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제군이여! 제군의 행하는 바는 인도(人道)니라 고독하나마 넘어질까 염려 말고 뛰어라 제군의 뛰는 곳에는 이천만 민족의 후원이 있다 제군이 표방하는 바는 정의니라 처량하나마 부르짖어라 반드시 16억 인류의 화답이 있으리라 -학우회주최순회강연변사제군 중에서 1920.7.17- ▲ 독립투사 이준태 어록 *이준태(1892~?) 선생은 누구인가? 본적은 경상북도 안동(安東). 이명은 권혁(權赫) 또는 권철(權哲). 호는 일봉(一峰).1919년 8월(음력) 고향 사람인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북 교통부장 안상길(安相吉), 『만주일보』 신문기자 김재봉(金在鳳)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운동에 가담하였다.1922년 1월 김한(金翰), 신백우(申伯雨) 등과 서울에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무산자동지회 발기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3월 무산자동지회와 신인동맹회가 합동하여 만든 무산자동맹회의 상무위원이 되었고, 기관지 『무산자(無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본 교토에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전북 남원 일대에서 무고한 백성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을 현재 일본인들은 귀무덤이라 부른다.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이라는 말이 잔인해서 귀무덤이라 부르자 했다는데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덤 이름부터 왜곡되어 있는 잔인한 역사의 현장! 더 부끄러운 것은 한국인들도 일본인들이 부르는 이름 그대로 여전히 ‘귀무덤’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다. 그러한 현실은 경남 사천에 가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곳에는 교토 코무덤의 흙 한 줌을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를 달랑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사람들의 코를 잘라다 묻은 코무덤이건만 역사는 왜곡 상태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않고 있다. 9월 26일은 남원 만인의총(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항전하다 순절한 민.관.군 만인의사를 합장한 무덤)에서 호국정신의 위업을 기리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향을 올리는 날이다. 이날을 맞아 교토 코무덤의 진실을 파헤친다. -편집자주- 돌 치워라 돌 치워라 봉분 위 돌 치워라 먼 고향 남원땅 엄니 곁에 나 가리라 왜놈 칼 맞고 코 잘려
[그린경제 = 이나미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 구한말 국권을 잃자 왜군에 항쟁하며, 의병의 후원자로 식량과 가축(소)을 지원하고 호군활동을 하였다. 왜군이 감나무에 결박 고문과 폭행 장독으로 현장에서 절명하신 증조부 정환종. * 아들을 살리기 위해 숨겨주고 의병의 군량지원과 호군활동을 하다 발각되어 역적으로 몰려 고문 폭행의 장독으로 돌아가신 증조모 선갈음. * 국권쟁취의 의를 행함이 사람의 도리다. 라며 변성명하고 항쟁하여 투옥 되어서도 탈옥하는 담대함과 용맹한 의병장인 조부 정태화. * 의병장 남편 덕분에 모
[그린경제=육철희 신시민운동연합 의장] 효창(공)원의 독립선열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하자는 법률개정안이 민주당 김광진 의원의 발의로 30일 국회에 제출되었다. 현재 국립묘지는 국립서울현충원을 비롯한 8곳이 지정되어있지만 독립운동선열 8기(빈뫼 1기 포함) 9분(김구 선생 무덤에 부인 최준례 합장)이 잠들어 계신 효창원은 국립묘지로 지정되어있지 않다. 사적인 효창원에 계신 독립운동선열은 이동녕 임시정부 주석, 조성환 임시정부 군무부장, 차리석 임시정부 비서장, 김구 선생과 그 부인 최준례 여사, 안중근 의사 빈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등 모두 9분이다. ▲ 백범 선생과 부인 최준례 여사 합장묘 ▲ 효창원 안의 안중근(빈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4의가 묘역 현재 효창원은 김광진 의원이 지적했듯이 문화재보호법의 적용을 받는 '사적공원', 그리고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 '근린공원'으로 지정돼있는 탓에 국가적 차원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고 관리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김광진 의원은 개정안의 발의 취지를 효창원을 국립묘소로 지정하는 것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애국선열들을 국가가 예를 다하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보통 “스카이라이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케세이선(京成線)은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갈 때 많이 이용하는 열차로 종점은 우에노(上野)역이다. 시내 순환선 JR 우에노역에서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서면 바로 정면에 나리타행 케세이선을 알리는 큼지막한 파란 간판이 보인다. 이 간판을 왼쪽에 두고 십여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우에노공원에 이른다. 1월 21일 목요일 우에노공원을 찾아간 날은 초봄처럼 화창한 날씨였다. 시각은 채 10시가 되기 전인데도 산책하는 사람,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기 엄마의 모습이 눈에 띈다. ▲ 도쿄 우에노공원 안에 안내판도 없이 외롭게 서 있는 왕인박사기념비 비 앞에는 매화나무를 기린다는 일본시인의 시구를 적은 팻말이 어울리지 않게 서 있다. 우에노온시공원(上野恩賜公園)이라 불리는 이곳은 1874년 명치 정부 때 세운 일본 최초의 공원이다. 온시공원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궁내청 소속의 땅을 도쿄시에 하사(恩賜, 온시는일본 발음)한데서 유래한다. 공원 내에는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유명한 동물원, 미술관은 물론이고 교토 청수사를 본떠 만들었다는 청수관음당과 몇 개의 신사, 명치유신의 지도자 사이고다카
[그린경제=진용옥 교수] 이종무 장군의 세계(世系) 장수 이씨는 이알평(李謁平)의 52세손이며, 고려 충선왕 때 정승으로 장천 부원군에 봉해진 이임간(李林幹)을 시조로 하고 있다. 책록된 후손들은 장천의 훗날 지명인 장수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4대 이을진(李乙珍)이 공민왕 때 정승을 지냈고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에 책봉되었다. 이을진의 아들이 이종무이다. 이종무는 아들 넷과 딸 다섯을 두었는데, 아들은 승평, 덕평, 사평, 후평이다. 딸 1명은 정종대왕의 열째아들 덕천군(德川君) 후생(厚生)의 부인이 되었다. 이종무가 죽은 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에 안장되면서 이종무의 시호 양후(襄厚)에서 이름을 따서 양후공 파조가 되었다. 후손들은 본래 황해도 사리원 부근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기동에 있는 묘에는 제향을 위해 묘역을 찾는 정도였고 묘역의 관리는 전적으로 묘지기에게 맡겨 두었기 때문에 한 때 장군의 묘소가 잃었다가 문중의 기록을 근거로 가까스로 다시 찾았다 한다.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대마도 정벌 영웅 이종무 장군의 무덤, 풀이 우거져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
[그린경제 = 정석현 기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오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안동독립운동가 어록전이 열린다 일제강점기 치열하게 펼쳤던 안동독립운동가들은 과연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 이제라도 안동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절절한 외침을 들어보자.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이미 바른 길을 찾아 오다가 중도변절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행할 수 없다 -김원식이 아들 김성로에세 보낸 편지 중에서- ▲ 김원식 선생 어록 ▲ 안동독립운동가 어록 전시장 *김원식 (1888~?) 선생은 누구인가?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9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였다. 1921년 서로군정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의 지시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전국 유지들과 연락,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1922년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보합단(普合團)광한단(光韓團) 등 각 군단 대표들이 모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하는데 협력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동북면군사연락위원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상주하면서 60여 명의 학생들을 난징(南京) 등지로 유학시켰다.1924년 이후 정의부(
[그린경제=진용옥 교수] 이종무의 생애 ▲ 이종무 장군 이종무(李從茂, 1360 ~ 1425) 장군은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장천 부원군 이을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1397년 조선 태조 6년 왜구가 침입하자 끝까지 싸워 이를 격퇴하였다.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었고, 만호(萬戶)의 벼슬에 있을 때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 왕자의 란 때에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 덕분에 익대 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으며(장천군으로 개봉),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1419년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하는 공을 세운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로 출발하여, 이듬해 1424년 2월 25일 부사 이종선과 함께 돌아왔다. 그 뒤 안주도병마사(安州都兵馬使), 안주절제사(安州節制使)를 거쳐 (左參贊) 등을 역임한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다시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14
[그린경제 = 이윤옥 기자]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원치도 않어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떠ㅅ다 비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ㅅ벌에 해가 저물어...저물어... ▲ 정지용 시인 정지용도 그날 우리가 걸었던 가모가와(鴨川) 강변에 있었을까? 그곳에서 쓰라린 조국을 보았고 그리운 고국의 보금자리를 그리워했을까? 어쩜 고향집 처마 밑 제비조차도 그리워했을 시인이다. 가모가와 십리 벌에 긴 해가 드리울 무렵 남의 나라 그것도 고국을 강탈한 일본 땅에 홀로 남은 조선 청년은 얼마나 서러웠을까? 오죽하면 오렌지 껍질 씹는 나그네의 시름일까? 동지사(同志社,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교정 윤동주 시비 옆에는 향수라는 시로 우리에게 친근한 시인 정지용의 시비도 있다. 정지용 시비는 윤동주보다 10년 늦은 2005년 12월 18일에 세워졌다. 월북작가라 해서 한동안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정지용은 그의 시 향수를 노래한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 있던 곳,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한산도에 있는 제승당(制勝堂)에 가면 더욱더 충무공의 그때 그 심정이 간절하게 느껴진다. 1593년 8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아 한산도에 통제영 본영을 설치했을 때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막료 장수들과 작전 회의를 하는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폐허가 된 이곳에 제 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1740년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면서 운주당 옛터에 다시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 이름했는데, 지금 걸려 있는 제승당(制勝堂) 현판은 제 107대 통제사 조경이 쓴 글씨이다. 충무공은 이곳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 삼아 당포승첩(唐浦勝捷)후 왜적과 세 번째로 접전하여 적군을 섬멸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사기와 전의(戰意)에 큰 타격을 준 곳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당시의 상황을 연상케 하는 땅이름이 여러 개 전해지고 있다. ▲ 굽이길을 걸어 제승당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