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백일규 [1880-1962]선생은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부친 백린과 모친 송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어려서 한학을 배운 선생은 동학에 깊이 공감하고 접주로 활동하였으나 한계에 부딪치자 미주 유학을 결심 1905년 6월 9일 진남포를 출발하여 일본 고베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에와사탕수수 농장의 고딘 노동 중에도 선생은 에와친목회에 가입하여 윤병구 강영소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고 이후 미주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문양목의 후임으로 대동보국회 중앙회장겸 대동공보의 주필에 선임되어 일본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는데 앞장섰다. ▲ 미주 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백일규 선생 1908년 미주 한인사회의 반일여론은 같은 해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저격사건으로 극대화되었다.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선전하는 대한제국 외교고문에 대한 응징이자 일제에 대한 경고였다.의거 직후 선생은 7인 전권위원회를 구성하여 양 의사의 재판을 후원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함은 물론 의거의 정당성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고 무단통치가 자
[그린경제/ 얼레빗 = 이나미 기자] 나라 위해 목숨 던지니, 동포들이여 꺾이지 말라이중언(1850-1910) 선생은 1850년 안동 예안의 하계마을에서 퇴계 12대 손으로 태어났다. 1879년 5월 대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되었다가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의 이권 침탈을 목도하고 낙향했다. 일제가 1895년 10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가 이에 항거하여 안동 예안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은거 중이던 선생은 선성의진의 이중린 대장 휘하 전방장으로 의병의 선봉에 섰다. 선성의진은 영주, 순흥의진과 연합하여 7천명 규모로 상주 태봉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였다. 선생은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으나 일본군에게 밀려 끝내 해산되었다. 의진 해산 후 신암폭포 아래 은거하던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 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완용 등 을사늑약 체결에 가담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이때 만60세를 맞은 선생은 을사년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오로지 한 올의 명주실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익상 선생은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났다. 목재 장사를 하던 부친이 일본인에게 속아서 재산을 잃고,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재학 중이던 삼호보성소학교를 그만두고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했다. 1919년 광성연초회사로 직장을 옮긴 후 1921년에 중국 봉천 지점의 기계 감독으로 발령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비행사의 꿈을 품고 있던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간 이후 비행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고 광동으로 갔다. 그러나 당시 광동의 호법 정부는 북벌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를 운영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꿈을 접게 된 선생은 북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북경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만남은 선생이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의열단원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및 친일파 거두와 밀정 등을 7가살(七可殺)로 규정하고 일제식민통치기관을 파괴대상으로 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의열단 가입 후 선생은 김원봉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1895년 경북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난 이광민선생은 백부인 이상룡이 세운 협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애국사상을 함양하였다. 1911년 백부 이상룡이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자 함께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였고 1916년 부민단 본부가 있는 통화현 삼도구 동화학교의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간도 지역에서는 한족회를 설립하여 민족운동 단체를 규합하였다. 한족회는 이후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고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 세력임을 천명하였으며 선생은 서로군정서의 최고지도자인 이상룡 선생을 최측근에서 보좌하여 청산리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두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청산리에서 크게 패한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참변을 단행하여 서간도 독립군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후 서간도 독립운동계는 보다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독립군 세력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고 1922년에 서간도, 남만주 독립군의 통합세력인 대한통의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성립 후 일 년이 되지 않아 이념상의 문제로 분열되었고, 1924년 중반 이후 또 다시 남만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통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염온동 [1898-1946] 선생은 강원도 금화군 읍내리에서 부친 염문우와 모친 손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학으로 학문적 소양을 다진 선생은 1910년 금화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보성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금화지역 31운동에 참여하여 3년의 옥고를 치른 후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1921년 4월 28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독립운동단체 및 소속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혀갔다. 그 결과 망명 2년 만인 1923년, 제11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염온동 선생 그러나, 임시정부는 해체론을 둘러싼 갈등으로 분열되었고 사무실 임대료 지불이 어려울 만큼 재정도 악화되었다. 이에 선생은 1926년 7월 안창호엄항섭 등과 함께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직접 애국금을 납입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제적 후원에 앞장섰고 상하이 청년동맹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의 통일 전선 형성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차희식(1870. 11. 10 ~ 1939. 10. 18)선생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태어나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에서 성장하였다. 장안면은 동리마다 서당이 있어 책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교육과 문화의 수준이 높은 곳이었다. 또한 일찍이 동학과 기독교가 전파되어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성장한 선생은 어릴 적부터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술이 좋고 힘이 장사여서 여러 사람을 인솔하는 자질이 뛰어났고, 31운동 당시에는 장년층으로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을 통솔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는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정책을 시행하여 농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고, 간척공사를 비롯해 송충이 잡는데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등 노동 착취가 심하였다. 또한 1907년 염업조사를 실시하여 한국인 제염업자의 경영 기반을 해체시켰는데 이는 농업과 함께 이 지역의 주요 경제적 기반이었던 염업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일제의 수탈정책은 다른 지역보다 소작농의 비율이 높고 여건이 열악한 이 지역민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의 경제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삶은 점점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상덕 선생은 경북 고령군 저전동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배움에 대한 뜻을 잃지 않고 한학으로 학문적 소양을 다진 뒤 1915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해 유학생들과 민족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1919년 1월 6일, 동경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하는 모임으로 확대되었고, 선생은 독립선언서 작성과 발송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어 김도연.백관수.최팔용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낭독을 감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제에 체포.구금되었다가 1920년 2월 9일 출옥하였다. 1920년 3월 5일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선생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의 주장에 임시정부를 유지 하면서 개혁하자는 개조파의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청년동맹회를 결성하여 중국에서 활동하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나태섭(1901~1989) 선생은 1901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중동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참여 후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에 뜻을 품게 된 선생은 이듬해 졸업 후 안악군 봉삼학교 교사로 재직하여 인재 양성에 진력을 다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과 더불어 동지 포섭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3년 활동이 탄로나 원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자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 5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 독립운동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독립운동 간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4년 8월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재학 중 1934년 12월 한국특무대독립군 제1대장으로 선임되었다. ▲ 나태섭 애국지사 1936년 6월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 보병과 졸업 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보궐 선출된 선생은 같은 해 7월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의 단원들에 대한 보호 및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기자] 이범진(李範晉, 18521911)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 정치가, 외교관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무관으로 이름난 훈련대장 이경하(景夏)의 아들이었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시해사건 뒤에 사임하였다. 1895년 10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으며 실패하여 일시 러시아에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여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아관파천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 이범진 애국지사 1897년 선생은 자원하여 주미공사가 되어 기울어져가던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구국외교에 투신하였다. 이후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까지 4개국 공사를 겸임하였다. 주러시아공사로 있던 시절 선생은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용암포 조차를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선생은 여기에 반발하여 이 공문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홍언(1880~1951)선생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선생이 사망한 뒤, 미주사회에서는 선생을 고결한 참된 애국자이며, 평생을 언론기관을 위해 힘썼으며, 우리의 문화향상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한 작가ㆍ시인ㆍ평론가로 평가하고, 자신의 모든 사생활을 희생한 인물로 기억하였다. 선생의 본명은 홍종표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고 일시 중국을 다녀온 뒤, 1904년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1910년 이전에는 하와이에서 여러 언론매체의 주필로, 그리고 1911년 이후에는 미주 본토에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편집과 기고가로 수십 년 봉사하였다. 또한 선생은 『신한민보』에 동해수부 등의 필명으로 시ㆍ시조ㆍ소설ㆍ희곡ㆍ전기ㆍ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백 편을 발표하는 등 언론가이자 작가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대한인국민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직임을 맡았으며, 흥사단의 창립단우로 흥사단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미주한인사회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한인단체를 주도하거나 재정지원을 한 인물들도 많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