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우리 시대의 위대한 금서(禁書)이며 근대문학의 거탑 <임꺽정>의 작가이자 독립운동의 선두에 서고 남북통일을 갈구한 민족사의 큰 어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선생은 제가 닮고 싶은 선각자입니다.
“내 아들아, 너희는 어떻게 하나 조선 사람으로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국치를 당한 1910년 8월 29일에 자결한 아버지 홍범식 선생의 고결한 정신을 이어받은 그 절개는 암울한 시대의 횃불이었습니다.

삼년상을 마치고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단재 신채호, 조소앙, 창강 김택영, 예관 신규식 등과 조선독립을 위해 정진하셨습니다. 그 당시 창강 선생께서 집필하신 <홍범식전>에는 “외모는 비록 온순하나 내심은 실로 강개막측하였으니 이는 아마 노상에서 굶어 죽을지언정 차마 원수놈의 나라에서 밥을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벽초 선생을 평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
그 말씀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이 글을 사뢰어 올리는 이 순간에도 선생께서는 나라 걱정에 승천하지 못하고 통일이 되기를 갈망하며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북한의 부수상이자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내시던 1952년 1월 13일에 병환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병석에서 일어나 “통일을 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절박한 심정이 살아나게 한 이유”라고 하셨습니다. 이 어찌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사에 큰 가르침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신문학을 이끈 선구자인 ‘삼천재’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던 벽초 선생의 유일한 미완의 장편소설 <임꺽정>은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였기에 그 시대의 문학도들이 은밀히 읽고 감동받으면서, 우리 문학 초유의 걸작이며 조선말 어휘의 노다지라는 찬사를 실감했습니다. 문학도들이 남몰래 탐독하는 짜릿한 쾌감은 누가 뭐라 하든 위대한 민족유산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임꺽정>은 1928년 11월 2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했지만, 병고와 감옥살이로 연재를 중단하는 우여곡절 끝에 햇수로 13년 동안 게재되면서 백성의 염원을 풀어주었습니다. 일제의 엄혹한 협박과 강압에도 선생의 정신은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임꺽정>과 함께 추천도서로 꼽는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 선생과 상호 공경하던 모습도, 저는 부러웠습니다. 일생 동안 서로 존중했으며 단재 선생께서 옥사했을 때 쓰신 글을 읽으며 올곧은 학문과 선비정신과 뜨거운 민족애와 선각자의 정신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세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바른 길을 걸으려고 뒤뚱거릴 때마다 벽초 선생을 닮아보려고 억척스럽게 살아본 적이 있습니다. 마음에 티끌이 묻을 때마다 참회 기도를 하며 선각자의 삶에 경외심을 가졌습니다. 배움을 놓지 않으려고 안달을 했고, 마음을 곧추세우려고 정진기도를 했으며, 평화통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평화재단의 일꾼으로, 통일의병 대표로 활동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저는, 벽초 선생과 함께 조선 삼재로 평가받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걸출한 조선의 선비들이 어찌하여 민족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는지 탄식하며 벽초 선생을 더욱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벽초 선생처럼 살고 싶은 욕심에 현대판 <임꺽정>을 집필하려고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엄혹한 감시와 검열에 맞서 <인간시장>을 썼습니다. 계엄 치하의 검열관들은 제 소설 <인간시장>을 그들의 입맛대로 손질을 했습니다. 협박과 공갈에 붓을 꺾으려고 했지만, 제 가슴 속의 ‘벽초 정신’은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쓴 <인간시장>은 출간 1달 반 만에 10만부 판매를 돌파했고 2년여 만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100만부를 돌파하여 제가 최초의 밀리언셀러 작가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벽초 선생의 문필을 흉내낼 수 없었지만, 한 시대를 흔든 선생의 정신만은 이어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의 역사 인식과 민족사적 거대담론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다졌습니다.
2004년 후반부터 3년여에 걸쳐, 잃어버린 발해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김홍신의 대발해>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200자 원고지 1만2천 장을 만년필로 꾹꾹 눌러 썼습니다. 우리 문학의 최대 수확이며 조선어의 보고로 평가받은 <임꺽정>을 따라가겠습니까마는, 비재(非才)한 제 능력이나마 영육을 바쳐 벽초 선생의 정신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선생께서 1919년 3월 1일 기미(己未)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조선독립선언서를 만들고 18일 밤부터 등사판으로 수백 장의 유인물을 만들어 19일에 충북지역 최초로 괴산 만세시위를 주도하자 곧 충북지역 곳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 당시 복심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그 선언서의 내용은 ‘대담하게도 최후의 일인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를 고취하는 문서’였다고 했습니다.
선생은 3월 24일 왜경에 체포되어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2년6개월 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신채호, 안재홍, 한용운 선생 등과 만든 신간회의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2년 넘게 옥살이를 하여 소설연재 중단은 물론 지친 몸으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선생의 진정한 민족애와 국권 회복에 대한 열정은 독립운동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선생께서 꿈꾸던 해방의 기쁨을 맛볼 때 이미 58세였고, 수많은 선비들과 동지들이 일제의 압제와 협박에 굴복해 변절하거나 친일부역자가 되었으나, 선생께선 해방의 감격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맞이한 우리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민족주의자인 벽초 선생께선 오롯이 통일 한국을 수립하자는 민족애로 여러 차례 평양을 오가며 남북협상을 주도했지만, 남한의 친일세력이 강화되어 더이상 서울로 돌아올 수 없는 지경이 되자 환갑되던 해에 북한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임꺽정>과 벽초 선생은 남북역사에서 지워지게 됩니다.
1968년 3월 5일 80세의 일기로 벽초 선생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선생께서 그리도 간절하게 바라고 기도했던 통일의 그날이 오면 민족의 문학사는 물론 독립운동사와 조선의 참 선비 정신이 반드시 새로 쓰일 것을 확신합니다. 선생의 존엄한 정신이 결코 지워지지 않고 빛을 발할 것이니, 편안히 웃으시며 천상에 오르시옵소서.
기미(己未) 만세시위 100주년
후학 김홍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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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명희(洪命憙, 1888~?)
충북 괴산 출생의 문호(文豪)이자 독립운동가. 일본 유학 뒤 오산학교와 휘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사 사장으로 활동했다. 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일조직 신간회(新幹會) 창립에 산파 역할을 맡았고,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를 집행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문화예술계의 일제 잔재 청산에 진력했으며,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북한에서 부수상 등을 지냈다. 민족․민중문학의 위대한 유산으로 평가받는 대하소설 <임꺽정>을 집필했다. 호는 벽초(碧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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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홍 신
장편 <풍객>으로 제12회 한국소설문학상(1986), 장편 <내륙풍>으로 제6회 소설문학작품상
(1987), 제52회 한국문학상(2015)을 수상했다. 건국대 문학박사. 제15․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동아일보-경실련 공동평가 16대 국회 의정평가 전체 1위에 선정됐다. 민화협 집행위원장, 평화재단 이사, 통일의병 대표 등을 맡아 활동했다. 다수의 소설집과 수필집, 역서 <삼국지> 등 130여 권의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