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사회에서는 “처가와 변소는 멀어야 좋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사돈 사이 왕래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는 여성 특히 며느리의 나들이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특히 예전 전통사회에서는 집안일은 물론 농사까지 함께 해야 했기에 며느리들이 며칠씩 집을 비우며 친정집에 갈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한가위가 지난 뒤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중간 지점을 정하고,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서 한나절 동안 회포를 풀었던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반보기'라고 했습니다. 반보기는 다른 말로 ’중로상봉(中路相逢)‘ 또는 ’중로보기(中路-)‘라고도 했는데 중도에서 만났으므로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데서 이렇게 말한 것이지요. 요즘은 민족대이동이라 하여 명절에 국민 대다수가 고향을 찾아 일가친척을 만나고, 성묘도 하는데 이는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라는 돌림병 탓에 한가위에 온보기는커녕 영상통화로 대신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루빨리 돌림병을 청산하여 보고 싶은 사람이 맘대로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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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의 명절 가운데 가장 큰 ’한가위‘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때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한가위‘냐 ’추석‘이냐를 애타게 외칩니다. 사실 우리 겨레는 신라 이후 오랫동안 ’한가위‘‘를 써왔지만 요즘 어찌 된 일인지 ’추석‘이란 말이 대세가 되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추석(秋夕)’은 5세기 때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나온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추석월”의 뜻은 천자(天子)가 ‘가을 저녁에 달에게 제사를 드린다.’라는 뜻이었으니 우리의 명절과 맞지 않는 말입니다. 더구나 중국 사람들조차 이 '추석'이란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한가위'라는 말은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우리말로 8월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이지요.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베짜기)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신라 유리왕 9년에 나라 안 부녀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음력 7월 열엿새 날부터 8월 보름까지 길쌈을 짜게 하였다. 그리곤 짠 베로 승부를 가름하고,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리고 밤새도록 ‘강강술래’와 ‘회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기 전까지는 대형뷔페나 호텔 연회장에서는 돌잔치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돌잔치는 어김없이 돌상이 차려지고 아이가 맨 처음 잡는 물건에 부모들은 물론이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 모두의 눈이 쏠려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보통 돌잡이라고 하는 것으로 먹, 책, 실, 종이, 활, 돈 등을 놓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돌찬치는 어땠을까요? 조선시대 화원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는 “돌잔치”라는 것이 있지요. 그 그림은 <모당 홍이당 8첩 평생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이 그림에는 선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도 돌잡이를 했습니다. 대신 조선시대에는 사내아이냐 계집아이냐에 따라 돌상에 올려지는 물건이 조금 차이가 납니다. 먼저 책ㆍ붓ㆍ벼루ㆍ먹ㆍ흰실타래ㆍ대추 등은 함께 오르지만, 활과 장도는 사내아이 돌상에, 바늘 가위 인두 따위는 계집아이의 돌상에 올랐습니다. 이때 사내아이가 활과 장도를 먼저 잡으면 무관이 되리라 예측하고, 계집아이가 바늘이나 가위를 먼저 잡으면 바느질 솜씨가 좋으리라 여겼지요. 그런데 이 그림 속 돌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이 돌잔치를 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때 직접 심문을 맡았던 일군 헌병 사령관 아카시 소장에게 허위 선생은 ”일본이 한국을 없애 버릴 계획을 품었기에, 우리가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당비당거(螳臂當車)’ 곧 사마귀가 수레를 막듯,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켰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일본인 소장은 허위 선생의 인품과 식견에 감복해 그를 '국사(國士)'로까지 칭하며 존경했다."라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뒤 법정에서 허위 선생에 대해 "우리 2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 바침),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굴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허위는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허위 선생은 끝내 서대문 형무소 사형수 제1호로 기록되며 그해 10월 21일 순국했습니다. 사형이 집행될 때 일본 승려가 불경을 외우려 하자, “혹 지옥으로 떨어진대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으랴.”라면서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죽음에 임하여 “국가의 부끄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절은 당간지주(幢竿支柱)로부터 시작됩니다. 당간은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말하며, 당간 양쪽에서 60∼100㎝의 간격으로 당간을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그러나 돌 대신 쇠나 금동, 나무로도 된 것도 있습니다. 절에 큰 행사가 있으면 당간 위에 깃발을 달아 신도들이 절을 찾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세워진 절에는 당간지주가 없지요. 대신 오래된 절에 가면 으레 당간은 없고 당간지주만 있는데 이것은 당간이 쇠(철)로 만든 것이라 녹슬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당간지주는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호), 공주 갑사(甲寺) 철당간(보물 제256호), 김제 금산사(金山寺) 당간지주(보물 제28호) 등이 있습니다. 특히 안양 중초사터(中初寺址) 당간지주(보물 제4호)는 흥덕왕(826년) 2월에 완성했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간지주 양식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또 경주 보문사터 당간지주(보물 제910호)는 특이하게도 지주의 윗쪽 바깥면에 네모난 틀을 두고, 그 안에 8장의 연꽃잎을 돌려 새겨놓았습니다. 당간지주는 절의 행사를 알리기 위해서 깃발을 달아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여기 단정한 차림새의 여인이 앉아 책을 읽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읽는지 손가락으로 글자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읽는데 책 읽기에 완전히 몰입한 듯 진지합니다. 그러나 여성은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기품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독서삼매경’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조선시대 여성들은 살림하기에 바쁘다거나, 여성들이 무엇하러 책을 읽느냐는 생각에 책과 가까이 하지 않았을 거라 짐작하지만 이 여인을 보면 분명히 책을 읽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전해지는 그림에 남성이 독서하는 것은 많지만 여성이 독서하는 그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원은 이렇게 여성이 독서하는 그림을 남겨주어 조선시대 여인들도 독서 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구운몽을 쓴 서포 김만중의 어머니 윤 씨는 《시경언해(詩經諺解)》를 비롯하여 홍문관의 많은 책을 아전에게 부탁하여 빌린 뒤에 손수 베껴서 두 아들에게 주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하게 책을 읽었을까요? 심지어 윤 씨는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률(唐律)》은 손수 아들들에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 천재화가로 일컬어지는 공재 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담은 집 둘레의 표시나 일정한 공간을 둘러막으려고 흙ㆍ돌ㆍ벽돌 따위로 쌓아 올린 것입니다. 하지만, 한옥에서 담의 의미는 크지 않습니다. 뛰어넘으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도둑을 막으려는 뜻보다는 그냥 경계로서의 뜻이 더 큽니다. 그리고 한옥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요. 담의 종류로는 먼저 짚을 썰어 넣고 석회를 적당히 섞은 흙으로 다져서 굳힌 토담(흙담)이 있습니다. 또 자연에서 얻은 돌로 쌓아 올린 돌담(돌각담)이 있으며, 그 밖에 나뭇가지나 수수깡으로 둘러치는 경계인 울타리, 나무를 돌려 심어서 저절로 울타리가 되게 한 생울타리도 있지요. 그리고 특별한 담으로 경복궁 자경전에 있는 화초담이란 것도 있습니다. 화초담은 여러 가지 빛깔로 글자나 무늬를 넣고 쌓는 담을 말하는데 꽃담ㆍ꽃무늬담ㆍ조장(彫牆)이라고도 부릅니다. 외로운 세월을 사는 대비의 장수를 비손하는 뜻이 담겨 있지요. 또 한 가지 담은 아니지만 김장밭 둘레에 개나 닭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야트막하게 만들어 두르는 울인 “개바자”도 있습니다. 특히 돌 많은 제주도는 집도 밭 둘레도 온통 돌담뿐입니다. 그런데 현무암으로 쌓은 제주도 돌담은 돌과 돌 사이에 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서서히 음의 기운이 커진다는 24절기 열여섯째 추분(秋分)입니다. 《철종실록》 10년(1859) 9월 6일 기록에 보면 “추분 뒤 자정(子正) 3각(三刻)에 파루(罷漏,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위하여 종각의 종을 서른세 번 치던 일)하게 되면, 이르지도 늦지도 않아서 딱 중간에 해당하여 중도(中道)에 맞게 될 것 같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여기서 중도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바른길’을 말하고 있음입니다. 이처럼 우리 겨레는 추분날 종 치는 일조차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 추분 무렵이 되면 들판의 익어가는 수수와 조, 벼들은 뜨거운 햇볕, 천둥과 큰비의 나날을 견뎌 저마다 겸손의 고개를 숙입니다. 내공을 쌓은 사람이 머리가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는 것과 벼가 수많은 비바람의 세월을 견뎌 머리가 수그러드는 것은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벼에서는 향[香]이 우러나고 사람에게서도 내공의 향기가 피어오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추분을 맞은 국립백두대간 수목원에는 벌써 알록달록 가을빛이 내려앉았다는 소식입니다. 이에 수목원은 오는 11월 1일까지 가을꽃 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최근 뉴스를 보면 “밤길 주택가, 환한 LED 등 달아 안심”이라는 기사가 보입니다. 밤에도 시골이라면 몰라도 도시는 가로등 불빛에 더해, 상가와 자동차 불빛까지 그저 환할 뿐입니다. 그런데 가로등도 없고, 플래시도 없고, 자동차의 불빛도 없던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어떻게 다녔을까요? “차려 온 저녁상으로 배를 불린 뒤에 조족등을 든 청지기를 앞세우고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위 예문은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조족등”이라는 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밤길을 밝히는 도구였지요. 지난 5월 19일 경기도는 조족등(照足燈)을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족등은 밤거리에 다닐 때 들고 다니던 등으로 댓가지로 비바람에 꺼지지 않게 둥근 틀을 만들고 그 안에 촛불을 켜는 등입니다. 특히 조족등은 순라군이 야경을 돌 때 주로 썼다고 합니다. 조족등을 이름 그대로 풀어 보면 비출 조(照), 발 족(足), 등잔 등(燈) 자를 써서 발을 비추는 등이라는 뜻이 되지요. 아무리 먼 길이라도 발밑을 보아야만 갈 수 있으므로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과 뜻이 통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