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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벗어야 하는 이유가......

마지막 잎새, 또 다른 생명을 위한 준비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74]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이 아름다운 싯귀는 시인 나희덕이 11월에 부쳐 쓴 작품이다. 겨울을 재촉하는 강한 바람에 마지막 매달려 있던 나뭇잎마저 뜯겨 날려 가는 계절을 짧은 글로 나타내고 있다. 계절은 나희덕이 그린 11월을 넘어서 12월로 접어들었다. "어허 벌써 올해도 마지막 달로 접어들었단 말인가?" 이런 탄식이 사람들의 입에서 줄을 잇는 그런 사이에 아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공원의 나무들은 게으른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계절의 위력에 순응이라도 하려는 듯 마지막 잎까지 날려버릴 준비를 다 하고 있다. "명령만 내리세요, 겨울님!" 그들은 더는 동장군의 위력에 저항할 의지도 버린 모양이다.

 

 

그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며 나는 미국작가 오 헨리의 단편소설보다는 더 마음이 댕기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가수 배호가 부른 같은 이름의 노래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 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그런데 이 멋진 노래의 노랫말은 포항출신의 정문(본명은 정귀문) 씨가 만들었다. 학창시절 교장선생님의 딸을 좋아했는데, 교정에서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낙엽을 보며 이런 시구를 만들었다고 하니 일찍부터 감수성과 재능이 뛰어나셨던 모양이다.

 

이 노랫말은 1절뿐 아니라 2절도 좋다.​​

 

싸늘히 부는 바람 가슴을 파고들어

오가는 발길도 끊어진 거리

애타게 부르며 서로 찾을걸

어~이해 보내고 참았던 눈물인데

흐느끼며 길 떠나는 마지막 잎새

 

(일반적으로 첫머리에 '싸늘히 파고드는'으로 노래방 기계에 뜨는 것은 잘못이다.

싸늘히 부는 바람이 맞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요즈음 퇴근길에 찬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느끼는 그 감정 그대로가 아니던가? 원래 가사는 어느 소녀에게 보내는 연정을 담았다고 하는데 그 상황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노랫말은 일류 시(詩)작품 못지않다. 때때로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시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는 물론 그것 그대로 명작이다. 어릴 때 그 단편을 읽고 마지막에 밀려오는 답답함에 한숨을 쉬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라! 그러기에 그런 감동이 중국에 이어져서 언젠가 길림성 장춘(長春: 창춘)시에서는 뇌종양 말기의 한 소녀를 위해 마치 천안문 광장에서 중국의 국기를 게양하는 양 연극을 해 준 사건의 제목이 "중국판 '마지막 잎새'"라고 명명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 헨리의 소설에서 보이는 마지막 잎새는 너무나 서양적이고 처절하다. 왜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종결로 보는 것일까?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이 정녕 그대로 세상이 끝나는 것밖에는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서양식의 직선적 우주관 대신에 동양의 순환적 우주관을 생각해내지 않을 수 없다. 서양식으로 생각하면 봄은 탄생이고 여름은 성장이고 가을은 결실이고 겨울은 소멸이다. 그러나 동양식으로 생각하면 봄이 탄생이고 여름이 성장이고 가을은 결실이지만 겨울은 소멸이 아니라 저장, 비축이다. 곧 또 다른 봄의 탄생을 위한 저장과 비축인 것이다.

 

유명한 천자문의 머리처럼 더위가 가고 추위가 오며(寒來暑往), 가을엔 거두고 겨울엔 갈무린다(秋收冬藏). 그러기에 늦가을에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는 그것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을 위한 준비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 마지막 잎새는 전혀 슬픈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쁨의 준비인 것이다. 왜 이 '위대한' 낙엽이 슬픔의 대명사가 되어야 하는가? 왜 이 우주의 당연한 질서가 마지막의 여정이 되어야 하는가?​

 

12월, 나뭇가지에 달린 나뭇잎들이 이제 별로 없어진 이 계절에 땅위에 떨어져 썩어 가는 나뭇잎들을 보며 나는 오히려 더 즐겁고 맑다. 자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또 다른 생명들이 잉태되는구나. 그 생명들이 다시 태어나서 우리를 즐겁게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준비를 위한 이 낙엽들은 얼마나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가?​

 

천지(天地) 사이에 있는 존재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초목이 처음 나와 싹을 틔웠다가 줄기와 가지로 바뀌고 다시 꽃과 열매로 바뀌며 또 누렇게 낙엽이 지고 마는데, 모든 생명은 이처럼 자체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초겨울의 낙엽들은, 우리에게 바로 그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곧 버려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여름 무성했으면 이제 다른 탄생을 위해 그 옷을 벗어버리고 스스로가 거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서울시내 어디에나 조성된 공원과 나무들이 그 변함없는 이치(哲理)를 말없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마지막 잎새가 차디찬 바람에 뜯겨 나가는 그 계절이 아픔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희망과 기쁨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자신의 옷을 벗어버리는 위대한 나무들의 가르침을 느끼고 알 수 있는 이들에게는 요즈음 많은 곳에 조성된 공원, 혹은 길거리의 나목(裸木)들이 든든한 지지자가 되는 것이리라.​

 

모든 권력에 4년이건 5년이건 주기를 둔 것도 바로 그런 뜻이리라. 영원히 나 혼자만 가지려는 권력은 곧 욕심이자 패망의 지름길이다. 자식이나 자기 패거리만 그것을 독점하는 법은 없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그런 욕심은 사회의 거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중에 날아가는 흙먼지가 되는 것이다.

 

우주에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있듯이, 그 겨울이란 것이 끝이 아니라 봄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위대한 포기'이듯이 권력도 버릴 각오를 할 때 모두를 위한 참된 권력이 된다. 벗음은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라는 것, 그래서 벗음과 버림을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겨울의 벌거벗은 나무들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