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시인 연산군! 흔히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연산군에게, 시인이라는 표현은 좀 낯설다. 조선에서 글을 배운 선비라면 누구나 필수 교양으로 시를 짓곤 했지만, 임금은 좀 달랐다. 이성적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군주에게 감성적인 시 짓기는 그다지 권장되는 덕목이 아니었다. 그래서 임금이 어제시(御製詩)를 지을 때마다 신하들은 삼갈 것을 권하곤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달랐다. 그는 보위에 오른 뒤에도 80여 편에 달하는 어제시를 지을 만큼 시를 좋아했다. 그 내용은 대체로 감상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기애가 충만한 것들이었으나, 때로는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살벌한 시도 있다. 연산군은 자신이 지은 시를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 내리고, 승지들에게 답시를 지어 올리게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책, 《조선국왕 연산군》은 ‘88편의 시로 살피는 미친 사랑의 노래’라는 부제에 걸맞게 연산군이 남긴 88편의 시로 그의 내면에 흐르는 광기와 고독, 사랑을 보여주는 책이다. 소설과 해설을 절묘하게 섞어 쓰는 작가의 필력 덕분인지 재밌게 술술 읽힌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어제시가 연산군의 심리 상태와 광기를 잘 드러낸다. 연산군은 잘 알려진 것처럼 조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춥고 눈도 제법 많이 내리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은 ‘대한’이었는데, 예전에는 소한 대한 추위가 별로 세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올해는 센 정도가 아니라 매섭고 그것이 설 연휴로 이어졌다. 모처럼 겨울 같은 겨울에 새해를 맞은 셈이다. 그렇게 추운 어느 날 서울 시내에 일이 있어서 나가 보니 다들 움츠리고 길을 걷는데, 헐벗은 가로수들 기둥들에서 무슨 알록달록한 색깔이 보인다. "어 이거 뭐지? "하고 가까이 가 보니 나무들이 털실로 된 천을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 눈높이 정도니까 목도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조끼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허리나 어깨 정도의 높이에 꽃이 수 놓인 뜨개질 천들이 나무 기둥을 잘 감싸주고 있는 게 아닌가? 처음 볼 때는 기계로 뜬 것이겠거니 했는데 가까이 가서 만져보니 진짜 손으로 뜬 털실이다. 그리고 그 솜씨가 아주 뛰어나서, 작품마다 아주 아름답다. 은은한 초록 바탕에 매화꽃이 활짝 핀 것도 있고 노란 해바라기꽃 같은 것도 있다. 때로는 섬세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진한 색조의 대비가 우울한 겨울의 거리에서 밝은색의 향연으로 눈을 확 끌어당긴다. 이 회색의 음산한 도시 겨울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열자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리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한 좋은 사람입니다. 그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주 :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할 수 있소 양양 : 당신은 처첩도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고 작은 밭조차 제대로 경작하지 못하면서 무 슨 말이요? 양주 : 아무리 어린 목동이라도 하더라도 양 치는 일은 임금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이요. 호미와 쟁기의 쓰임이 다르듯이 사람도 됨됨이에 따라 쓰임새가 다른 법이라오 쟁기만 옳고 호미는 그르다는 주장은 옳지 않소. 참으로 큰 인물은 노는 물과 하는 역할이 남달라야 하는 법이라오.” 《장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오지요. 탄주지어 육처즉 불승루의 呑舟之魚 陸處則 不勝螻螘 "수레바퀴를 삼켜버릴 큰 짐승도 산에서 내려오면 그물에 걸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고 배를 삼킬만한 큰 물고기도 휩쓸려 물을 잃으면 개미에게도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 이는 익숙한 거처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권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사람들이 쉽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임진왜란의 최대 공신을 뽑으라면 대부분 사람들이 무신으로는 이순신 장군, 문신으로는 서애 류성룡을 꼽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애는 당연히 1등 공신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2등 공신으로밖에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주화오국(主和誤國) 곧 왜란과 호란 당시 적국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누명을 쓰고 삭탈관직 되었습니다. 《서애연구》 6권에 실린 논문 <임란 극복의 주역, 류성룡 축출 과정과 그 배경>에서 류을하 박사가 이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저도 덕분에 서애 선생이 억울하게 쫓겨나는 과정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벽하는 서애학회의 상임위원이기도 하지요. 군역에서 빠진 양반도 병역의무를 지게 해 서애는 전시(戰時) 재상으로 오로지 나라를 살려내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면 기존 인습이나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제도를 유연하게 변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전시개병제를 도입하여 군역에서 빠진 양반이나 천민도 모두 병역의무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민들도 공을 세우면 면천(免賤)뿐만 아니라 벼슬까지도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물작미법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2,500여 년 전 손무와 손빈은 《손자병법》이란 책을 완성합니다. 그 글에는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부족한 곳이 없도록 하려 한다면 부족하지 않은 곳이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모든 곳을 대비하면 모든 곳이 소홀해진다는 뜻입니다. 곧 한정된 군사를 모든 곳에 배치하면 각처마다 수가 적어져서 각개격파의 대상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운용상의 효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군사의 숫자는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나 군사가 많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집중이 중요합니다. 적이 올 가능성이 가장 큰 곳에 군사력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이기려면 ‘무소불비 무소불과’를 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도 없지요. 어쩌면 한 사람이 가지는 일생의 행복과 불행의 총량은 모두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는 삶은 누구에게도 오지 않는다." 세상엔 부유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며칠 있으면 설이구나. 어릴 때 설을 마냥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다들 먹는 것이 부실할 때여서 설이나 한가위 등 명절이 되면 큰 집이건 외갓집이건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 인사를 드리고는 곧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어 그날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그런 달콤한 기억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 듣는 것이었다. 특히 설에는 대부분 날씨가 추우니 미리 초저녁에 군불을 때어 뜨끈뜨끈해진 안방 아랫목에 넓은 이불을 펴고 그 안에 발을 집어넣어 무릎을 맞대고는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대충 간식도 먹고 나면 우리는 할머니 팔을 붙잡고 흔들며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곶감을 좋아하던 호랑이, 달순이 별순이 이야기 등 몇 번씩이나 들어서 줄거리를 다 알지만 들을 때마다 재미있었다. 친구들 만나보면 이야기 솜씨가 좋은 할머니들은 별별 이야기를 다 해주신다고 한다. 요즘 우리 손자 손녀가 딱 그때 내가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이여서 손주들이 명절에 집에 오면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할아버지인 나는 말솜씨가 없어 할머니한테 미루면 집사람은 어떻게든 애들을 무릎 앞에 앉히고 이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한국도로학회에서 《도로 이야기》라는 책을 냈습니다. 도로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지요. 그러니 한 사람이 다 쓸 수는 없고 도로학회 회원들이 분담하여 썼습니다. 그 가운데는 같은 공군 장교 출신이라 저와 인연을 맺은 손원표 박사도 필진으로 참가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도 이 책을 보게 되었데,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는 아무래도 제가 역사를 좋아하니 도로의 역사 부분에 눈길이 갑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지요? 로마의 첫 포장도로는 기원전 312년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에쿠스 지휘하에 만들어졌네요. ‘아피아 가도’라는 말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하여 병력과 물자만 오간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을 통하여 로마 문명이 전파되고, 로마제국 이후에도 로마 가도를 따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유럽 문명의 정체성이 유지된 것입니다. 한편 서양은 거리를 나타낼 때 ‘마일’을 쓰지 않습니까? 이게 로마의 도로에서 유래된 것이네요. 로마에서는 가까운 도시부터의 거리를 표시하기 위하여 로마 성인의 1,000 걸음 (약 1,480m)에 해당하는 지점마다 돌기둥을 세웠는데, 여기서 ‘마일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김란사! 언뜻 듣기에도 몹시 이국적인 이 이름은,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김란사는 구한말 태어나 1919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조선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헌신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화학당의 교사로 많은 여성을 깨우치고, 또 고종의 비밀문서를 갖고 파리강화회의로 향했던 중요한 업적에 견줘 오늘날 거의 아는 이가 없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아마 파리강화회의로 향하던 중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아까운 삶을 일찍 마쳤기 때문이리라. 이 책,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의 지은이 황동진은 서울교육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활동하는 그림작가다. 2017년 김란사 특별전을 기획하고, 전시가 끝나서도 김란사를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펴냈다. 김란사는 1872년, 평양의 한 유복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청나라에 오가며 무역한 덕분에 남부러운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에는 혼인을 10대 시절에 일찍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는 스물한 살에 경무청에서 일하던 하상기와 혼인했다. 여느 여성들과 다르게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 일을 적극적으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강원도 산골로 들어온 지 이제 세 해째를 맞는다. 깡촌의 강마을에서 태어나 국민학생 때 서울로 간 나는 음악을 좇아 이십여 년의 서울살이를 접고 30대 시절에 그곳을 떠났었다. 몇몇 지방도시를 전전한 끝에 강릉에다 짐을 풀고 이십 년 가까이 살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십여 년을 또 살고 이곳으로 왔으니 고향에서 보낸 기간보다 타향살이 기간이 몇 곱절은 길다. 그런 까닭인지 고향보다는 타관에 대한 기억이 더 많고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서울에서의 추억이 가장 많이 새겨져 있다. 감수성이 한창인 청소년기를 보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늘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우리 가족은 이 개천가에서 첫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청계천은 지금의 광교 쪽 일부 구간을 뺀 나머지는 복개되기 전이었고 한국전쟁 직후 빈곤의 그림자가 꽤 많이 남아있었다. 동대문을 지나 하류 쪽으로 둑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도 무허가 판잣집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었고,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이었다. 판잣집은 말이 집이지 그저 비, 바람이나 근근이 가리는 정도의 공간이라 치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옛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고서는 그 일에 대해서 의논하지 않는다" 사람은 남의 입을 통해서 사실을 인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의 주관이 아니라 남의 주관대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진실을 잘 알지 못하면서 떠벌리는 경우도 많지요. 임금을 섬길 때는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임금의 신뢰를 받는 게 중요하지, 임금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조석으로 가까이에서 임금을 모신다고 해서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며, 시나 글을 잘하고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임금이 존경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도, 얼굴빛을 살펴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도 벼슬 버리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차림새가 엄하지 못한 사람도, 권력자에게 이리저리 붙는 사람도 임금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경연에서 온화하게 말을 주고받고, 일을 처리할 때 비밀히 부탁하고, 임금이 마음속으로 믿고 의지하여 서신이 자주 오가고, 하사품이 자주 내려질지라도 그런 것을 총애나 영광으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뭇사람들이 노여워하고 시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