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김옥균은 1894년 3월 상하이에서 홍종우가 쏜 총탄에 쓰러졌다. 그 순간에도 그의 가슴 속에는 호방한 기백과 결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상하이행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일본 청년 미야자키 토오텐(宮﨑滔天)이 김옥균에게 상하이행의 위함성을 걱정하면서 동행하겠다고 하자 김옥균은 이렇게 말한다. “호랑이 소굴에 들어가지 않고서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는 없다. 청나라 이홍장은 나를 속이려 할 것이지만 나 또한 놈을 속이려고 배를 탄다. 그를 만나 내가 곧바로 죽임을 당하든가 감금되어 버린다면 만사 끝나버리겠지만, 5분이라도 담화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여하튼 문제는 한 달 안에 결판날 것이다. …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내도록 하자. 오늘 밤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 글은 미야자키 토오텐의 자서전에 들어 있다고 한다. 김옥균은 이홍장과 담판하러 호랑이 굴로 향했다. 호랑이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일까? 아시아의 나아갈 바에 대한 자신의 구상, 이름하여 ‘삼화주의(三和主義)’였다. 조선ㆍ중국ㆍ일본의 세 나라가 구미열강의 식민제국주의로부터 자주독립을 지키고 발전하기 위하여 상호 연대협력 하자는 것이다. 그는 물론
[우리문화신문=김순흥 교수] 2025년의 한국. 해방 80년, 을사늑약 두 갑자를 맞게 된다. 일사늑약 첫 갑자인 1965년, 박정희는 일본으로부터 그동안의 범죄에 대한 사죄는커녕 범죄사실에 대한 인정도 받지 못한 채 '한일국교정상화'라는 두 번째 을사늑약을 맺었다. 2025년, 을사늑약 두 갑자를 앞두고 다시 걱정이 앞선다. 이 정권은 무엇을 팔아넘기고 무엇을 갖다 바칠지, 물가에 아이를 둔 것처럼 조마조마하다. 임기 절반 동안 동북아역사재단,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등 역사관련 부서의 장들을 모두 친일, 뉴라이트 계열로 채워놓았을 뿐 아니라, 외교, 국방,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에 해온 행태들을 보면 우려가 더욱 깊어진다. 지난 22일 오후, 한일국교정상화(?) 60돌, 을사늑약 120돌을 앞두고, 국회의원회관에서 "한일관계 다시 본다: 정치, 문화 그리고 역사”라는 큰 틀에서, 여러 주제를 다루는 토론회가 있었다. 우리가 우려하는 정권의 속내를 다룬 주제도 있고, 우려스러운 우리 국민의 행태를 다룬 주제도 있었다. 그 가운데, ‘친일파의 명예회복(?) - 에키타이 안(안익태) 사례’를 발표한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뉴라이트가 장악한 독립기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광복절이 지났습니다. 광복은 1945년의 일이니 이제 79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에게 부끄럽게도 올해의 광복절은 정부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광복회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치렀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렇게 행사를 나뉘어서 치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치욕적인 35년의 식민 지배 세월을 보냈습니다. 식민 통치를 일본처럼 혹독하고 잔인하게, 언어까지 빼앗은 국가 말살 정책을 편 나라는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많은 독립투사가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헌신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지만 우리의 독립을 불러온 것은 안타깝게도 독립군의 무장봉기가 아니라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불리는 원자탄을 투하한 미국의 전쟁 승리 덕입니다. 그 결과로 분단과 신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지금도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삼대가 굶고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게 다가옵니다. 대체로 식민지를 겪고 독립한 나라의 지폐에는 독립투사가 한 명쯤은 표지모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독립투사들이 참으로 많은데도 지폐의 표지에 독립투사가 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원병장행가 - 이광수(가야마 미츠로) 만세 불러 그대를 보내는 이날 임금님의 군사로 떠나가는 길 우리나라 일본을 지키랍시는 황송합신 뜻받어 가는 지원병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 하면 ‘191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로 표현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광수는 〈무정〉을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126회에 걸쳐 연재하여 청년층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다음 해 1918년 단행본으로 펴내 1만 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무정의 성공으로 당시 문인으로서 그의 인기는 단연 으뜸이었고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 문인으로 꼽혔다. 그 뒤 농촌 계몽소설로 꼽히는 〈흙〉을 쓰고, 남녀의 애정을 다루고 있는 〈유정〉(1933), 〈그 여자의 일생〉(1934~35), 〈사랑〉(1938)과 함께 역사소설 〈단종애사〉(1928~29), 〈이순신〉(1931~32), 〈이차돈의 사〉(1935~36), 〈공민왕〉(1937) 등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