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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 양종승의 <명인⦁명무 열전>

전래 춤의 틀 위에서만 탄생한 박병천의 춤

박병천 명인의 향토문화 살리기와 춤 유산 가치 1
민속학자 양종승의 <명인⦁명무 열전> 6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무송(舞松) 박병천(朴秉千, 1933∼2007)은 전라남도 진도 세습무가 자손으로 태어나 74살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박병천의 종조부 박종기는 대금산조 창시자이며 당숙 박만준은 피리 명인이었고 어머니 김소심과 고모 박선내는 당대 으뜸 세습무였다. 무속 집안을 배경으로 태어난 박병천은 어려서부터 가문 전통에 따라 어정판(굿판)을 따라다니며 소리를 배우고 춤과 장단을 익혔다. 악기와 재담은 물론이고 놀이와 향토문화를 배경으로 전승된 갖가지 민속예술을 두루 접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곱 살 때부터는 마을 농악대에서 무동 역할을 맡아 마을공동체 연희와 놀이를 습득하였고, 18살 때부터는 명인 박동준에게 가야금을 배웠으며, 명인 양태옥에게서는 진도 북놀이를 익혀 국악인으로서 소양을 터득했다. 30대에 명무 이매방에게도 전통춤을 학습하여 무대 춤이 갖는 예술적 깊이와 값어치를 간파하였다.

 

 

20세기를 맞이한 한국 사회는 전래한 민족문화와 들어온 외래문화의 대립과 공존 속에서 서로 간 갈등을 겪으며 융합되기도 하고 동화되기도 하였다. 유입된 것에 적응 또는 대응할 수 없는 전래의 것은 자리를 내주어 소멸의 길로 들어서는 사례가 많았다. 급격한 서구문명주의를 등에 업고 발돋움한 공업화, 기계화, 도시화 속에서 국제화, 세계화의 국제질서에 발맞추려는 편협한 문화 정책도 전래 문화가 위축되는 데 크게 역할하였다.

 

사회적ㆍ문화적 혼돈은 문화민족주의자들이 자민족 전통문화를 연구하고 보호하는데 열을 올리게 하였고, 국민이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갖게 하여 민족주의적 의식을 드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민족문화 복원과 전통문화 계승을 갈구하던 예인들 사이에서도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널리 퍼졌다. 그러면서 전통문화의 복원을 갈구하는 국민적 정서는 민족문화를 복원하고 계승, 발전시키려는 문화운동으로 연결되었다.

 

국가 또한 민족문화보호정책을 가동함으로써 1961년에 이르러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였다. 이 무렵, 박병천은 주어진 운명을 안고 민족의 예술문화의 향토성과 전통성을 살려야 한다는 시대적 책무감을 앞세워 전통 문화유산 지킴이 소명을 수행하기로 다짐하였다.

 

타고난 천부적 재질을 바탕으로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래 연희의 전승과 진흥을 꾀하고 한국민족예술의 근본을 살려 나가는데 투신한 박병천은 진도의 풍부한 향토 무형유산을 찾아내어 세상 밖으로 소개하는데 몰두하였다. 묻혀있던 향토문화를 범국가적 유산으로 가치 평가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향토성이 짙은 씻김굿을 비롯한 남도 들노래, 강강술래, 진도 상엿소리, 진도 다시래기, 진도 북놀이, 진도 닻배노래, 거문도 뱃노래 등을 세간에 알려지게 하였다.

 

전통문화예술 승화 작업에 대한 박병천의 끊임없는 노력은 이를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통해 평가받게 하여 그 값어치를 더욱 드높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향토문화를 국가 또는 지방정부의 무형유산으로 지정하여 활동 범위도 넓혔다. 묻혀있던 향토문화를 옥석으로 다듬어 세상에 알리고 들여온 외래문화에 의해 폄훼된 평가를 되살리어 값어치를 드높이는데 애썼다. 박병천의 이러한 작업은 철저한 향토성 중심으로 고증됐으며 살아 숨 쉬는 민족의 혼으로 되살아나게 한 것이다.

 

 

박병천은 향토문화가 하나의 지역성을 갖는 호남의 문화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이고 실천적 범주에 들어가 국가적으로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인류 유산으로 평가받게 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한 사명으로 박병천은 향토유산을 국위선양의 표본으로 앞세워 나라 밖에 알리는데 적극성을 띠었다. 1982년 국제민속예술제에 초청되여 유럽 6개국 순회를 하면서 공연한 것을 시작으로 1984년 LA 올림픽 개막 축제 공연, 니카라과의 민속음악제 참여 금상 수상, 1985년 베를린 국제민속음악제 국가대표 유럽 7개국 순회공연 등 수많은 나라 밖 공연을 펼쳤다.

 

1990년 LA 아ㆍ태 지역 토속신앙 페스티벌 공연, 1994년 ASIA SOCIETY 초청 KOREA FESTIVAL 미국 순회공연, 1999년 인도 무역박람회 공연, 1999년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유형문화 전시ㆍ무형문화재 공연, 독일 세계문화의 집 초청공연, 백남준 비디오 씻김 공연지도 및 출연, 2002년 태국 세계드럼축제 공연, 2005년 러시아 나라 음악 큰잔치 공연, 2006년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 기념공연, 2007 한ㆍ베트남 수교 15주년 기념공연 등 수많은 나라 밖 공연을 펼치며 한민족 무형유산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알렸다. 박병천의 그러한 공로가 평가되어 1999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하였다.

 

박병천은 후학 양성에도 애정을 갖고 참여하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과 무용원 객원교수를 지냈고, 서울예술대, 중앙대, 용인대 등에 출강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2003년 대불대학교(현 세한대학교) 전통연희학과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석좌교수로도 재직하며 전통 악가무극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데 앞장섰다.

 

 

박병천은 타고난 재능으로 향토 무형유산의 계승과 그 값어치를 드높이는 데 앞장선 선구자다. 진도 씻김굿을 이어 온 세습무 계승자로서 그리고 소리와 장단의 명인이며 춤의 명무로 화려한 일대기를 그려 냈다. 그러한 업적 가운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그의 업적 중 하나가 춤 예술이다. 박병천 춤은 향토문화 살리기 목적으로 펼쳤고, 전래한 춤새와 시대적으로 형성된 무대예술 시류의 접목 아래 태동되었다.

 

예술로의 전환이라는 형식을 받아들이되 전통 기법과 양식을 철저히 수용하여 성립한 것이다. 그래서 농경의례의 진도 북춤이나 신앙의례의 제석춤, 지전춤, 고풀이춤 등의 형태와 기법 그리고 장단과 복식은 전통의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의 춤 모두가 향토문화의 전승력을 구축하면서 예술적 근본을 갖도록 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이 각색된 춤은 여러 형태로 공연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논의되는 것이 민족적 정서를 바탕으로 재창출된 우리네 식 춤이다. 이들은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전래한 기존의 춤 틀을 안고 새로운 시대적 무대방식을 모색하여 각색된 춤을 뜻한다. 새 시대에 걸맞은 형식적 변모에 초점이 맞추어 각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병천 춤이 여기에 포함된다.

 

전통춤이 이 땅에 자생하여 오랫동안 전래한 한 무리의 한국 춤이라면, 박병천의 춤과 같이 근현대사에서 시대적 사명감을 띠고 창출된 또 한 무리의 한국 춤이 있다. 그래서 박병천의 춤은 철저하게 전래 춤의 틀 위에서만 탄생이 가능하였던 것이고 그러한 춤 틀을 기반으로 이어지면서 공연되고 있다. 그래서 박병천 춤은 새로운 시대적 삶과 사상을 담아내면서 살아있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산물로 창출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기반 삼아 창출된 박병천 춤은 한국 전래의 신앙의례 또는 농경의례 굿이나 놀이에서 예술로의 전환으로 탄생한 미학적 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