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예수원, 자유로운 분위기의 기도원

이뭐꼬의 구도이야기 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기차를 타기 전 대합실에 있는 책방에서 산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를 읽기 시작하였다. 저자는 칼슨이라는 심리 치료사인데 이 책은 1997년 저작으로 미국에서 55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내용의 짧은 글들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직면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당시에는 엄청나게 중요하고 그 일의 결과에 따라서 세상이 크게 변할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모두 사소한 일이고 세상은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거나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며칠 전 아내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내는 여섯 자매 가운데 둘째니까, 언니 하나에 여동생이 넷이나 된다. 자매가 많다 보니 여러 가지로 좋은 일 나쁜 일이 일어난다. 최근에는 둘째 여동생과 무슨 일로 서운했다고 이야기했었다. 자기가 동생을 생각하는 만큼 동생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나는 3남 4녀의 장남인데, 역시 형제자매 간에 희로애락이 많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세상살이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우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기가 참으로 어렵다. 대부분 사람은 남에게 베풀기에 익숙하지 않지만 남에게 잘 베풀거나 남을 잘 돕는 소수의 사람 가운데서 정말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내가 동료에게 점심을 한 번 샀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럴 때 반드시 다음번에는 상대방이 점심을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료 사이의 식사대접은 1 대 1로 한 번씩 주고받게 되며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동료가 고맙다는 말만 했지, 다음번 식사 때에도 역시 돈을 내지 않아서 내가 다시 점심을 샀다고 하자. 이제는 2대 1의 관계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때 어떻게 반응할까? 거기까지는 대개의 사람이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세 번 점심을 샀는데도 상대방의 반응이 없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대부분 서운한 감정이 일어날 것이다. 그 사람과는 점심을 같이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만일 5대 1의 관계가 된다면? 만일 10대 1의 관계가 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 동료를 '받기만 하지 줄 줄은 모른다', '염치가 없다'. '돈에 너무 짜다'. '상식이 없다'라는 등 여러 가지로 비난할 것이며 실제로는 그러한 비율의 관계까지 가기 전에 교류는 끊어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직장 동료가 아니고 형제자매 사이에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때 어려운 가운데도 너를 도왔는데 어떻게 네가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니? 차라리 남을 돕지, 은혜를 모르는 너를 더 이상 도와주지 않겠다, 등등. 이러한 모습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형제자매를 도왔다면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티를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원칙이 아니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는 ‘너희는 구제할 때 너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고 표현했고, 불교의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無主相報施)’라고 하여 도와주는 사람, 도와주는 물건, 도움을 받는 사람이 모두 없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생활 현장에서 실천하기는 수미산(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아이이거나 어른이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지행합일(知行合一, 인식과 실천을 일치하는 것)이 안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것은 먼저 용서하기다. 이 문장을 쓰면서 나는 매우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내와 다툰 다음에는 내가 먼저 용서하고 풀어야 하는데, 나는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나쁜 습관이 있다. 희한한 것은 친구와의 사이에서는 비교적 먼저 용서하기를 실천하는 편인데,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그게 잘 되지를 않는다. 내가 먼저 용서하기를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난 20여 년의 결혼 생활을 냉정하게 평가해 보면 B학점을 주기도 어렵다. 그런데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가?

 

기독교인이 일요일 예배 시간에 반드시 한 번은 외우는 주기도문에서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불교의 ⟪법구경⟫에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온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어 버린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결국은 자신이 녹슬고 피해를 본다는 뜻이다. 이 또한 우리가 모두 아는 이야기이지만 삶 속에서 실천하기가 어렵다.

 

오랜만에 기차를 탔는데, 철도청에서 일을 잘해서 그런지 기차는 내부 시설이 많이 좋아지고 쾌적했다. 바쁘게만 세상을 살다가 모처럼 가지는 한가로운 오후 시간이었다.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깜빡 졸기도 하고,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오후 4시 43분, 도착 예정 시간에서 1분의 오차도 없이 태백역에 도착하였다. 간단한 손가방을 챙겨 들고 내렸다.

 

태백시는 도시답지 않게 매우 조용하고 한산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원 가는 길을 물어보니 하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란다. 5시에 버스에 올라타니 20여 명이 앉아 있다. 그 가운데 몇 명은 느낌이 예수원 가는 사람들 같았다. 버스로 한 30분쯤 산길을 달려 예수원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내렸다. 모두 9명이 예수원 가는 사람들이었다. 한 5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 한 사람, 외국인 남자 한 사람, 젊은 한국인 여성과 애인인 듯한 외국인 한 사람, 한 일행 같은 남학생 두 명과 여학생 두 명, 그리고 나, 이렇게 아홉 명이 산길로 접어들었다.

 

조그만 가게를 지나고, 옥수수밭과 감자밭을 지났다. 한우 축사 너머로 고랭지 배추를 심어 놓은 넓은 비탈밭도 보였다.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 햇빛을 받으며 산모퉁이 두 구비를 지나자 바위에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쓰인 글씨가 보였다. 예수원 사람들의 경제관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간판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빈부격차를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이 부동산 문제, 그 가운데서도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땅 투기가 아니었던가? 사회 정의를 해치는 부동산 투기를 단칼에 근절시킬 수 있는 경구라고 생각되었다. 20분쯤 걸으니 ’할렐루야‘라고 쓰인 간판이 우리를 맞는다. 좁은 골짜기 안쪽으로 돌로 지은 몇 채의 건물이 보인다.

 

 

야생화가 예쁘게 피어 있는 길을 따라 ‘손님부’라고 쓰인 작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거스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40대의 수염 난 남자가 안내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 도착한 우리 일행에게 설명하였다. “여기는 성공회 기도원입니다. 2박 3일 동안 편안하게 쉬었다 가십시오. 여기서 진행되는 일정이 있지만 선택이기 때문에 따르지 않고 혼자 지내셔도 무방합니다. 여기서는 다른 기도원과는 달리 금식은 금지합니다. 식당에 모여서 밥을 먹되 식사 시간을 놓치면 밥이 없습니다. 숙식은 무료로 제공됩니다. 단지 본인이 원하면 갈 때 헌금함에 헌금을 하는 것을 막지는 않습니다.”

 

대개의 수련원이나 기도원이 정해진 일과표를 따라가고 개인행동을 금하는 것에 견주면 매우 느슨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임을 처음부터 느낄 수 있었다. 오거스틴은 우리에게 각각 숙소를 배정하고 한 쪽에 쌓여 있는 담요보와 베개보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저녁식사 시간은 6시라고 알려 준다. 나는 그를 따라 제일 아래쪽에 있는 석송관으로 갔다. 여기에 있는 집들을 보니 지붕이 경사가 급하고 돌로 만들어져 있다. 고지대이기 때문에 눈이 많이 와서 지붕을 그렇게 만들었으며, 돌은 근처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하였단다. 오거스틴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 있는 건물들은 공동체 가족들이 자력으로 한 채 한 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예수원은 1965년에 성공회 소속인 대천덕 신부님 가족과 일단의 신학교 학생, 그리고 항동교회 신자들이(모두 16명) 설립하였다. 이들은 강원도 산골짜기에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는 것이 노동이다”라는 정신으로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 이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노동과 기도의 삶을 영위하는 예수원을 운영하고 있다.

 

대천덕 신부님은 1918년에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서 중국 산동성 제난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평양에 있는 외국인학교, 중국의 연경대학,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엔지니어 회사, 철강 회사에서 일도 해 보고, 선원 생활도 하다가 1946년에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48년에 결혼해 미국에서 목회자 생활을 하면서, 건축 기사 노조 활동, 흑인 해방 운동 등 활발한 사회 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1957년 성공회 교구청의 명령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성공회대학의 전신인 성 미카엘 신학원을 재건하였다. 1965년에 강원도 산골로 들어온 이래 예수원에서 청빈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