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병준 선생의 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이다. 평북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운암 박문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의거에 호응하여 평안북도 창성에서 거의했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으나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 조병준 선생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마련하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하여 교민들의 식산(殖産)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단과 포수단 등을 주축으로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동 단체가 양분되자 민국독립단 도총재로 활동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의 비밀연락방 조직인 연통제 평북독판부 독판에 선임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이종훈([1856~1931) 선생은 1856년 경기도 광주 실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1883년 동학에 입도한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과정에서 부상하기 시작, 경기충청강원을 망라한 20여개가 넘는 포를 아우르는 북접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이후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하던 시기 박인호 등과 함께 교단 운영에 참여하였고 1905년 12월 천도교가 창건되는 과정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중앙교단의 고위 간부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계속되던 중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조선도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게 일었다. 1919년 2월 25일, 선생은 권동진,오세창을 만나 독립선언 참가 제의를 수락했다. 천도교 중앙교단의 최고직인 장로였던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3월1일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천도교단의 원로로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1922년 7월, 천도교 혁신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신현구 선생([1882-1930) 은 1882년 12월 8일 충남 논산 부적면 안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고향인 논산에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전도사업을 벌이던 선생은 1906년경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즈를 만나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활동했고, 민족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1915년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 부속여학교 교사로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하여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년 5월 그 추진체로서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하였다.대한독립애국단은 단장인 선생과 함께 재무총장 김순호, 김상덕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 신현구 선생 국외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국내의 재정적 후원 및 지지를 절실히 필요로 했으므로 동단은 결성 초기부터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대한독립애국단 단장으로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 조달,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망인 연통제의 역할을 하였다.
[그린경제/얼레빗 = 중국 목단강 이윤옥 기자] "여권을 보여주십시오"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입구에는 젊은 관리원이 앉아 있었는데 우리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9월 25일 오후 3시 일본인 작가 도다 이쿠코 씨와 기자는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찾아갔는데 입구에서 신분증 제시 요구를 받았다. 기자의 한국 여권을 꺼내 보인 뒤 장부에 여권번호를 적어 넣은 뒤에 기념관엘 들어 설 수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됩니다." 젊은 관리는 우리를 바라다보면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복도처럼 생긴 좁은 전시장 안을 들어서니 이미 들어 와 있는 관람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1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2 사실 여권은 한국인인 내 여권만 보여주었다. 관리의 눈에는 "아줌마 두 명이 국적이 같을 것"이라고 여겨졌는지 일본인 작가의 여권 제시는 요구하지 않았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서야 도다 이쿠코 씨는 "전에 기념관 개관식 때 일본인 기자가 취재하러 왔다가 입장을 거부당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어 일부러 자신의 여권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현정건 (1887~1932)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상해 인성학교의 교사로서 청년들을 교육하고,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조직하는 등 왕성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정건선생은 대구 출신으로서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1919년 9월 17일 보선되어 임시정부의 국사처리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6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될 때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일원으로 윤해,신숙 등이 주동이 된 창조파에 속하여 활동하였으나, 조선공화국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이러한 일은 전민족의 의사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 공산당 대표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 현정건 선생 1924년 6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오는 국내 학생들이 언어와 풍속에 익숙하지 못하여 중국 사회에 적응치 못하고 상급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는 실정에 놓이게 됨을 타개하고자 김규식의 제안으로 인성학교내에 예비강습소를 개설하였을 때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영어과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이석용 선생(1877~1914)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어른들을 좇아 옛사람들이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들을 즐겨 들었던 선생은 1897년 8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의 도동서려(桃洞書侶)로 이거하여 학문연마에 전심전력하였고, 이후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 선생에게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아 의병을 일으킬 이론적 근거를 정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졌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다. 선생은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최익현 등 12의사의 체포로 의진이 해산되자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6년 가을, 선생은 고광수 등과 거의 방략을 협의하여 1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전북 마이산 자락 용암에서 고천제를 지낸 후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진안읍을 공격,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 이석용 의병장 1907년 음력 11월 의병을 다시 규합하고 군자금을
[그린경제 /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동수 [1916~1982] 선생은 강화에 세거한 양반가문으로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신앙하였다. 8세 때인 1923년, 선생의 부친은 자유로운 선교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건너갔다. 선생은 상해에서 민족교육의 상징인 인성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키워 나갈 수 있었고, 화랑사 등 각종 소년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인성학교와 공시중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제1차 상해사변 이후 중국 내에서 벌어지는 학생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934년경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선생은 윤봉길의거 이후 독립전쟁의 군사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연마하는 한편, 김구가 조직한 특무대에 들어가 반일운동에 참여하였다. 낙양분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6년 중국군의 장교로 복무하였다. 다음 해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남경에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선생은 피난 중의 임시정부 대가족과 김구 등 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한 이후 선생은 나월환 등 한인 청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향산 이만도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나 14세 때, 선대 고향인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돌아왔다. 하계마을은 퇴계의 학문을 가장 전형적으로 계승한 곳으로 조선 후기 걸출한 인재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다. 선생은 24세가 되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과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의 청직(淸職)을 지냈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여 파직당하기도 하였고,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같은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 향산 이만도선생 순국비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던 중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에 서상철이 거병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선생은 왕의 명령이 없는 거병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되자 선생은 거병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여준 선생은 1862년 죽산군 원삼면(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문을 공부한 선생은 성년이 되어 서울에서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등과 어울려 한학 뿐 아니라 신학문도 섭렵하였으며, 1896년 성균관 직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선생은 이상설, 정순만, 이동녕 등과 함께 황무지 개척권 반대 운동과 을사늑약 강제체결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호응을 끌어내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 선생은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교육계몽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회영, 이동녕 등과 함께 국외 망명을 계획하였다. 1906년, 계획대로 망명을 결행하였고 간도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선생은 이듬해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자 제2대 숙장을 맡아 서전서숙을 끌어나갔다. 그러나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감시와 방해로 폐교에 이르자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는 한편, 1908년 용인 원삼면 죽릉리에서 삼악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법린 선생은 1899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품은 선생은 1913년 영천 은해사로 출가하여 이듬해 항일불교의 중심사찰인 범어사로 승적으로 옮겼으며, 신식학교인 명정학교 보습과 및 구학교육인 강원과정을 배웠다. 이 때 스승인 국어학자 권덕규와 독립투사 서상일과의 만남이 후일 조선어학회 활동과 3.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되었다. 1917년 선생은 범어사의 인재양성 책에 힘입어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하였다. 이 시기 한용운 선생이 유심회를 조직하고, 불교잡지 [유심]지를 발간하자 선생은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하였으며, 한용운으로부터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같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국내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며 항일비밀결사 한국민단본부의 기관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하는 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