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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일본 왕궁 앞에서 폭탄을 던진, 추강 김지섭

유교문화에서 꽃피운 경북인의 독립운동-⑥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 한국국학진흥원’ 독립운동 공동 홍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격렬한 투쟁성을 지녔던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나라가 일제에 의해 무너지기 전부터 대대적으로 일어난 의병전쟁 등이 있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만주 등지로 망명한 독립투사들에 의해 독립군 항쟁으로 발전하는 등 해방되기까지 꾸준히 무장독립투쟁의 맥을 이어갔다.

 

이 가운데 단연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의열투쟁이다. 이는 자신의 생명을 던져 온 인류에게 자유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 독립의 대의를 밝히려는 목적으로 일어난 무력적 투쟁이다. 이러한 인류공영의 투철한 목적성을 토대로 진행된 의열투쟁이 단순히 개인 또는 일부 집단의 사적 이익을 도모하고자 자행한 테러와 명확히 구분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경북 안동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난 추강(秋岡) 김지섭(金祉燮, 1884~1928) 선생은 거의 반평생을 민족의 해방을 위한 의열투쟁에 헌신한 독립투사였다. 그는 팔련오계(八蓮五桂)로 유명한 풍산김씨 오미마을의 명문가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집안 숙부인 운재(雲齋) 김병황(金秉璜, 1845~1914)에게 한학을 공부했다.

 

 

김병황은 당시 한학자로서 명망이 높았고, 의병이 일어날 당시 풍산김씨 문중을 대표하여 의병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의 맏아들인 김정섭(金鼎燮, 1862~1934)은 을미ㆍ병신년 당시 의병 활동에 관해 기록한 《일록》의 저자이기도 하다. 또한, 김지섭의 일생에 많은 영향을 준 김응섭(金應燮, 1878~1957)의 생가 부친이기도 하다. 김지섭은 유년기부터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퇴계학의 전통과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전쟁으로 표출되었던 유학의 실천정신을 꾸준히 익혀왔다.

 

그는 1907년 이후 구국계몽운동에 헌신하며 상주보통학교 부교원을 지내기도 하고 교남교육회에 참가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1909년 대한제국 재판소 번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전주구 재판소 번역관보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대한제국 법부가 폐지되고 통감부 사법청이 개설되어 금산구 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로 이직하게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금산군수 홍범식(벽초 홍명희의 부친)이 자결하는 상황을 겪으며,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들게 되었다.

 

1915년 김응섭의 변호사 사무소에서 서기로 근무하면서, 김응섭 등이 대구에서 결성한 비밀결사 단체 조선국권회복단 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면서, 같은 해 의열단에 가입하는 등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도쿄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질 것을 계획하고 상해에서 도쿄로 잠입하던 도중, 이 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일본 왕궁을 폭파하기로 결심하여 결국 이중교(二重橋)에서 폭탄을 투척한 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25년 5월에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7년 20년 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이듬해 결국 의문의 옥사로 순국하였다. 반제국주의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이에 대한 실천 방략으로 의열투쟁을 선택한 김지섭의 의거는 일제의 한인 동포 학살에 대한 민족적 응징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주범인 일왕의 권위를 부정했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오늘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

지난 몇 해를 와신상담한 사람인가

이미 정한 이 걸음 평생의 뜻이기에

다시금 고향 돌아갈 길 묻지 않으리

 

                    - 상해에서 동경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읊은 시 가운데 -

 

학계에서는 그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일련의 연구가 꾸준히 펼쳐졌는데,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기념관)에서는 앞서 그에 관한 인물총서 시리즈 6권 《일왕 궁성을 겨눈 민족혼 김지섭》(김용달 저, 2011)과 자료총서 시리즈 6권 《추강 김지섭》(2014)의 2책을 발간하여 그간 수집된 자료와 연구를 종합하였다.

 

또한, 기념관의 상설전시실에는 그와 관련한 일련의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김지섭의 독립운동 활동에 관하여, 1920년 이후 행적을 제3자의 눈으로 서술한 중요 자료도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에는 앞서 언급한 김지섭의 집안 형제인 김정섭이 남긴 일기자료(가재 《김정섭일록》)가 있다. 이는 김정섭을 중심으로 집안 및 지역사회의 단편적인 사건, 보고들은 일상 등에 관해 기록한 생활일기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집안 아우인 김지섭에 관한 내용도 간혹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1923년 12월(음)의 기록부터는 일제가 김지섭과 관련하여 집안 등을 조사하는 등의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진 사건에 관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기록해 두었다.

 

ㆍ1923년 12월 26일(양력 1924년 1월 31일)

“일전에 편지를 통해 지섭이 양력 1월 5일에 일본 궁성의 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져 대정제(大正帝) 부자의 폭사를 꾀했다가 …(중략)… 이는 극비사항이라 결국 신문에 나지 않았다.”

 

ㆍ1924년 1월 4일(양력 1924년 2월 8일)

“저녁에 들으니, 지섭이 과연 1월 5일에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져 곧바로 체포되었고, 감옥에 갇힌지 달포 남짓 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옥중에서 그의 아우 희섭에게 편지를 부쳐서 ……(하략)”

 

위의 내용을 통해 당시 일제는 김지섭의 의거가 가지는 상징성을 극구 부인하고 사건을 은폐ㆍ축소하려고 했던 상황이었음을 실증할 수 있다.

 

집안 형님인 김정섭은 김지섭에 대해 “형경(荊卿)과 같은 담대한 남아가 이후에도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라고 하며 그의 의기를 칭찬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위기에 기꺼이 헌신했던 집안 아우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념관과 진흥원은 이러한 자료의 내용들을 활용하여 ‘유교문화에서 꽃피운 경북인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의 여섯 번째 공동홍보물 “일본 왕궁 앞에서 폭탄을 던진, 추강 김지섭”을 기획하였다. 이는 카드뉴스 형태의 홍보물로 제작되어 블로그ㆍSNS 등 양 기관의 공식 온라인 홍보채널에 소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