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밤사이 눈이 하얗게 내렸네요. 아침 산책길에 보니 깊 옆 나무들에 눈들이 몽실몽실 맺혀 있습니다. 쌓여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목화송이처럼, 꽃송이처럼 피어올라 있는 듯 합니다. 그야말로 눈꽃입니다. 그동안 겨울에 나뭇가지들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고 처음엔 설화(雪花)라고 했다가 그것이 서리에 의한 것은 상고대, 눈이 쌓여 만들어진 것은 설화라고 달리 부르는 것을 이제는 알겠지만, 이번 것은 진정으로 눈꽃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것 같군요.
게다가 바람이 살짝 부니 눈가루들이 작은 결정 그대로 얼굴을 때리고 볼 옆에 차가운 향수를 뿌려줍니다. 그리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수정처럼 맑고 투명하고 얼음처럼 차갑고 깨끗한 다이아몬드 가루들이, 이 겨울 이렇게 추울 때 우리에게 뿌려지니, 이것이 바로 자연의 선물이라 하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의 시 '자작나무(The Birches)'가 문득 다시 생각났습니다.
프로스트의 시 '자작나무'는 워낙 유명해서 많은 분이 알고 계시겠지만 길옆의 자작나무 가지들이 휘어져 있는 것을 보며 시상을 풀어갑니다. 자작나무 가지들이 왜 누워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인데, 우선 원문을 보면
When I see birches bend to left and right
Across the lines of straighter darker trees,
I like to think some boy's been swinging them.
But swinging doesn't bend them down to stay.
Ice-storms do that.
곧 조금 거무틱틱하게 뻗어 올라간 줄기 사이로 오른쪽 왼쪽으로 가지들이 굽어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게 몇몇 아이들이 ‘swing’을 해서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아이들의 swing만으로는 나뭇가지가 굽은 것이 아니라 얼음덩어리들이 내려서 나뭇가지에 들러붙었다가 얼어서 무게가 무거워지곤 해서 나뭇가지들이 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요?
이 첫 문장의 해석이 굉장히 중요한데, 시중에 알려진 번역은 이게 정확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고 그래서 이 시에 있어서 ‘swing’이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필자가 좀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시중에 나온 번역은 이 부분을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줄기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는 걸 보면
나는 어떤 아이가 그걸 흔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라면서 ‘흔든다’고 번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를 흔든다고 가지가 어떻게 좌우로 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다면 원래 프로스트가 swing이라고 한 표현을 다시 봅니다, 프로스트가 분명히 swing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은, swing이 갖고 있는 ‘그네 타기’라는 원 뜻을 깔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곧 소년들은 나무를 그냥 흔든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를 그네처럼 타고 놀았기에, 소년들이 나뭇가지 윗쪽으로 올라갈수록 나뭇가지가 힘이 약해져 애들의 몸무게에 따라 좌나 우로 굽어질 것이다. 그러다가 소년들이 뛰어내리면 나무가지는 다시 똑바로 올라선다. 그냥 흔들어서는 도저히 나무들이 굽어질 수가 없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스트는 소년들 때문이 아니라 겨울을 지나며 나뭇가지 위에 눈이 오고 그게 얼어붙어 얼음이 되었다가 가지들이 무게를 못 이기고 옆으로 눕게 되면 그때 얼음 결정들이 땅 위에 마치 젊은 여성들이 머리를 감을 때 물방울이 떨어지듯 땅으로 쏟아져 나뭇가지들도 휘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왜 소년들이 나뭇가지를 타는 이야기를 꺼냈을까?
프로스트의 이 시는 아주 길어서 원문을 다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그 뜻을 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눈이 휘날리는 날 필자가 이 시를 생각하는 것은 이 시가 갖고 있는 멋진 생각 때문입니다. 프로스트는 자작나무의 가지들이 휘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이 나무를 타고 놀던 때를 생각하고 이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지요.
자기도 그랬지만 소년들이 자작나무를 타고 올라가는데, 너무 많이 올라가면 가지가 부러지니까 적당히 올라가면 나뭇가지가 옆으로 휘게 되고 그때 소년이 뛰어내리면 나뭇가지가 다시 세워지는 것처럼, 그런 소년 시절이 다시 올 수 있다면, 우리의 긴 인생에서 피곤하고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이 자작나무의 구부러진 가지를 통해 되살린 것이지요.
우리 인생이 그런 것처럼 시도 마지막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봅니다. 기존 해석에서처럼 ‘swing’을 흔든다고 해석하면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 깊은 뜻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인생은 소년들이 나무 위로 올라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다가 그네를 타듯 휙 움직여서 다시 땅으로 내려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되돌아가기'를 던져주기 위해 프로스트는 이 시를 쓴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그렇게 이 지구에서 잠시 벗어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시작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고 설마 운명의 신이 내 뜻을 곡해해서
하늘로 데려간 뒤 내려놓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이 세상이야말로 사랑하기 딱 좋은 곳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 자작나무를 오르듯 살아가고 싶은 거야
눈 덮인 줄기의 검은 가지들을 타고 올라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나무가 견디지 못하게 되면
가지 끝이 숙어져 땅에 다시 내려오듯 말이야
그렇게 갔다가 돌아오는 것, 얼마나 좋아?
사람이란 게 자작나무 타는 소년보다 훨씬 못할 수 있으니.
이 시의 다른 번역에서는 여전히 자작나무를 휘어잡는다는 번역이 나옵니다. 독자들이 이 시의 뜻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보듯 우리 사람들이 자작나무 가지를 타는 것처럼,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고. 그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 눈 덮인 겨울 자작나무의 가지가 휘어져 옆으로 뻗어있는 풍경을 도입부로 들고나온 것이지요. 그 뜻이 처음부터 살아있었으면 우리의 이 시에 대한 이해도 훨씬 편하고 좋았을 결국은 이 시도 우리들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성찰하는 내용입니다.
자작나무라는 것이 시베리아에 많이 살고 우리 민족의 시원목(始原木)이라는 말들이 있어서 사뭇 신비감을 더해주지만, 사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살던 미국 뉴 잉글랜드 지방에는 이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이 나무를 통한 어릴 때의 경험이 이처럼 인생에 대한 전체적인 성찰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조금 먼 나무들인데 최근에는 용대리 등에 자작나무 숲을 만들어 뭇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지요. 집 뒤의 나무들은 자작나무가 아니지만, 나무에 맺힌 눈꽃들로 해서 잠시 멀리 북풍이 부는 겨울의 시베리아, 혹은 미국 북동부로 마음의 여행을 해봅니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삶을 반추하는 여행이지요. 짧은 시간이나마. 그리고 겨울 눈이 고마운 이유이기도 하고,,,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