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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은 활짝 피고, 나뭇가지엔 새잎 돋아나

효석문학100리길 답사기 제2-1구간 (4)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짜: 2024년 4월 29일(월)

답사 참가자: 김수용, 나명흔, 박명수, 윤희태, 이상훈, 전선숙, 최동철, 황병무(8명)

답사기 쓴 날짜: 2024년 5월 11일

 

평창군에서 만든 효석문학100리길의 제2구간은 대화 장터 가는 길로서 소책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속사천과 대화천 그리고 농로를 따라 시골의 정취와 풍광을 바라보며 걷는 길로, 재산재를 넘어 서울대 평창캠퍼스 입구를 지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의 하나인 대화전통장으로 향하는 구간이다. 지역 명소인 토마토유리온실재배단지, 금당산 등산로, 법장사, 대흥사, 땀띠공원과 농촌체험마을인 대화6리 광천마을 등을 둘러보며 옛 추억의 정취와 평창의 따뜻한 인심과 정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문제는 제2구간의 거리가 13.3 km로서 상당히 먼 거리라는 점이다. 답사 일행의 평균 나이가 65살이 넘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황병무 선생과 나는 제2구간을 두 번으로 나누어 걷기로 하였다.

 

 

제1구간을 걸은 지 3주가 지나 제2-1구간을 걷게 되었다. 제1구간을 걸은 분 가운데서 두 분이 개인 사정으로 빠지고, 대신 세 분이 추가되어 모두 8명이 걷게 되었다. 새로 참여하는 답사자 가운데는 봉평 성당에서 봉직 중인 박명수(가브리엘) 신부님이 있었다. 박 신부님은 아직 4학년이어서 이날의 분위기를 활발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였다.

 

제1구간의 도착지가 제2-1구간의 출발지가 된다. 출발지에는 허생원을 업은 동이, 그리고 짐을 잔뜩 실은 나귀가 실물 크기의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황병무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나귀는 화물차이고 말은 승용차라고 한다. 나귀는 60kg의 짐을 싣고서 하루에 100리를 갈 수 있다고 한다. 나귀에 견줘 말은 덩치가 커도 짐을 싣지는 못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타고 갈 수가 있다고 한다.

 

황병무 선생은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인데, 이효석의 작품과 문학세계를 깊이 연구하였다. 황 선생은 문학의 관점에서 이효석의 생애를 6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에 대한 해설 자료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나는 그가 보내준 귀한 자료를 읽고 나름대로 녹여서 답사기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봉평은 궁벽한 산골 마을이었다. 봉평 땅은 토질이 척박하여 농업으로 살아가기가 곤란하였다. 사람들은 세상 물정에는 어둡고, 개화되지 못하였으나, 법 없이도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이효석의 집안은 조부 대에 함경도에서 봉평으로 이주하였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 고향을 떠난 부친 이시후(1882~1945)는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기도 하고,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기를 번역 출판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이효석이 3살 되던 1910년, 부친을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 효석이 5세인 1912년에 부친은 봉평면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부친을 따라 봉평으로 내려온 후, 이효석은 아버지가 만든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효석의 어머니 강홍경(1889~1967)은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서 1967년까지 평창군 진부면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효석의 <나의 수업시대>라는 작품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네 살 때에 가친의 뒤를 따라 일가는 서울로 옮겨 왔다. 약관 전에 고향을 떠난 가친은 서울서 수학한 후 이어 조그만 사관(仕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벤저민 프랭 클린의 전기 등을 번안 저술하고 있었다.

 

일곱 살 전후하여 사숙에서 소학을 배울 때 여름 한 철이면 운문을 읽으며 오언절구를 짓느라 애를 썼다. 즉경(卽景)의 제목을 가지고 오로지 경물(景物)을 묘사할 적당한 문자를 고르기에만 골몰하였으니 시적 감흥이라는 것보다는 식자(植字)에 여념이 없었던 셈이다. 오늘의 문학에 그다지 도움 된바 못 되나 그러나 표현의 선택이라는 것을 배웠다면 이 시절의 공일는지도 모른다.

 

이효석은 7살인 1914년에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평창읍에서 하숙하며 학교에 다녔다. 개학이 되면 그는 아버지를 따라 봉평에서 평창읍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방학이 되면 평창읍에서 봉평까지 100리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때 걸었던 경험이 그의 작품 속에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메밀꽃 필 무렵》의 백미로 꼽히는 아래 구절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고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달에 한층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은 10살 남짓해서 신소설 《추월색》을 읽게 되었는데, 이때가 효석이 문학과 접한 처음인 듯하다. 이효석은 추운 계절에는 머리맡에 병풍을 둘러치고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추월색》을 번갈아 가며 되풀이하여 읽었다고 한다.

 

이제 답사기로 돌아가자. 여울목에서 8명이 10시 20분에 출발하였다.

 

 

 

 

날씨는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전형적인 봄 날씨다. 기온은 16도 정도로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바람이 약간 있었으나 춥지 않은 바람이었다. 제1구간을 걸은 지 정확히 3주가 지났는데, 눈을 들어 주변을 바라보니 세상이 완전히 변하였다. 풀꽃은 곳곳에 활짝 피고, 헐벗었던 나뭇가지에는 연두색 새잎이 일제히 돋아나고 있다. 잎보다 먼저 꽃이 피는 나무의 가지에는 흰색, 붉은색 꽃들이 가득 찼다. 내 실력으로는 이처럼 황홀한 봄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낼 수가 없다. 그 옛날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이양하(1904~1963)의 <신록예찬>이라는 수필은 이렇게 시작한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중에도 그 혜택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滿山)에 녹엽(綠葉)이 우거진 이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驚異)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우리는 속사천 둑길을 따라서, ‘효석문학100리길’ 이정표 따라서, 계속 남쪽으로 걸어갔다. 길 왼쪽의 농수로에 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다. 이미 농사일이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농수로 아래쪽으로는 물이 불어난 속사천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다. 냇가에는 버드나무가 푸르고 푸르기만 하다. 버드나무는 잎이 빨리 나온다. 길의 오른쪽으로는 산이 이어지는데, 비탈에 노란색 괴불주머니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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