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고 합니다. 선생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이면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특히 일본이 지배하는 땅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며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한 것입니다. 1936년 오늘(2월 21일)은 단재 선생이,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한 날입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드물게 언론, 역사, 그리고 독립운동 세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분이지요. 먼저 언론인으로서는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에 이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침략 논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애국계몽운동의 실천적 지식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리고 사학자로서는 식민사관에 맞서서 역사의식을 갖추는 것이 곧 애국심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독사신론(讀史新論)》과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펴냈으며, 특히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총론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기록’이라는 그의 유명한 민족주의 사관을 극명하게 이론화하여 밝혔습니다. 선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몇 년 전 KBS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조통달 명창과 그의 아들로 가요계의 한 획을 그은 가수 조관우 그리고 그의 아들 피아니스트 조현까지 3대가 함께한 무대가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관우는 어려서 이모할머니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 박초월 명창 손에서 자랐다고 하지요. 결국, 박초월 명창의 뛰어난 음악성은 3대를 이어간 셈입니다. 1913년 오늘은 그 박초월 명창이 태어난 날입니다. 박초월 명창은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전라북도 남원에서 자랐는데 김정문(金正文)ㆍ송만갑(宋萬甲)ㆍ임방울(林芳蔚)ㆍ정광수(丁珖秀) 등 당대의 명창들에게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지요. 1930년 전주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여러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흥보가」ㆍ「심청가」ㆍ「춘향가」 등을 취입하였습니다. 1955년에는 현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모체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박귀희(朴貴姬) 명창과 함께 설립하고 교사로서 많은 신인을 양성하였지요. 1962년 초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맡았으며, 1971년 국악협회 상임고문,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둘째 우수(雨水)입니다. 우수라는 말은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이어서 이제 추운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을 맞게 된 것이지요. “우수 뒤에 얼음같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슬슬 녹아 없어짐을 이르는 뜻으로 우수의 성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무렵에 꽃샘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우수 경칩에 대동강도 풀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우수와 경칩을 지나면 아무리 춥던 날씨도 누그러져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트지요.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계절에 나누는 전래의 인사에도 "꽃샘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것도 있지요.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피운다는 뜻을 담은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 합니다. 하지만, 우수가 되면 봄기운이 서리기 시작하는데 풀과 나무가 깨어나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이때는 논밭을 둘러보고 새해 농사 계획 세우며, 삽질 한 번, 낫질 한 번으로 몸을 풀지요. 특히 이 무렵에는 농사일 한발 앞서 장을 담가야 합니다. 장 담그는 일은 시골 살림에서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이웃과 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야기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농상공부길(農商工部通り)에 신축 낙성한 경성고등연예관에서 (2월) 18일 관민 수백 명을 초대하여 활동사진 개장을 피로한다.” 이는 1910년 2월 18일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이 경성고등연예관(高等演藝館)은 일본인 와타나베가 세운 조선에 처음 등장한 영화관입니다. 경성고등연예관은 현재의 을지로2가 KEB하나은행 본점 옆 황금정 63통 7호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극장은 프랑스의 파테영화사에서 수입한 당시로써는 각종 첨단 영사장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부는 이른바 ‘기석’(奇席)이라는 일본식이었는데, 2층은 다다미, 아래층은 긴 의자로 배치하였지요. 수용인원은 6백명 정도였고, 일본인 영사기사를 영화상영을 위해 고정배치 하였습니다. 특등석 1원, 1등석 50전, 4등석 10전으로 비싼 입장료였지만 경성고등연예관의 영화상영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고 하지요. 경성고등연예관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본격적인 영화전문극장으로 조선에 처음 선보인 것이었으며, 조선에 영화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다만, 극장의 소유주가 일본인이며, 일본 자본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일본인이 조선의 영화시장을 본격적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51년 전 오늘(2월 17일)은 독립운동가면서 ‘임정의 수호자’란 별명이 붙은 이동녕(李東寧) 선생이 태어나 날입니다.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대리,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지요. ‘임정의 수호자’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입니다. 특히 1925년 국무령제 개헌 직후 선생은 잠시 내각 수반인 국무령을 맡았다가 김구 선생을 지원하여 그 내각을 성립시켰습니다. 이에 김구는 《백범일지》에 "금일의 오인(吾人)을 있게 한 이면에는 이동녕의 지원이 있어 가능하였다."라고 고백하였는데 1932년 이봉창ㆍ윤봉길 의거도 백범 김구가 선생과 상의하여 결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생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김구와 함께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급성폐렴증세까지 나타나 결국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을 바로 앞두고 낯선 이국땅 기강에서 1940년 3월 13일, 71살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지요. 그러나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음식을 담은 그릇을 올려놓는 작은 상, 소반의 크기는 너비가 50센티미터 안팎입니다. 한 사람이 소반을 받쳐 들고 부엌에서 마당을 지나 대청을 오르고 안방이나 사랑방으로 옮겨가는 데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될 만큼의 크기지요. 또 소반의 좌우 폭이나 지름이 성인의 어깨너비보다 크지 않아 양팔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높이도 25~30센티미터 안팎으로 몸을 많이 구부리지 않아도 되며, 팔을 움직이는 데도 큰 불편이 없지요. 이처럼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가구이기 때문에 재목은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것들을 썼는데 주로 은행나무, 가래나무, 피나무, 오동나무, 소나무 따위입니다. 또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목재의 연결부분을 슬기로운 짜임으로 튼튼하게 짜 맞추어 가늘지만, 소반과 그 위에 놓인 그릇과 음식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옮기기 편하게 하려고 그릇을 올려놓는 천판이 밖으로 나와 따로 손잡이 없이 양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반의 특징 가운데는 다리도 빼놓을 수 없지요. 다리는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하되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아름다운 모양새로 만들었습니다.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의 정서와 아름다움이 가장 돋보이게 나타난 예술품의 하나로 사람들은 ‘백자 달항아리’를 꼽습니다. ‘백자 달항아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은 용인대학교박물관에 국보 제262호가 있고, 삼성미술관 리움에 국보 제309호 있으며, 국립고궁박물관에 국보 제310호가 있습니다. 그런데 ‘백자 달항아리’들의 원래 문화재 이름은 ‘백자대호’였지요. 여기서 ‘대호(大壺)’란 ‘큰항아리’를 말하는 것으로 참으로 무미건조한 한자말입니다. 그러나 ‘백자 달항아리’를 사랑했던 대표적인 예술가인 화가 김환기 선생과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밤하늘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 같은 백자’라며, ‘달항아리’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차츰 많은 사람이 이 정감있고 서민다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 ‘달항아리’에 공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문화재 이름은 ‘달항아리’로 바뀌게 됩니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영혼의 미술관》에서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표면에 작은 흠들을 남겨둔 채로 불완전한 유약을 머금어 변형된 색을 가득 품고, 이상적인 타원형에서 벗어난 윤곽을 지님으로써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다. 가마 속으로 뜻하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중앙박물관 야외 석조물정원에는 국보 제100호 “개성 남계원(南溪院)터 칠층석탑”이있습니다. 이 탑은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으로 바로 잡았지요. 1915년에 탑의 기단부(基壇部)를 뺀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는데 이후 원래의 자리를 조사한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다시 복원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세웠습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얼핏 보면 신라 석탑의 본보기를 따르고 있는 듯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좀 다릅니다. 먼저 기단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에 견주어 아래층 기단이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2층 기단이 약간 낮아졌습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두었지요. 지붕돌은 두툼해 보이는 처마가 밋밋한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려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과 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민사령 개정에 의한 조선 사람의 씨 제도는 드디어 명 11일 빛나는 황기 2,600년의 기원가절을 기약하고 시행을 보게 되었다. 조선 민중의 열렬한 요망에 맞추어 원대한 이상으로써 제정된 이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 총독부에서는 법무국을 중심으로 하여 각지 약 60개 소에서 협의회를 열고 호적 사무에 관한 부군읍면의 끝까지 취지가 철저하게 인식되었으므로 일반 민중의 씨 창설 계출에 대한 준비는 조금도 유감스러운 점이 없이 준비되어 있다.” 이는 조선일보 1940년 2월 11일 치 기사로 이날부터 “창씨개명”을 시작한다는 얘기입니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들어 강력한 민족말살정책과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 핵심 정책 가운데 하나가 1939년 12월 공포된 ‘창씨개명령’입니다. 조선의 성 대신 일본식 씨를 만들고 이름을 다시 짓도록 강요하는 법령이었지요.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이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 곧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 하여 각종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자녀 학교 입학 불허, 관리 채용 차별은 물론 식량 배급에서 제외하는가 하면 심지어 우편물도 배달하지 않았지요. 이 때문에 주어진 기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전 한자로 쓴 현판들을 보면 모두 글씨가 오른쪽부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한자의 경우오른쪽부터 쓰기 때문이지요. 그런 예로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 현판도 역시 오른쪽부터 썼습니다. 그런데 한양 성곽 4대문의 하나인 숙정문과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은 왼쪽부터 썼습니다. 한양 성곽나들이를 하면서 꼼꼼히 살펴본 이들은 이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1396년 완공된 숙정문이나 혜화문의 현판은 당연히 오른쪽부터 썼을 겁니다. 원래 문화재 복원은 원형대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숙정문은 1976년, 혜화문은 1992년 복원하면서 현판도 새로 만들어 달았는데 그때 복원의 주체들과 현판을 만들었던 장인들이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현대에 맞춰 왼쪽부터 쓰기로 했다고 전합니다. 한편, 광화문 현판은 상징성을 고려해서 한글로 달자며 한글단체가 강력히 주장했는데도, 문화재청은 굳이 원형대로를 고집하며 한자로 써 달았습니다. 지난 1월 13일부터 14일까지 한글문화연대의 의뢰를 받아 리얼미터가 전국 19살 이상 1,0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40.6%가 ‘한국을 대표하는 곳이니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