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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임시정부 마지막 비서 김정수 선생의 알 수 없는 비밀

[백년편지] 김주창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너의 아버지, 북한에 여러 번 밀파된 것 아냐?”

내 선친 남파 김정수 공과 같이 마지막 임시정부 경교장에서 비서를 하시던 오악환 선생께서 나에게 물었다. “너의 아버지, 경교장에 있을 때 김구 선생이 북한에 여러 번 염탐을 보낸 것을 모르고 있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네”

내 선친께서 비밀로 해 오던 것을 친구이시며 황해도 고향 아저씨께서 토로해서 알았다. 내 선친이 자식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일부러 꺼내신 것이다. 선친은 “내가 경교장에 있을 때 김구 선생과 늘 겸상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내 뿌리에 의심이 갈 때마다 선친께 단도직입적으로 묻곤 했다. 그 때마다 내 선친은 단답형으로 대답하셨다.

“김구 선생의 심부름으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안중근 의사 댁을 들렀다가 왔다.”

간결했다. 내가 어렸을 때 선친께서 경찰서에 구류를 당했고 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음력 10월 28일 큰 아버지 김영수 공 생신 때 꼭 잔치를 여셨는데 내 선친을 세 번 살려주신 음덕에 대한 보답이었다. 북한에 염탐을 가서도 죽을 고비가 있으셨는가 보다.

 

   
▲ 1977년 백범(김구)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김정수 공, 뒷줄 오른쪽 끝)

3년 전, 나는 대만 9년 중국 13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우연히 검색 창에 ‘김구 김유술’을 쳤다. 놀랍게도 내 조부께서 조선 말 경복궁 도끼상소와 의병 투쟁으로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한 화서학파 고석노 선생의 제자라고 나온다. ‘김구, 안중근, 김유술’ 세 분이 안태훈 씨(안중근 부친) 집에 초빙된 고 선생에게 의리 사상을 전수받으며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선친께서 ‘남북 이산가족 찾기’에 신청하셨다. 그 후 중국 연변에 직접 가서 사람을 사서 고향에 보냈다. 고향에서 친척을 찾았다. 그 증표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고향의 빛바랜 사진에는 빡빡머리를 한 어른이 계셨다. 나는 또 물었다.

“막 평양 감옥에서 출소하셨다.”

나는 내 조부께서 독립 운동에 참여하신 것도 몰랐다. “만주의 김동삼 장군 밑에서 군 서무를 보셨는데 군자금을 걷으러 국내 잠입을 하다가 잡히셨다.”고 했다. 놀라서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 선우진 비서, 김신 대만대사(백범 둘째아들), 남파 김정수 공(오른쪽 끝)

선친께서 승천을 한 후 나는 김구 선생 비서이셨던 선우진 선생에게 물었다. “아저씨, 우리 집은 왜 독립 유공자가 아닌가요?” 낙담하시며 “너의 아버지한테 신청하라고 했지. 그런데 남한 단독 정부에서는 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 때는 독립 유공자 세 명이 서명하고 추천하면 되었는데 말이야”.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내 고조부 김익룡 공께서 안태훈 씨와 해주 의병을 도모하다 잡히셔서 일본 헌병에게 매를 맞아 봉사가 되셨다. 그 후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일본어와 일본 물건은 내 집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조부께서는 사랑방 손님 중에 일본 신발을 신고 왔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몰래 손으로 더듬거려 그것을 불 아궁이에 넣으셨다고 한다. 당시 우리 집은 호적을 신고하지 않아 무국적자가 되었다.

집안은 먹고 살 것이 없고 가난하여 바람벽에 신문지도 붙이지 못해 연기가 숭숭 나왔다고 한다. 선친은 일본 신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며 집안에서 한문만 배웠다. 두뇌가 특출하셔서 무엇이든 한번 본 것은 외우셨다. 그러니 김구 선생께서 북한에 밀파를 보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하얀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머리까지 치렁치렁 딴 총각머리 청년이니 그 때도 누가 염탐꾼으로 의심을 했겠는가?

고향 떠나 피붙이 없는 곳에서 선친은 김구 선생을 아버지로 모셨다. 6월 26일 김구 선생 기일엔 어떤 일이 있어도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백범 산소에 가신다. 그 때 내가 동행했다.
 

   
 

김 주 창

1955년 2월 16일 출생
남파 김정수의 아드님
단국대학교 철학과 부교수
중국 북경대학교 철학박사
대만 중국문화대학교 문학박사
중국 화중사범대학교 교수(부학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