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금전으로는 그 값어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무가지보, 국보 제180호 <김정희 필 세한도(歲寒圖)>가 지난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 품에 안겼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세한도’는 조선 후기 올곧은 선비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문인화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스승 추사를 위해 그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은 새롭게 들어온 중국의 문물 자료를 모아 스승에게 보내주는데, 이를 고맙게 여긴 추사가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려 선물한 것이 바로 ‘세한도’입니다. 그런데 이 세한도는 해방 직전인 1944년 일본인 수집가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서예가 손재형은 연일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쿄의 후지즈카 집에 100일 동안 날마다 찾아가 문안인사를 하며, 세한도를 내달라며 간곡히 청을 했지요. 그에 감복한 후지즈카는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라며 돈 한 푼도 받지 않고 내주었다는 아름다운 일화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손재형이 세한도를 받아 낸 3달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려 참으로 다행스러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전 어느 집이나 다듬잇돌과 다듬이방망이가 있었습니다. 하얀 홑청이 적당히 마르면 얌전히 접어서 다듬잇돌 위에 얹고 두드립니다. 고된 시집살이를 하던 아낙들은 어쩌면 마음을 몰라주는 낭군이 미워서 두드렸을지도 모르지요. 다듬질할 때는 혼자 또는 다듬이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양쪽에 앉아서 하는데 둘이서 할 때는 주로 모녀(母女)나 고부(姑婦) 또는 동서(同壻)끼리 방망이가 부딪치지 않도록 서로 호흡을 잘 맞춰서 했지요. 다듬잇돌은 옷감ㆍ이불감 등의 천을 다듬을 때 밑에 받치는 살림도구로 화강암ㆍ납석ㆍ대리석 따위로 만들며, 박달나무ㆍ느티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도 만듭니다. 두꺼운 직사각형 모양으로, 크기는 보통 길이 60cm, 높이 20cm, 너비 30cm가량입니다. 윗면은 반들반들하게 하고 밑면보다는 약간 넓습니다. 밑면의 양쪽에는 손을 넣어서 들어 옮길 수 있도록 홈을 팠습니다. 다듬이 도구에는 다듬잇돌과 방망이가 한 틀이 되며, 방망이는 두 개가 한 틀입니다. 명절이나 혼사(婚事)가 가까워질 때, 그리고 겨울옷을 마련할 때면 집집이 다듬이질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 방망이질 소리는 밤중까지 소리가 들려도 이웃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만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는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사형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65살의 나이인 1919년 9월 2일 저녁 5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져 3ㆍ1만세 운동의 열기를 되살렸지만 이 일로 끝내 순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강 의사는 1885년 함경남도 홍원(덕천)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강탈당하자 식구들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한인촌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뒤 3ㆍ1만세 운동 직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그때 신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러시아로부터 영국제 폭탄을 구입하여, 1919년 6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8월 4일 서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의 시인 노천명은 109년 전 오늘(9월 1일) 태어났습니다. 그 노천명은 두산백과에 ‘한국의 시인’이라고 요약되어 있지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ㆍ13ㆍ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노천명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권유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출정하는 동생에게>, <병정> 등을 발표하고,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婦人隊) 간사를 맡을 정도로 친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천명에게는 웃지 못할 일화가 따라 다닙니다. 그것은 광복 직전인 1945년 2월 25일 펴낸 시집 《창변(窓邊)》에 관한 이야기지요. 노천명은 《창변》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이 시집 끝에는 9편의 친일시가 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복되자 그것이 마음에 걸린 노천명은 이 시집에서 뒷부분의 친일 시 부분만을 뜯어내고 차례는 친일시 제목을 창호지로 가린 채 그대로 팔았습니다. 전쟁 말기 상황에서 미처 배포하지 못하고 쌓아 놓고 있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을 연주할 때에만 쓰는 독특한 악기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종묘제례악의 시작을 알리는 “축(祝)”과 끝낼 때 쓰는 악기 “어(敔)”도 있는데 그 모습이 참 재미납니다. 여기서 ‘축’과 ‘어’는 짝이 되는 악기로 국악기들은 앉아서 연주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어와 축은 ‘방대’라는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서서 연주합니다. 축은 네모진 나무 상자 위판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나무 방망이를 세워 상자 밑바닥을 내려쳐서 소리를 내지요. 축은 양의 상징으로 동쪽에 자리 잡고, 겉면은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으로 칠하며 사면에는 산수화를 그립니다. 축을 치는 수직적인 동작은 땅과 하늘을 열어 음악을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 반면에 ‘어’는 엎드린 호랑이의 모습으로 1m 정도의 나무를 깎아 만든 악기지요. 호랑이의 등에는 등줄기를 따라 꼬리 부분까지 27개 톱니를 길게 박아 놓았습니다. 둥근 대나무 끝을 아홉 가닥으로 쪼갠 채(籈竹-견죽)로 호랑이의 머리를 세 번 치고는 꼬리 쪽으로 한번 훑어 내립니다. 이러기를 세 번 한 다음 박을 세 번 울려 음악을 끝내는 것이지요. 어는 서쪽을 상징하기 때문에 대개 흰 칠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도 제주시 외도동에는 옛 풍류객들이 시를 읊으며 달빛의 정취를 즐겼던 “월대(月臺)“가 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철 냇물이 흘러 고려와 조선 시대 관아에서 조공을 실어 날랐다 하여 조공천(朝貢川)이라 불렸던 도근내 하류에 있지요. 밤하늘에 달이 뜨면 모든 물에는 달이 또 하나 뜹니다. 그러면 물빛은 달빛이 되고 옛 시인들은 그런 물속의 달빛만을 그저 감상만 할 수 없어 물가의 돌 위에도 새겨 놓습니다. 그런데 이 월대 곁에는 유달리 눈에 띄는 빗돌이 하나 있지요. 앞쪽에 큼지막하게 달 모양을 상형하여 새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대(臺) 자를 새겨둡니다. 월대를 알리는 빗돌 하나도 그저 월대가 아니라 그것에 달빛을 새겨 넣으려 함입니다. 월대 뒤쪽에 “乙丑 三月 日, 洪鍾時 書(을축 삼월 일, 홍종시 서)”라고 새겨져 있어 을축년 곧 1925년 당시 제주읍장이었던 홍종시(洪鍾時, 1857~1936)란 인물이 새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월대는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 있는 제주도 기념물 제7호 “명월대(明月臺)”의 또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다만,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앞에 있는 섬돌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오늘은 태풍 바비의 영향으로 온 나라가 초비상이었습니다. “바비가 몰고 온 싹쓸바람 전국 초비상”, “싹쓸바람 몰고 '바비' 북상, 내일 영향권”, “초속 45m '싹쓸바람' 이끌고 오는 태풍 바비” 등의 뉴스가 눈에 띄었지요. 여기서 ‘싹쓸바람’이란 지상 10m 높이의 풍속이 초속 32.7m 이상으로 육지의 모든 것을 쓸어갈 만큼 피해가 아주 격심한 것을 이릅니다. 그런데 이 바람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바람의 세기(보퍼트 13 등급)가 있습니다. 기상청은 이 등급에 맞춰 우리말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연기가 똑바로 올라가 바람이 거의 없는 상태(풍속 초당 0~0.2m)는 '고요', 풍향계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연기가 날리는 모양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실바람(0.3~1.5m)'부터 시작하여 ’남실바람‘, ‘들바람’, ‘건들바람’, ‘된바람’, ‘센바람’, ‘큰바람’, ‘큰센바람’, ‘노대바람’, ‘왕바람’이 있는데 이 바람들은 ‘싹쓸바람’보다는 약한 것들이지요. 바람의 세기와 달리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구분한 우리말 이름도 있습니다. 먼저 동풍은 ‘샛바람’, 서풍은 ‘하늬바람’ 또는 ‘가수알바람’, 남풍은 ‘맞바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인생 가운데 잠자는 시간이 무려 1/3이나 차지한다고 하여 잠은 사람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과입니다. 따라서 잠잘 때 필요한 베개는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우리 겨레가 전통적으로 쓰던 베개는 속에 왕겨ㆍ메밀껍질 등을 넣고 속싸개로 봉한 다음, 흰색 무명으로 홑청을 만들어 겉을 싼 것이지요. 베개의 양쪽 끝은 둥글게 하든가 각진 모양으로 베개의 형태를 잡아주거나 베개를 장식하는 용도인 베갯모가 있습니다. 베개는 재질이나 무늬에 따라 그 베개의 이름이 결정되었지요. 우선 재질에 따라 자수를 놓은 수침(繡枕), 자개를 박은 나전침(螺鈿枕), 쇠뿔로 꾸민 화각침(華角枕), 상아로 만든 상아침(象牙枕), 도자기로 만든 도침(陶枕) 등이 있습니다. 특히 베갯모에 수를 놓은 자수베개는 왕실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였으며 조선시대 여성이 시집갈 때 준비하는 대표적인 혼수품이었지요. 베갯모에 놓는 자수 무늬는 대부분 자손 번창과 부귀 장수를 뜻하는 것으로, 부귀를 뜻하는 모란 무늬, 복을 나타내는 박쥐,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호랑이, 다복한 가정을 꿈꾸는 봉황 한 쌍과 새끼 봉황 일곱 마리의 구봉문(九鳳文),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여자 한복 가운데 ‘고쟁이’라는 속옷은 남자바지와 비슷하지만, 밑이 터져있고, 가랑이 통이 넓습니다. 이 고쟁이 종류 가운데는 ‘살창고쟁이’라는 것이 있는데 경북지역에서 많이 입던 여름용 고쟁이입니다. 살창고쟁이는 허리둘레를 따라 약 6㎝ 폭에 15~20㎝ 길이의 직사각형 구멍을 10개 이상 낸 다음 구멍의 테두리를 감침질로 정리하고 허리말기(치마나 바지의 허리에 둘러서 댄 부분)를 단 속바지지요. 살창고쟁이는 그 독특한 모양 때문에 다른 이름들도 있습니다. 살창처럼 생겼다고 ‘살창고쟁이’지만, 문어 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문어고장주’, 가위로 잘라냈다는 뜻으로 사투리 가새로 된 '가새고장주‘라고도 합니다. 새색시가 시집갈 때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여러 벌의 옷을 겹쳐 입어서 몹시 더웠는데 조금이라도 시원하라고 친정어머니가 만들어 입혀 보낸 것입니다. 또 시집살이도 그 옷처럼 시원하게 살라는 바람이 있었으며, 시집가는 딸의 행복을 비는 친정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또 살창고쟁이의 뚫린 구멍으로 신부의 흉이 새어나가 시집살이가 수월하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담겨있다고 합니다. 이 살창고쟁이는 1930년대까지 입다가 이후부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114호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청자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참외모양의 꽃병으로, 높이 25.6㎝, 아가리지름 9.1㎝, 밑지름 9.4㎝의 크기입니다. 긴 목 위의 아가리가 나팔처럼 벌어진 것이 참외꽃 모양이고, 목의 가운데에는 2줄의 가로줄이 백토(白土)로 상감되어 있습니다. 몸통은 참외 모양으로 여덟 부분으로 나뉘어 골이 지어있습니다. 목의 바로 아래에는 8개의 꽃봉오리 띠가 백상감되어 있고, 몸통의 가운데에는 여덟 개의 면에 모란무늬와 국화무늬를 번갈아 가며 1개씩 장식하였으며 몸통의 아랫쪽은 연꽃이 흑백상감 되어 있습니다. 아래부분에는 주름치마 모양의 굽이 붙어있지요. 유약은 그다지 고르지 않고 빛깔도 조금 어두운 편이지만, 전체적인 비례나 균형에 있어 안정된 모습이며, 어색한 점들이 도리어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평가입니다. 이와 같은 병 종류는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가마터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모양이 비슷한 것으로는 국보 제94호인 청자 참외모양 병이 있습니다. 이런 모양의 병은 중국 송대 자주요ㆍ경덕진요ㆍ요주요 등에서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