에 나는
날은 더워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가운데 오카데라(岡寺, 나라현 타카이치시 아스카무라 오카 806)를 찾아가는 길은 고역이었다. 천여 년 전 백제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라면 도중에 목적지를 바꾸고 싶을 만큼 칠월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가시와라진구마에역에서 1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600엔짜리 1일자유권 버스를 타고 오카데라마에(岡寺前)에서 내려 한 십여 분 거리지만 경사진 언덕 위의 절까지 가기에는 숨이 차오른다. 절로 가는 길은 작은 승용차 하나 다니기도 버거울 만큼 좁았고 양쪽으로는 주택들이 들어 서 있었다. 한국에 그 흔한 마을버스는 아예 길이 좁아 엄두도 못 낼 곳에 오카데라는 자리하고 있었다. 절 입구에서 300엔의 입장료를 내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반긴다. 보아하니 저 밑의 아스카데라(飛鳥寺) 까지는 한국인들이 찾아 와도 이만치 떨어진 언덕에 자리한 오카데라(岡寺)를 찾는 한국인은 드물었을 듯싶다. 이곳은 사전에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면 발길을 옮길 수 없는 절이다. 서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서국 33 (西三十三箇所) 관음도량 성지 중 7번째 절이라고는 하나 우리 일행이 절을 찾았을 때는 사람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오카데라는 동
아스카의 넓디넓은 땅 스이코 여왕의 도요우라궁 예전엔 소가 씨의 개인 절터 자리였었지 지금은 향원사 주지 마나님 벗들이 차 마시는 곳 가까이에 있는 아스카절 종소리 사라진지 오래 금당 부처님만 고구려 혜자스님 후손 보고 살며시 미소 짓는다. '백제 없이는 아스카는 없다’고 할 정도로 일본 남부지방인 아스카-나라-오사카 지역은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연일 39도의 폭염으로 일본 열도에서 열사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하던 7월 초순 다시 찾은 나라 아스카 지역도 수은주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아스카는 한자로 ‘飛鳥’, ‘明日香’, ‘安宿’ 등으로 표기하는데 모두 일본말 소리는 아스카(asuka、あすか)로 난다. 비조(飛鳥)라는 한자를 새겨 어떤 이들은 새들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특별히 새와 관계있는 곳은 아니다. ‘明日香’이라고 쓰는 경우는 당시 수도가 아스카에 있었으므로 밝은 내일을 기약하는 고장이란 뜻 새김이 있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安宿’이라고 쓰는 경우도 싸움이 없이 평온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도 무방할 것이다. 원래 아스카는 지금의 나라현(奈良 高市郡 明日香村)과 오사카(大阪府 羽曳野)에 있었는
7월 7일은 칠석이다. 이웃나라 일본과 똑같이 칠석 전설이 있는 한국에서는 칠석날 별다른 행사를 하지 않는 데 견주어 ‘마츠리의 나라’ 일본에서는 이 날 근사한 칠석축제(다나바타마츠리)를 한다. 견우와 직녀가 한 해에 한 번 만난다는 칠석날은 원래 음력이지만 명치시대 이후 양력만을 쓰는 일본은 칠석축제를 양력으로 치른다. 고려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도쿄 한복판 증상사(죠죠지)에서는 올 7월 7일에 “동북부 대지진피해지원 칠석축제”를 연다고 일찍부터 광 고가 대단하다. 올해로 5번째인 이 칠석축제는 칠석 당일만 2,000 여장의 소원을 적은 종이(短冊, 단사쿠)가 높이 세운 대나무 가지(笹, 사사)에 주렁주렁 나붙고 하루 찾아오는 사람만 2,000명이 넘을 정도로 북적인다. 경내에는 대나무를 세우고 색종이를 준비하여 칠석축제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자기의 소원을 적어 대나무 가지에 매달 수 있게 하는데, 준비된 종이는 100엔을 받는다. 이렇게 모금된 돈은 모두 지진돕기에 쓰인다고 한다. 또한, 이날 밤은 조명을 쏘아 올리고 각자의 촛불을 준비하여 밤하늘의 반짝이는 은하수를 연출할 뿐만 아니라 유명한 가수의 콘서트도 마련되어 칠석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을 즐겁게
뭐니뭐니해도 일본의 여름은 마츠리(祭,matsuri, 축제)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교토에는 예전부터 전해 오는 유서 깊은 마츠리가 많은 데 7월 한 달 내내 하는 기온마츠리(祇園祭)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이 마츠리를 보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호텔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만한 경제적 효자 상품도 없을 것이다. 기온마츠리의 유래는 전염병이 확산 되지 않도록 신에게 기도하는 의례에서 생겨났다. 지금부터 1,100여 년 전 교토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는 사람이 속출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전염병 대책이 없던 당시에는 전염병 발생을 신 곧 우두천왕(牛頭天王, 일명 스사노미코토)의 노여움으로 알았다. 그 노여움을 풀어주려고 기온사(祇園社) (현재 야사카신사)에서 병마 퇴치를 위한 제사를 지냈는데 당시 66개의 행정구역을 상징하는 가마 66개를 만들어 역병(疫病)을 달래는 “어령회(御靈會)”를 지낸 데서부터 기온마츠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스사노미코토가 신라의 우두신이란 기록이 있다. ≪교토 속의 조선(京都の中の朝鮮)≫을 쓴 박종명 씨는 서기 656년 가라쿠니(韓國)의 대사 이리지사주(伊利之使主)가 일본에
눅눅한 장마철이 계속되면 쨍하고 볕 드는 날이 그리워진다. 빨래도 안 마르고 집안은 눅지다. 그뿐만 아니라 특히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 아이들에게 장마철은 길고 지루하다. 이때 일본에서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데루데루보우즈(てるてる坊主) 인형을 만든다. 흰 천으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 처마 밑에 매달아 두면 비가 그친다는 속설을 가진 데루데루보우즈의 유래는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랑(晴娘)” 낭자의 전설로부터 비롯된 중국의 청랑낭자 인형은 종이로 만들며 여자모양으로 빗자루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견주어 일본의 데루데루보우즈는 헝겊으로 만들고 남자 모양에 빗자루를 들고 있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데루데루보우즈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헤이안시대(에도시대라는 설도 있음)로 보고 있으며 헤이안시대에는 기우제(祈雨祭)라든가 기청제(祈請祭)를 주로 승려들이 담당했던 관계로 데루데루보우즈 인형이 박박 머리의 남자 승려 모습이 아닌가 하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히요리보우즈(日和坊主)라고도 불리는 데루데루보우즈는 머리를 위로해서 처마 밑에 달지만 거꾸로 달면 비를 내리게 한다는 뜻도 있으며 요사이는 흰 헝겊이 아니라 색색의 헝겊으로 만드는
“하얀 바탕에 자양화(紫陽花)를 수놓은 일본 옷을 입은 세쓰코는 여학생의 정복을 입고 있을 때는 느껴 보지 못한 성숙한 여성을 느끼게 했다.” 소설가 이병주의 지리산에 나오는 꽃 이름 자양화는 무슨 꽃일까? 감이 안 잡히겠지만 수국(水菊)이라 하면 얼른 알아차릴 사람이 많다. 베이지색깔에 꽃송이가 탐스러워 보이는 이 꽃은 부처 머리같이 생겨서인지 불두화(佛頭花)란 이름도 갖고 있다. 이 꽃을 일본에서는 “아지사이(あじさい)”라고 부른다. 이 말의 원뜻은 남색이 모인 것이라는 뜻의 “아즈사이(集眞藍)가 와전되어 아지사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지사이가 한자로 자양화(紫陽花)라고 불리는 것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라일락 비슷한 꽃에 붙인 이름을 헤이안시대 학자 원순(源順)이 아지사이에 갖다 붙인 것으로 중국의 자양화와 일본의 아지사이는 다르다. 한국에도 중국산 자양화로 추정되는 꽃이 영의정을 지낸 만정당(晩靜堂) 서종태(1652-1719) 시문 등에 보인다. 아지사이는 장마 무렵에 피는데 한국보다 장마가 한 달이나 빠른 일본에는 지금 아지사이 천국이다. 꽃 색깔도 연보랏빛부터 붉은빛까지 실로 다양한데다가 시내에도 가로수(화)로 흔히 볼 수 있어 일
일본인이 즐겨 먹는 음식에 오코노미야키라는 것이 있다.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부침개에 해당하는 것으로 좋아하는 재료의 뜻인 오코노미(お好み)를 밀가루 반죽에 넣어 부쳐 먹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축제인 마츠리 때 노점에서 흔히 만나는 오코노미야키의 재료를 보면 양배추를 비롯한 당근, 파, 돼지고기 저민 것 등이 쓰이며 때로는 새우나 해산물도 들어간다. 한국의 부침개 재료와 비슷하지만 우리의 재료가 훨씬 다양하며 이름도 많다. 부산의 ‘동래파전’처럼 재료 속에 파를 듬뿍 넣으면 파전, 부추가 주재료이면 부추전, 녹두로 부치면 녹두전인데다가 “돈 없으면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노랫말처럼 돈 없는 사람들이 먹는다는 뜻의 빈자떡에서 유래한 빈대떡이 있는가 하면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부침개란 말보다는 지지미(チジミ)란 말이 더 알려져 있을 정도로 이름이 많다. 오코노미야키의 유래는 일본 세계대백과사전, 평범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즈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 곧 풍신수길 등이 활약한 무사시대에 다성(茶聖) 센리큐가 차와 함께 먹는 과자인 후야키를 굽게 한데서 시작하여 에도시대의 과자 스케소야키가 진전하여 명치시대에는 몬쟈야키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관동대지진 때에는
경과자(京菓子, 쿄가시)라는 것이 있다. 천년고도 교토에서 만드는 일본과자를 그렇게 부르는데 서양과자와 구분하려고 부르는 화과자(和菓子, 와가시) 중에서도 교토에서 만드는 과자를 특별히 그렇게 부른다. 일본인들이 갖는 교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과자에도 나타나있다. 일반적으로 경과자는 5감으로 맛보는 과자로 알려졌는데 “눈으로 색이나 형태를 즐기고 혀로 감촉과 맛을 즐기며 코로는 향기를 느끼고 귀로는 과자의 이름을 듣는다.”라는 말처럼 과자 하나하나가 손으로 만드는 예술품으로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경과자의 역사가 천 년을 넘는 것은 교토가 수도였던 시절 왕성(王城)과 귀족들이 즐겨 먹은 데다가 신사와 절이 많아 제단에 바치는 일이 많았고 또 다도(茶道)의 융성도 한몫을 거들었다. 특히 교토의 맑은 물을 경과자와 관련시키는 사람도 많다. 교토 시내 시죠도오리에는 올해로 창업 208년을 맞아 7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가메야요시나가(龜屋良長)라는 경과자점이 있다. 1988년까지 가족끼리 하다가 주식회사로 만들어 종업원이 25명이나 되는 큰 과자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자를 기계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경과자의 특징은 모두 손끝에서 완성되는 철저한 도제식
국화, 오동나무, 아욱꽃, 매화, 소나무, 떡갈나무... 마치 식물원이나 정원의 꽃나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이런 모양으로 도안된 무늬를 가리켜 일본에서는 가문(家紋, kamon)이라한다. 일본은 우리처럼 족보가 없는 대신 집안을 나타내는 문양(紋樣)이 있는데 이는 가계(家系), 혈통, 문중, 지위를 나타내는 문장(紋章)으로 약 5천 종이 있다. 가문의 무늬는 식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 같은 자연물도 있고 거북이나 매와 같은 동물 모양도 있는데 가장 많은 가문은 식물이 37종, 우산, 수레, 부채모양이 27종, 까마귀, 학, 비둘기 같은 새 종류가 7종 등 다양하다. 가문의 역사는 천여 년 전인 헤이안시대 (平安時代, 794-1185)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역사상 가장 평안(平安)하고 문화가 찬란했던 시대인 이 시대의 귀족들은 가마나 입는 옷에 무늬를 그려 넣길 좋아했는데 이것이 발전 되어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85-1333)로 오면 싸움으로 날을 새는 무사시대인 만큼 가문은 커다란 깃대에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적과 아군을 구분 짓는 징표로 유행하게 된다.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죽고 난 도쿠가와 시대에는 수백 년에 걸친 지긋지긋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