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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독립군의 활약과 시련 - 봉오동ㆍ청산리 전투

경북인의 만주망명 110주년 기획 보도 <7>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모두 12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7편에서는 만주지역과 서ㆍ북간도에서 독립군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당시의 상황을 소개한다.

 

3.1만세운동 이후 만주지역, 곧 서ㆍ북간도에서는 다수의 독립군단이 조직되었다. 서간도지역에는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비단, 대한광복군사령부 등이 결성되었고, 북간도지역에는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군무도독부, 대한국민회국민군 등이 조직되었다. 이 단체들은 국내진공작전, 독립군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펼치며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다.

 

 

 

서로군정서는 독판 이상룡, 법무사장 김응섭(풍산김씨 오미마을 출신), 학무사장 김형식(백하 김대락의 차남), 참모부장 김동삼 등 경북 출신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특히 서로군정서는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의 교관 파견 요청에 긴밀히 협조하는 등 독립군 단체 간의 연대에도 힘을 쏟았는데, 당시 김좌진이 서로군정서 측에 교관 파견을 요청했고, 이에 대해 석주 이상룡이 파견을 허락하는 내용의 답신이 《석주유고》에 실려 있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상당수의 무기와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교관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서로군정서는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양성된 우수한 교관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었다. 1910년대 초 경북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길에 올라 엄청난 고난을 이겨내고 이룩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한편 1920년 만주의 독립군들이 국내진공작전을 펼치자 일제는 독립군 탄압을 위한 추격군을 편성했다. 그러다가 1920년 6월 7일 안무ㆍ최진동ㆍ홍범도ㆍ이흥수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으로 진군한 일제의 월강(越江) 추격대에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뒀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중국 당국에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대규모 진압부대를 다시 편성하여 독립군을 추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독립군들은 수십 일에 걸쳐 백두산 서쪽으로 행군하여 청산리 일대로 이동했고, 청산리 계곡에 도착한 대한독립군(홍범도)과 북로군정서(김좌진) 등 연합부대들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등지에서 10여 차례 전투를 펼쳐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

 

흔히 ‘청산리 전투’라고 하면 백야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둔 북로군정서를 떠올리고, 여기에 참여한 경북인들은 잘 소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경북 출신 인물을 다수 찾아볼 수 있고, 또 경북인 중심으로 결성된 서로군정서의 맹활약도 쉽게 확인된다. 안동 출신의 강인수가 대표적이고, 김성로(안동) ‧ 김중한(안동) ‧ 김태규(안동) ‧ 최해(울진, 북로군정서 여단장으로 활약)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다.

 

1920년에 일어난 두 전투는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빛나는 독립전쟁이었다. 약 2,000여 명의 독립군은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일본군 약 5,000여 명을 상대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이 두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일본군은 한인사회를 파괴하고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두 전투를 전후한 1920년대에 일제가 저지른 이 사건을 보통 ‘경신참변’ 또는 ‘간도참변’이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