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순흥 교수] 2025년의 한국. 해방 80년, 을사늑약 두 갑자를 맞게 된다. 일사늑약 첫 갑자인 1965년, 박정희는 일본으로부터 그동안의 범죄에 대한 사죄는커녕 범죄사실에 대한 인정도 받지 못한 채 '한일국교정상화'라는 두 번째 을사늑약을 맺었다. 2025년, 을사늑약 두 갑자를 앞두고 다시 걱정이 앞선다. 이 정권은 무엇을 팔아넘기고 무엇을 갖다 바칠지, 물가에 아이를 둔 것처럼 조마조마하다. 임기 절반 동안 동북아역사재단,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등 역사관련 부서의 장들을 모두 친일, 뉴라이트 계열로 채워놓았을 뿐 아니라, 외교, 국방,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에 해온 행태들을 보면 우려가 더욱 깊어진다. 지난 22일 오후, 한일국교정상화(?) 60돌, 을사늑약 120돌을 앞두고, 국회의원회관에서 "한일관계 다시 본다: 정치, 문화 그리고 역사”라는 큰 틀에서, 여러 주제를 다루는 토론회가 있었다. 우리가 우려하는 정권의 속내를 다룬 주제도 있고, 우려스러운 우리 국민의 행태를 다룬 주제도 있었다. 그 가운데, ‘친일파의 명예회복(?) - 에키타이 안(안익태) 사례’를 발표한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뉴라이트가 장악한 독립기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광복절이 지났습니다. 광복은 1945년의 일이니 이제 79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에게 부끄럽게도 올해의 광복절은 정부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광복회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치렀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렇게 행사를 나뉘어서 치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치욕적인 35년의 식민 지배 세월을 보냈습니다. 식민 통치를 일본처럼 혹독하고 잔인하게, 언어까지 빼앗은 국가 말살 정책을 편 나라는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많은 독립투사가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헌신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지만 우리의 독립을 불러온 것은 안타깝게도 독립군의 무장봉기가 아니라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불리는 원자탄을 투하한 미국의 전쟁 승리 덕입니다. 그 결과로 분단과 신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지금도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삼대가 굶고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게 다가옵니다. 대체로 식민지를 겪고 독립한 나라의 지폐에는 독립투사가 한 명쯤은 표지모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독립투사들이 참으로 많은데도 지폐의 표지에 독립투사가 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원병장행가 - 이광수(가야마 미츠로) 만세 불러 그대를 보내는 이날 임금님의 군사로 떠나가는 길 우리나라 일본을 지키랍시는 황송합신 뜻받어 가는 지원병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 하면 ‘191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로 표현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광수는 〈무정〉을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126회에 걸쳐 연재하여 청년층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다음 해 1918년 단행본으로 펴내 1만 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무정의 성공으로 당시 문인으로서 그의 인기는 단연 으뜸이었고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 문인으로 꼽혔다. 그 뒤 농촌 계몽소설로 꼽히는 〈흙〉을 쓰고, 남녀의 애정을 다루고 있는 〈유정〉(1933), 〈그 여자의 일생〉(1934~35), 〈사랑〉(1938)과 함께 역사소설 〈단종애사〉(1928~29), 〈이순신〉(1931~32), 〈이차돈의 사〉(1935~36), 〈공민왕〉(1937) 등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