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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의 햄릿, 김시습

《나는 김시습이다》, 강숙인, 여름산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물러갈 것이냐 나아갈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조선의 햄릿으로 살다간 김시습의 생애를 한 마디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한평생 출처(出處), 곧 선비의 나아감과 물러남을 고민한 그는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 선비가 세상에 나아가는 것을 ‘출(出)’, 재야에 묻혀 자신을 갈고닦는 것을 ‘처(處)’라고 한다면, 김시습은 초야에 묻혀 세월을 보내던 처사(處士)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평생 그를 괴롭힌 것은 출사(出仕)에 대한 욕망이었다. 불의한 세조 정권에 맞서 절의를 지키려 처사가 되었건만, 타고난 재능으로 조정에 출사하여 천하를 경륜하고자 했던 젊은 날의 꿈은 한평생 그를 괴롭혔다.

 

강숙인이 쓴 이 책, 《나는 김시습이다》는 이처럼 절의와 세속적 성공 사이에서 갈등한 김시습의 내면을 1인칭 시점으로 세밀하게 그려냈다. 지은이는 세조 정권에 저항하며 장렬히 목숨을 버린 ‘사육신’의 그늘에 가려진 ‘생육신’이 겪었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 가늘고 여린 슬픔’에 대해 쓰고자 했다고 밝힌다.

 

 

사육신 곧 1456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등 6명은 조선 중기 이후 충절의 상징으로 칭송되었지만, 은둔과 방랑으로 소극적인 저항을 한 생육신 6명은 때로는 비겁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김시습은 바로 이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시습ㆍ원호ㆍ이맹전ㆍ조려ㆍ성담수ㆍ남효온을 일컫는 생육신은 난폭한 시대를 거부하며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젊은 날의 꿈이 있었다. 보통 그 시대 선비들이 그러하듯 학문을 갈고닦아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던 청운의 꿈은, 처사의 길을 선택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김시습은 그 괴리를 유난히 아파한 사람이었다. 빛나는 재능을 가졌던, 다섯 살 때부터 ‘신동 김오세’라 불리며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했던, 그래서 장차 나라를 이끄는 재목이 될 것을 모두가 의심치 않았던 그가 한낱 떠도는 방랑자를 선택했을 때, 그 울분의 크기는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는 《논어》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만큼 글공부를 중시하는 가풍에서 자랐다. 비록 신라 왕족 김주원의 후손이라고는 하나 가세는 기울어진 지 오래, ‘공부 신동’ 김시습의 존재는 집안사람 모두에게 한 줄기 희망이었다.

 

실제로 그는 신동이라는 소문을 들은 세종대왕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여 시를 지은 적도 있었을 만큼 나라를 이끌어갈 유망주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김종서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살육극을 벌인 계유정난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난 것을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불의’로 규정한 선비들은 저항의 뜻으로 은둔했다. 김시습도 이 무렵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아무리 자신의 학문이 출중하고 청운을 뜻을 품었다고는 하나, 이런 불의한 정권에서 벼슬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뒤이어 단종복위운동을 꾀하던 성삼문 등 여섯 사람이 모진 고문 끝에 처형당했고, 김시습은 이들의 주검에 손을 대지 말라는 나라의 명령을 어기고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다. 이 복위운동이 빌미가 되어 영월에 유배된 단종마저 목숨을 잃자, 김시습은 쉴 새 없이 떠돌며 가슴속 울분을 삭인다.

 

이렇게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 용장사를 주요 거처로 전국의 명산대천을 다니던 그는 자신의 꺾여버린 꿈에 대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많았다. 그깟 벼슬 안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도 꿈틀대는 출사에 대한 미련은 참으로 떨쳐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호남 지방을 유람하며 쓴 시를 엮은 《유호남록((遊湖南錄))》에 ‘성상의 교화가 흡족하고 어진 은택이 흘렀다’라는 문장으로 세조의 치적을 인정하는 듯한 문장을 쓰기도 했다. 이 부분을 유심히 읽은 효령대군의 천거로 세조가 추진한 불경 언해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법회에 참석해 세조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이쯤 되면 ‘변절’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계속되는 세조의 부름과 출사에 대한 유혹을 그는 끝내 물리친다. 세속적 욕망과 자신의 소신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던 그는 결국 은둔의 길을 선택,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한 천재로 역사에 남았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생육신이 겪었을 고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절의를 지키기 위해 꿈은 미련 없이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김시습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학식과 재주로 세상을 경영해보겠다는 꿈이 너무나 놓기 힘든 것이었다면? 오히려 단칼에 목숨을 버린 사육신보다, 살아서 그 괴리를 천천히 맛보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대와 불화했던 아까운 천재 김시습.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해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집들은 자신과 뜻이 맞는 세상을 만났다면 한 시대를 풍미했을 그의 빛나는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이 책이 묘사하는 김시습의 내밀한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가 느꼈던 갈등과 울분에 동화되어 가슴이 먹먹해진다.

 

세속적 욕망과 소신 사이의 갈등. 이 정답 없는 영원한 난제에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힘껏 답했다. 지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특히 이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