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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봄을 붙들어 맬 수 없다면

봄날은 가지만 아직 단오가 남았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0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올봄처럼 비가 자주 온 해도 없었을 것이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어김없이 밤새 비가 온 흔적이 역력하고 낮이 되어서 잠깐 해가 나다가 밤이 되면 다시 어느새 빗방울이 뿌리는 날씨가 아마도 5월 한 달 내내 이어진 것 같고, 6월 들어 좀 바뀔까 해도 역시 또 그런 날씨가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정작 가장 좋은 봄의 핵심인 5월을, 그러지 않아도 코로나19인지 뭐 때문에 출입과 사람 만나는 것이 제약을 받은 상황에서, 정말 가족, 친지, 친구들과 마음껏 회포도 풀지 못하고 이 좋은 봄을 그대로 보낸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봄을 보낸 이유가 우리와는 다르다 해도 봄을 덧없이 보내는 데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고금이 같은 것일까? 고려 최대의 시인인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도 '봄을 보내며(送春)'라는 시에서 비슷한 감상을 남겼다(동국이상국후집 제3권 / 고율시(古律詩) ​

 

春去去能不悲    봄이 가려 하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非爾負吾吾負爾 네가 날 저버렸나 아니 내가 널 저버렸네

適我病中遭汝來 마침 병중에 너를 맞아서

未肯對花成一醉​ 꽃을 대해 한 번쯤 취해 보지도 못하였네

 

그래서 내년에 올 때는 늙은 것은 가져오지 말고 젊은 것을 가져오란다.​

 

好去明年更相見 잘 가게나 명년에 다시 만날 때에는

莫把老來將少至 늙음일랑 버려두고 젊음을 가져오소

 

 

봄이란 계절을 즐기는 것이 시인들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니지만 시인들의 감수성이 두드러지니 우리가 느끼는 감성의 몇 배를 표현해낸다. 그런 시인으로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중국 당나라 때의 이백(李白 701~762)은 '남은 봄을 아쉬워하는 노래(惜餘春賦)'를 지어 너무나 빨리 강물처럼 지나가는 봄을 원망하면서​

 

醉愁心於垂楊     취해서 서글픈 마음 버드나무에 걸어

隨柔條以糾結     나뭇가지 마다에 묶어놓고자

望夫君兮興谘嗟  그대를 보며 다시 탄식하고

橫涕淚兮怨春華  눈물로서 이 화려한 짧은 봄을 원망한다.

遙寄影於明月     허리 들어 밝은 달 비춰보며

送夫君於天涯     그대를 이제 하늘끝으로 보낸다.​

 

라며 남은 봄이 빨리 지나감을 눈물로 작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독백에 대해 조선후기의 뛰어난 시인인 박은(朴誾 1479년~1504)이 반기를 들었다. 본래 호방한 사람으로 알려진 이백이 어찌 봄이 간다고 이렇게 쩨쩨하게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을 보이느냐고 일갈을 한 뒤에 이백이 쓴 운(韻)을 살려서 시를 지었는데

 

春兮堂堂              봄이여 당당하구나

來旣不識其誰使兮 올 때 누가 시켜서 오겠는가

去又向之何方        갈 때도 어디로 가는 것인가

曾不足以少留兮     조금도 더 머물려 하지 않으니

竊獨悲此群芳        향기로운 이 꽃들이 시드는 게 슬프구나​

 

汀有蘭兮佩結    물가의 난초를 얻어 허리춤에 매고

石有蒲兮帶剪    창포를 잘라서 허리에 띠로 맨다

臨千尺之幽潭兮 천 길 깊은 연못을 굽어보노니

恨孰與之深淺    봄을 보내는 나의 한이 이 못물보다 더 깊으리라

 

                         ... (읍취헌유고 제1권 / 부(賦) '이백(李白)의 석여춘부(惜餘春賦)에 차운하다')​

 

라며 봄의 정경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을 전한다. 이 구절은 단오 때 우리 옛사람들이 "냇가에 자라는 창포(菖蒲)를 술에 띄우며, 아이들은 쑥으로 머리를 감고 창포로 띠를 하며, 또 창포 뿌리를 뽑아 수염처럼 붙였다."라는 《용재총화(慵齋叢話)》의 묘사 그대로다.

 

 

그런데 박은이 굳이 이백의 이 봄의 탄식을 시의 소재로 삼은 것은 그다음 말을 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라는 것, 계절이라는 것, 세상이라는 것은 태어나고 자라고 죽고 하는 것의 반복일 뿐인데

 

春以生兮夏以長        봄에 생겨나서 여름에는 자라며

秋成冬實兮物繽紛     가을 겨울에 결실 보는 등 만물이 그렇게 분분하고요

成功而迭謝兮           철 따라 이루어지면 또 바뀌어 가면서

若在空之浮雲           허공에 뜬구름과 같이 덧없는 것이고요

矧天地亦有所終窮兮 천지라는 게 결국은 그렇게 다하는 것인데

則何恨夫一時之易改​ 한 철이 빨리 바뀐다고 뭘 그리 한탄하나요

 

그러면서 처량하게 울고불고하지 말고 인생을 호탕하게 살아가자고 한다.​

 

忽臨睨夫塵土兮    홀연 저 티끌세상을 굽어보니

曾夕零而朝華       저녁에 시들고 아침에 꽃이 피누나

吾將泰初以爲隣兮 내 장차 태초를 이웃친구로 삼아

與求至乎無涯​       더불어 끝이 없는 세계에 이르리라

 

맨 마지막에 무애(無涯)라는 글자를 쓴 것은 이백의 글 마지막에 천애(天涯)라고 쓴 데 대한 댓구(對句)이자 운을 맞춘 것인데, 하늘 끝이라고 해도 끝은 있는 것인데, 무애는 끝이 없는 것이니 당신보다는 더 통 크게 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박은이 남긴 문집인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이다. 호를 읍취헌(挹翠軒)이라고 한 박은은 연산군 때 시를 잘 쓰고 문장에 능통해 이름을 날렸지만 타고난 저항정신으로 조정에서 핍박을 받고 나중에 1504년 갑자사화 때에 26살의 나이에 사형을 당한 천재였는데, 정조대왕이 박은의 시를 높이 평가해 조선조 최고의 시인으로 칭찬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정조는 그의 시문집인 읍취헌 유고가 오래되어 유실되자 새로 잘 편찬해 내도록 지원을 했고 직접 서문을 써주어 싣도록 해서 그를 기렸다.​

 

"읍취헌(挹翠軒)은 시를 잘 지어 그의 시에는 국풍(國風, 그 나라 특유의 풍속이나 습관)의 유향(遺響)이 있어 동방의 절학(絶學)을 다시 창도(唱導)하였거니와 나는 읍취헌의 시가 시의 근본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을 특히 좋아한다."​

 

곧 정조는 우리나라 많은 사람이 시를 짓지만, 중국 사람들이 쓴 시의 몇 구절 몇 자를 바꾸어놓고서 시라고 자랑하는데 이것은 시의 본모습이 아니라며 박은의 시가 바로 그런 우리들의 고유한 생각과 아름다움을 담아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시도 중국 것의 모방에 머물면 안 되고 우리들의 생각과 사상과 문학의 향취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우리 것을 찾고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의 시 가운데 이 시가 첫머리에 오른 것을 보면 정조도 바로 이런 면모를 좋아했으며, 대시인인 이백을 인용하면서 그의 생각을 더 크게 극복한 이러한 시(詩)들이 평소에 조선의 임금으로서 정조대왕이 가졌던 지향점과 일치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름의 문턱인 6월이 되면서 신록 5월의 달콤한 향기는 우거진 녹음 속에서 나무와 풀들이 내뿜은 더운 숨으로 바뀌어 그야말로 한동안 우리가 5월이 가면서 즐겨 불렀던 "봄날은 간다"라는 노랫말처럼 우리에게는 아쉬움과 한숨이 나오게 되는데, 그래도 아직 단오가 남았다.

 

옛사람들은 단오를 봄의 마지막 향연으로 생각하고 모두 다 같이 자연이 주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었는데, 그렇다면 그때까지라도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하겠다. 이제 창포물에 머리를 감거나 난초의 줄기와 잎을 베어 띠로 두르거나 하는 것들은 다 사라졌지만, 이 좋은 계절을 우리가 함께 즐기고 나누는 일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봄날이 간다고 너무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대자연의 큰 시계가 전해주는 세상의 원리와 삶의 가치를 생각하며 통 크게 이 봄을 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