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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독립전쟁의 초석이 된 '경북 여성 항일투쟁기'<2>

경북인의 만주망명 110주년 기획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총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2편은 1910년대 만주로 건너가 독립전쟁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시기를 조명한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남편을 따라 일가족과 함께 고난의 길에 동참한 여성들은 종속적인 삶을 살았던 전근대 여성의 모습을 넘어 주체적으로 만주의 한인 사회를 안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들이야말로 만주 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대 만주에 정착한 독립운동가들은 군대를 양성하여 일본과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따라서 전쟁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을 마련하였다. 이를 위해, 첫째 만주 지역 동포 사회의 경제적인 안정, 둘째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될 자치기구 조직, 셋째 민족교육기관의 설치와 교육 활동, 넷째 군사양성시설인 병영의 설치를 주도했다. 이들 활동에 여성들 역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만주지역 동포사회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특히 생존의 근간이 될 안정적인 농업 경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만주의 황무지와 습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일구는 일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도 매우 적극적으로 투입되었다. 당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였던 허은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남자들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바깥일에 전념하였고 결국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일은 여자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므로 모진 고난을 겪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만주 한인사회의 경제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고 결국 이는 한인사회의 확장으로도 이어졌다.

 

둘째, 자치기구의 유지에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 한인 자치기구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권리를 확보해야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한인 내부의 결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이러한 공동체 운영에는 남성들이 주도하였지만 여성들은 그 밑바탕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부민단을 조직하고 그 단체의 이름을 정할 때 왕산 허위 선생의 부인인 평산신씨가, “부민단(扶民團)이 어떻겠습니까? 백성을 부양한다는 뜻으로.”라는 의견을 개진하여 결정된 점은 여성들 역시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셋째, 독립전쟁에서도 참여하여 기여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독립군인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의복과 식사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대량으로 대원들의 옷을 생산하는데 참여했고 여러 집과 마을을 왕래하며 음식 까지 담당하였다. 그야말로 독립군 후방의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청산리전투의 후방에서 싸운 최해의 아들 최기룡의 회고에 의하면 “이 싸움에서 아버지는 혈전을 지휘하였고 어머니는 후방에서 독립군의 주먹밥을 공급하고 부상병을 치료하였다. 한 여성으로 태어나 불굴의 투지로 싸워 이겨냈다.”고 기록했다. 후방의 보급 역시 독립전쟁의 중요한 일부였음을 당시에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로 떠나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아내, 그리고 여성들은 결국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남편들과 함께 항일투쟁의 일선에서 함께 고생하며 버텨낸 잊어서는 안 될 또 한명의 독립투사였다. 독립운동가 김정식의 딸 김성희는 박순부 여사를 만난 당시를 회고하면서, “박순부 여사를 뵈오니 너무나 가엾고 암담한 생각이 들면서, 남자들은 국가의 영웅이 될지는 몰라도 그 가족들의 피나는 희생과 고생은 무엇으로 보답할 것이가.”라며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진 고난을 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