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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공을 세운 -인오선사-

선사들의 시 감상 2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남쪽지방 모두 도적 칼에 빼앗겨

고깃덩이 된 백성 그 참상 어떠하랴

임금 수레 사령을 넘은 뒤

10년의 선창(禪窓)에서 가슴만 치다


이는 ‘임진년 여름’이란 시로 인오선사(印悟禪師, 1548~1623)가 임진왜란 때 지은 노래다. 인오선사는 32살 때 묘향산에서 서산대사를 모셨다. 때마침 왕명으로 서산대사가 의병을 모으자 인오선사도 승병장이 되어 3년 동안 공을 세웠다.


경(經)을 봄이 참 깨달음이 아니요

잠잠히 지킴도 헛된 수고

가을하늘 바다처럼 맑으면

둥구렷 달무리 외로워


인오선사는 어디에도 집착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국난을 보고 가슴만 칠 수가 없어 몸소 전란에 뛰어 든 것이다. 호가 청매(靑梅)인 인오선사는 《청매집》을 남겼는데 그 서문은 조선 중기의 대문장가 이정구(李廷龜, 1564~ 1635) 선생이 썼다. 월사 이정구 선생은 인오선사를 처음 본 인상을 다음과 같이 썼다.






“월명사는 산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인오 노스님이 나를 절로 인도하여 함께 갔다. 거처나 책상, 향로 등이 너무도 청초하여 속세를 떠난 듯 바로 서천세계로구나 하고 놀랐다. 서가에 가득한 경전들의 앞면에 쓴 제목 글씨가 모두 자신의 친필인데 바른 서법이 글자마다 감상할 만 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노라니 그 풍기는 풍류와 막힘이 없는 말이 사람을 매혹케 하여 저절로 이끌렸다. 시는 결코 남의 말을 답습함이 없으니 속세 사람들의 언어가 아니었다. 내 한번 보고는 정이 쏠려 방외(方外)의 사귐으로 삼아 이별하면서도 무엇을 잃은 듯 섭섭하였다.”


조선의 4대문장가인 월사 이정구 선생이라면 당대 최고의 학자이다. 그런 그가 사대부 처지에서 승려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 터인데 인오선사에 대해 감동했다는 글을 남긴 것을 보면 당시 인오선사의 법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오선사의 법력은 선(禪)에서 비롯된 것이다.


벼슬길 세상은 세월이 바빠

풍진 속 좇다가 밝은 얼굴 쇠했네

누가 알랴 늙어 깨달음이 없으면

인간 세상에 누워 바깥 산만 꿈꾸지


인오선사의《청매집》에 실린 ‘박지평’ 이란 인물에게 보내는 시에서 인오선사의 선지 (禪旨)를 느낄 수 있다. 그림에도 뛰어난 인오선사는 광해군 때 왕명으로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서산 휴정, 부휴 선수의 오대 선사들의 영정을 그렸다. 지리산 연곡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전한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