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938년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 벅은 1963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소설로 펴냈다. 《살아 있는 갈대(Living Reed)>. 사실과 상상이 잘 버무려져 있다. 주인공 김일한은 진보 개혁 사상을 품고 있다. 그는 1883년 가을 조선 첫 방미사절단(‘보빙사’)의 고문격으로 동행한 바 있어 나라 밖 세상을 본 바 있다. 그의 부친과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보수주의자들이다. 펄 벅은 일한의 부친을 눈앞에 보이듯이 잘 그려낸다.일한이 둘째 아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하러 갔을 때의 장면이다. “좋은 소식이다. 좋은 소식이야!” 노인은 소리쳤다.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웃음으로 치켜 올라가고, 얼마 안 되는 회색 수염이 그의 턱 위에서 떨린다. “네, 아이는 어제 아침나절에 났는데, 잘생겼고 튼튼하며 큰 놈보다 약간 작은 정도입니다. 외양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이의 귀를 생각하고 잠시 멈춘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재촉한다. “그 애의 왼쪽 귀가 좀 온전치 못합니다. 사소한 흠입니다만…” “김씨 가문에 흠이란 없느니라. 틀림없이 네 처가인 박씨의 혈통에서 온 것이겠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원숭환이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처참하게 죽은 것을 보노라니, 이순신 장군이 생각납니다. 이순신 장군도 왜군이 흘린 정보에 속아 넘어간 선조에 의해 죽을뻔했기 때문이지요. 1597년 1월 이중간첩으로 활약하던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 부산포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흘립니다. 이를 보고받은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부산포로 출동하여 가등청정을 잡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이게 조선 수군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허위정보라 생각하고 출동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어리석은 선조는 명령 불복종으로 이순신 장군을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여 고문을 가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백성의 신망이 높은 것을 질투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중추부사 정탁이 목숨을 걸고 상소하여 백의종군으로 그칩니다. 원숭환과 이순신 모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다가 어리석은 임금 때문에 사형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원숭환은 원숭환을 죽이라는 엄당의 아우성의 책형을 했고, 이순신은 정탁의 목숨을 건 상소와 뒤이은 류성룡, 이원익 등의 대신들의 만류로 백의종군에 그쳤습니다. 물론 동림당의 관료들은 원숭환을 살려야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이순신. 이 이름 석 자는 끊임없이 불러낸다. 불멸의 장군, 효자, 그리고 충신 … 어찌 보면 공동체가 배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인물의 전형으로, 일은 물론이고 인격 또한 나무랄 데가 없었던 ‘완벽한 인재’의 본보기다. 무엇이 이러한 완벽한 인간을 가능케 했는가. 그 배경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책이 《태교신공과 이순신》이다. 성당에서 사목 중인 김일영 신부가 쓴 이 책은 한 인간을 길러낸 뿌리, 곧 정신문화의 지혜를 다룬다. 그 비결은 첫째, 어머니 변 씨의 훌륭한 ‘자녀교육’이었다. 변 씨가 이순신을 낳기 전 꿈을 꾸었는데, 신선의 풍악 소리가 나며 붓과 칼을 든 선녀 두 명이 나타났다. 붓에는 ‘효당갈력(孝當竭力)’, 칼에는 ‘충즉진명(忠卽盡命)’이 쓰여 있었다. 효도는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은 목숨을 바칠 각오로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이정은 경건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글을 읽고 마음을 수련했고, 어머니 변 씨는 날마다 새벽기도를 드리며 마음을 정갈히 했다. 둘 사이에 낳은 아들 네 명은 모두 복희,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에서 이름을 따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이라 하였다. 네 아들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물거윤(勿巨尹) 이철(李徹)이 죽었다. (가운데 줄임) 철은 진을 치는 법에 밝고, 장기와 바둑[博奕ㆍ박혁]을 잘 두었으며, 젊어서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을 도모(圖謀)하는 것에 능하여 눈에 들더니, 마침내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항상 대궐에서 거처하였다. 그가 죽자 염빈(주검에 수의를 입혀 관에 넣어 안치함) 하는 것을 곧바로 하지 말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시 살아나기를 바람에서였다.” 이는 《세조실록》 세조 13년(1467년) 2월 11일 기록입니다. 이를 보면 세조는 바둑을 무척 좋아했음이 드러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바둑을 한자말로 ‘박혁(博奕)’ 또는 ‘기(碁)’라고 표현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수사, 충청수사, 장흥부사 등과 바둑을 두었다는 《난중일기》 기록으로 보아 이순신 장군도 바둑을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서구가 쓴 《기객소전(棋客小傳)》에 조선 후기 정운창이라는 인물이 바둑을 잘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정운창은 6년 동안 문밖에 나가지 않고 바둑만 손에 쥐면 먹고 자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고 하지요. 그는 10년을 바둑에 매진한 결과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때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73-74)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법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배가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얕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 든든한 장계를 쓴 주인공은 잘 알려진 것처럼, 성웅 이순신이다. 그는 존폐 위기에 선 조선의 수군과 마지막 남은 12척의 배로 조선 바다를 지켜냈다. 역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은 나를 알고, 적을 알고, 때를 알았던 이순신의 승부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공로의 이면에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의 빛나는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은 뜻밖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규희가 쓴 이 책,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는 무척 소중하다. 책의 부제인 ‘이순신과 류성룡의 임진왜란 이야기’가 보여주듯, 이 책은 이순신을 있게 한 ‘동네 형’ 류성룡의 역할도 비중 있게 다뤘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 남산 아래 건청동에서 함께 뛰어놀며 자란 사이였다. 건청동은 오늘날 이순신 장군의 시호 ‘충무’를 써서 ‘충무로’라 불리는 지역이다. 류성룡은 이순신에게 동네 형이자 인생 지도자였다. 이순신은 나이는 류성룡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