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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돌 맞이한 한글학회, 겨레의 말과 글을 지켜오다

김슬옹의 세종한글 이야기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 세종문화회관 뒤쪽에 있는 주시경 마당에서 가까운 곳에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세운 조선어학회 곧 지금의 한글학회(회장 권재일, 이사장 김종택)가 있다. 조선어학회는 원래 3호선 안국역 근처에 있었는데 광복 뒤 이곳으로 이사 왔다. 원래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한 분이신 애산 이인 선생이 많은 돈을 기증하고 국민 모금과 정부 후원으로 1977년에 지금 건물을 지은 것이다.

 

학회 앞에는 주시경 선생의 가슴상과 이 학회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얼말글 새김돌이 학회의 뿌리와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바로 한글학회는 어렵고 힘든 시기에 한글을 지키고 가꿔온 사람들이 세운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회이기도 하다. 1908831일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지금의 연세대 옆 안산에 자리 잡고 있는 봉원사에 모여 우리 말글 연구를 통해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가꾸자고 국어연구학회(회장, 김정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글학회의 뿌리다. 무려 100년이 넘은 가장 오래된 학회로 봉원사에 가면 그것을 기념하는 새김돌을 세워놓았다.

 

안타깝게도 주시경 선생은 191439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했지만 그 제자들이 뜻을 이었다. 192112월 임경재, 최두선, 장지영, 권덕규 등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다.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바뀌었다가, 19499월 지금의 명칭인 한글학회로 자리 잡았다.

 

창립 초기부터 단순히 국어학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한글을 통해 민족 사상을 드높였다. 1926년에 가갸날을 정하고 1928년부터 한글날로 바꿔 매년 기념식을 열었고,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다, 1931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한글맞춤법통일안(1933),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통일안(1941) 등을 내놓으며 일제강점기 그 어려운 시기에 한글 보급과 연구에 힘을 쏟았다.



조선어학회는 나라를 잃기 2년 전인 1908831일 서울 봉원사에서 "말과 글은 홀로 서는 나라 됨의 특별한 빛"이므로 말글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그래서 봉원사에 가면 그것을 기념하는 새김돌을 다음과 같은 글귀로 새겨 놓았다.

 

“1908831일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우리말과 우리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우리 얼말글을 지키고 널리 펴려는 선각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 모임인 국어연구학회가 개회의 요람기인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열게 됨으로써 배달말글몯음(1911)-> 한글모(1913)->조선어연구회(1921)->조선어학회(1931)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 한글학회(1949)의 터전이 되었다. 2009831일 학회 창립 100돌을 맞아 이 곳 봉원사에 표지석을 세워 한글학회가 처음 시작한 곳임을 길이 남기고자 한다. _2008831,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


 

한글학회가 100년이 넘는 학회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1908년 일제가 우리나라 주권을 강탈하기 전으로 고종 황제 때 주시경 선생님으로부터 국어 강습을 받은 제자들이 만든 것이다. 주시경 선생은 1876년생으로 20대 중반 무렵부터 국어강습회를 여기저기 열었다. 조선 시대 내내 한글을 공적으로 가르친 적이 없어 사실 한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주시경 선생이 주로 한글과 우리말을 가르치던 데가 상동교회로 남대문 근처에 지금도 남아 있다.

 

그때 배웠던 1기 졸업생이 19078월에 졸업했고 2기 졸업생이 19088월에 졸업을 하면서 1기 졸업생들과 함께 주시경 선생을 모시고 의기투합하여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바로 그 장소가 서대문 연세대학교 옆에 있는 안산의 봉원사로 새절이라고도 불렀다. 창립한 지 2년 있다가 일본한테 우리 주권을 빼앗겼다. 그나마 1909학회에서 제1국어강습소”(중등과)를 만들어 주시경 선생이 직접 강의하여 졸업생 20명을 배출했고 1910년부터 1911년에는 2회 국어강습소를 운영하여 졸업생 51명을 배출했다.

 

1911년에는 학회 이름을 배달말글몯음(朝鮮言文會)”으로 바꾸고, 국어강습소도 조선어강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넓혀 1912년 조선어강습원 제1회 중등과를 운영하여 126명이 배웠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조선어강습원 제1회 고등과는 33, 2회 중등과는 38명을 키웠다. 그리고 1913년 학회 이름을 한글모로 바꿨다. 이어서 19144월에는 조선어강습원을 한글배곧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3개월쯤 뒤인 727일 주시경 선생이 망명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운명한 것이다.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도 한글배곧(조선어강습원)은 계속 이어지다가 1919(大正 8) 가을 조선어연구회로 학회 활동 다시 시작하였고(주임간사: 이 병기. 사무실: 경성부 원동 휘문고등보통학교 내) 1921년 조선어연구회의 조직 확대 발기회를 열어 임경재를 간사장(회장)으로 뽑았으며, 1923년에는 훈민정음 창제’ 8번째 회갑 기념식을 열면서 활동을 넓혀갔다.

 

1927년에는 동인지 한글(월간) 첫호를 펴내고(정식 월간지는 1932년 창간호) 19284월 증구 수표동 42번지의 조선교육협회 회관(일명 수표동 회관)으로 사무실 옮겼으며, 1111(음력 9/29) “가갸날한글날로 고쳤다.

 

일제강점기 때는 우리가 국어라는 이름을 쓸 수가 없었다. 국어는 일본어였기 때문이다. 우리 주권이 없으니까 조선어는 하루아침에 외국어로 전락해 명맥을 겨우 유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국어연구학회가 없어지진 않았는데 학회 이름을 타의로 국어연구학회에서 조선어연구회로 바꿨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 연구 활동이 만만치 않았다.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면 조선어가 없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과 글자를 잃으면 만주 사람들처럼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조선어연구회에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게 바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걸 주도하신 분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맡았던 이극로 선생이다.

 

1931년 조선어연구회가 다시 조선어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어학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조선어학회에 가장 큰 사업으로 큰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사전은 조선말을 다 모아 담는 곳간 같은 것이므로 조선말이 사라지기전에 곳간에 다 담아놓듯 사전을 만들어 놔야 우리 독립이 언제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라도 독립되면 우리 후손들이 조선을 되찾을 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말만 쓰고 있는 현재는 그래서 사전을 펴낸 것이다. 아슬아슬하게도 1936년 표준말 모음을 마무리한 뒤 2년 뒤 일제는 1938년에는 우리말 사용과 교육을 금지시켰고 1940년에는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했다.

 

일본사람들이 볼 때는 조서어학회를 불온단체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꼬투리 잡으려고 하다가 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정태진을 검거하여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을 한다는 죄목으로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조선어학회 학자들 33명을 반정부 곧 조선총독부에 반하는 불온세력으로 규정을 해 다 잡아갔다.

 

1942101일인데 우리 역사책에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안타깝게도 이윤재, 한징 두 분이 옥사하고 나머지 분들은 광복이 돼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풀려나신 그 분들이 다시 주동이 되서 조선어학회를 재건했다. 정권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북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해버리니까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을 더 쓰기가 힘들어졌고 임시총회를 열어서 1949년 이름을 바꿨는데 그때 한글학회로 최종 결정되었다.


조선어학회가 처음 있던 곳은 종로구 화동인데 정독도서관 올라가는 쪽에 그 옛날 있던 사무실 터가 있다. 그러다가 1958년 지금 자리로 옮겨 현재 이 자리에 이 건물을 지은 것이 1977년이다.


 

1908년 창립할 때 국어 연구, 보급 그 학술단체에 기본적인 목적 더하여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자 하는 선대들의 정신까지도 이어받아 현재 한글학회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가 되고 일을 하는 목적이 되었다. 이름은 한글학회지만 오로지 한글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의 연구와 보급을 하는 그런 학회다. 한글학회는 일제 말기에 중단되었던 조선말 큰사전편찬을 해방 후 재개하여 19576권으로 모두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