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1895년 경북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난 이광민선생은 백부인 이상룡이 세운 협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애국사상을 함양하였다. 1911년 백부 이상룡이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자 함께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였고 1916년 부민단 본부가 있는 통화현 삼도구 동화학교의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간도 지역에서는 한족회를 설립하여 민족운동 단체를 규합하였다. 한족회는 이후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고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 세력임을 천명하였으며 선생은 서로군정서의 최고지도자인 이상룡 선생을 최측근에서 보좌하여 청산리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두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청산리에서 크게 패한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참변을 단행하여 서간도 독립군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후 서간도 독립운동계는 보다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독립군 세력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고 1922년에 서간도, 남만주 독립군의 통합세력인 대한통의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성립 후 일 년이 되지 않아 이념상의 문제로 분열되었고, 1924년 중반 이후 또 다시 남만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통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염온동 [1898-1946] 선생은 강원도 금화군 읍내리에서 부친 염문우와 모친 손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학으로 학문적 소양을 다진 선생은 1910년 금화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보성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금화지역 31운동에 참여하여 3년의 옥고를 치른 후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1921년 4월 28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독립운동단체 및 소속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혀갔다. 그 결과 망명 2년 만인 1923년, 제11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염온동 선생 그러나, 임시정부는 해체론을 둘러싼 갈등으로 분열되었고 사무실 임대료 지불이 어려울 만큼 재정도 악화되었다. 이에 선생은 1926년 7월 안창호엄항섭 등과 함께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직접 애국금을 납입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제적 후원에 앞장섰고 상하이 청년동맹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의 통일 전선 형성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차희식(1870. 11. 10 ~ 1939. 10. 18)선생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태어나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에서 성장하였다. 장안면은 동리마다 서당이 있어 책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교육과 문화의 수준이 높은 곳이었다. 또한 일찍이 동학과 기독교가 전파되어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성장한 선생은 어릴 적부터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술이 좋고 힘이 장사여서 여러 사람을 인솔하는 자질이 뛰어났고, 31운동 당시에는 장년층으로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을 통솔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는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정책을 시행하여 농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고, 간척공사를 비롯해 송충이 잡는데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등 노동 착취가 심하였다. 또한 1907년 염업조사를 실시하여 한국인 제염업자의 경영 기반을 해체시켰는데 이는 농업과 함께 이 지역의 주요 경제적 기반이었던 염업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일제의 수탈정책은 다른 지역보다 소작농의 비율이 높고 여건이 열악한 이 지역민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의 경제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삶은 점점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상덕 선생은 경북 고령군 저전동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배움에 대한 뜻을 잃지 않고 한학으로 학문적 소양을 다진 뒤 1915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해 유학생들과 민족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1919년 1월 6일, 동경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하는 모임으로 확대되었고, 선생은 독립선언서 작성과 발송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어 김도연.백관수.최팔용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낭독을 감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제에 체포.구금되었다가 1920년 2월 9일 출옥하였다. 1920년 3월 5일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선생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의 주장에 임시정부를 유지 하면서 개혁하자는 개조파의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청년동맹회를 결성하여 중국에서 활동하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나태섭(1901~1989) 선생은 1901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중동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참여 후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에 뜻을 품게 된 선생은 이듬해 졸업 후 안악군 봉삼학교 교사로 재직하여 인재 양성에 진력을 다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 모금운동과 더불어 동지 포섭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3년 활동이 탄로나 원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자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 5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 독립운동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독립운동 간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4년 8월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재학 중 1934년 12월 한국특무대독립군 제1대장으로 선임되었다. ▲ 나태섭 애국지사 1936년 6월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 보병과 졸업 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지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보궐 선출된 선생은 같은 해 7월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의 단원들에 대한 보호 및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기자] 이범진(李範晉, 18521911)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 정치가, 외교관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무관으로 이름난 훈련대장 이경하(景夏)의 아들이었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시해사건 뒤에 사임하였다. 1895년 10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으며 실패하여 일시 러시아에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여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아관파천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 이범진 애국지사 1897년 선생은 자원하여 주미공사가 되어 기울어져가던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구국외교에 투신하였다. 이후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까지 4개국 공사를 겸임하였다. 주러시아공사로 있던 시절 선생은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용암포 조차를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선생은 여기에 반발하여 이 공문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홍언(1880~1951)선생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선생이 사망한 뒤, 미주사회에서는 선생을 고결한 참된 애국자이며, 평생을 언론기관을 위해 힘썼으며, 우리의 문화향상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한 작가ㆍ시인ㆍ평론가로 평가하고, 자신의 모든 사생활을 희생한 인물로 기억하였다. 선생의 본명은 홍종표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고 일시 중국을 다녀온 뒤, 1904년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1910년 이전에는 하와이에서 여러 언론매체의 주필로, 그리고 1911년 이후에는 미주 본토에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편집과 기고가로 수십 년 봉사하였다. 또한 선생은 『신한민보』에 동해수부 등의 필명으로 시ㆍ시조ㆍ소설ㆍ희곡ㆍ전기ㆍ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백 편을 발표하는 등 언론가이자 작가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대한인국민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직임을 맡았으며, 흥사단의 창립단우로 흥사단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미주한인사회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한인단체를 주도하거나 재정지원을 한 인물들도 많지만,
[그린경제/ 얼레빗 = 이규봉 교수] 법 또는 권력의 힘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형제도는 사람들이 국가를 만든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아주 오래된 제도이다. 거의 모든 종교가 살인을 저지르지 말라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음에도 국가는 사형을 집행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심지어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기독교 국가에서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까지도 일삼았다. 그 현장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대중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그렇지 않은 시민은 조용히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훔쳤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12년 7월에 생명권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며, 국제인권법의 핵심적인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인간이 인간에게 하기엔 너무나 절대적인 결코 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극형은 범죄를 막지 못한다 사형을 당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형을 당할만한 범죄자였을까? 자신이 저지른 일이 사형을 당할만하다고 생각하고 죽은 자가 얼마나 될까? 정치적인 이유로, 무고에 의해서, 재판관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의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또
[그린경제/ 얼레빗 = 윤지영 기자 ] 조병준 (1862-1931) 선생의 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이다. 평북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운암 박문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의거에 호응하여 평안북도 창성에서 거의했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으나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마련하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하여 교민들의 식산(殖産)과 교육에 힘썼다. ▲ 조병준 선생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단과 포수단 등을 주축으로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동 단체가 양분되자 민국독립단 도총재로 활동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의 비밀연락방 조직인 연통제
[우리문화신문= 도쿄 전수희 기자] "처음으로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는 얼마나됩니까?", "한국에서는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까?" , " 이윤옥 시인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하여 시를 쓰고 그 일생을 알리고 계신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쵸후시 영상시어터 강연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 "항일여성독립운동가" 특강을 듣기 위해 도쿄 쵸후시 영상시어터 강연장을 가득 메운 일본시민들 17일 오후 6시 30분부터 9시까지 일본 도쿄 쵸후시(調布市) 문화회관 다즈쿠리 8층 영상시어터 강연장에서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의 <조선, 한국의 여성들 “식민지 시대의 독립운동과 여성들”>이라는 주제로 특강이 열렸다. 100여 석의 강연장을 가득 메운 일본 시민들은 이윤옥 소장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 2시간 반 동안 휴식 없이 자리를 뜨지 않고 경청했다. 700엔(한국돈 7000원 정도)의 입장료에도 자리를 가득 메운 일본 시민들의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가 뜨겁게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 이번 강연을 주선한 35년 전통의 쵸후시 물레회의 반나이무네오 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