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일찍이 김옥균이 우의정 박규수를 방문했을 때, 박규수는 그의 벽장에서 지구의 하나를 꺼내어 김옥균에게 보였다. 박규수가 지구의를 돌리면서 김옥균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날 가운데 나라(중국)가 어디에 있는가?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니, 어떤 나라도 가운데로 오면 중국이 된다. 자 오늘날 이디에 따로 중국이 있는가.’
김옥균은 당시 개화를 주장하고 신서적도 얻어 보았지만,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사상, 곧 대지의 가운데에 있는 나라가 중국이며,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들은 사의(四夷, 네 방면의 오랑캐)이며, 사의(四夷)는 중국을 숭상한다고 하는 사상에 얽매여서, 국가 독립을 부르짖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박규수의 말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무릎을 치며 앉아 있었다. 후일 그는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신채호, 《지동설의 효력》에서)
서울의 북촌에서도 재동(齋洞)에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의 집이 있었다. 오늘날 헌법재판소의 뜰 안에 600년 된 백송이 한 그루 서 있는데 그곳이 박규수의 집터라고 한다. 그의 사랑방에는 인근의 명민한 양반자제들이 드나들며 박규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곳이 개화의 산실이었고 개혁 사상의 온상이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나 훗날 친일파로 변신한 박영효는 춘원 이광수와 1931년에 한 대담에서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ㆍ홍영식ㆍ서광범 등이 재동에 모였지요… 《연암집》(연암 박지원의 문집)의 양반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라고 회고한다. 그는 김옥균을 이렇게 평한다. “김옥균의 장점은 교유요. 그는 교유가 참으로 능하오. 글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시문서화를 잘하오. 그러나 단점이라면 덕이 모자라고, 모략이 없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헌법재판소 입구 부근에 갑신정변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던 홍영식이 살고 있었고, 거기에서 위로 올라가 홍현 마루에 이르면 김홍집과 김옥균이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아래로 도성이 내려다보이고 고개를 뒤로 돌려 서쪽을 바라보면 북악산과 인왕산이 눈에 들어 찬다. 김옥균의 이웃집에 서재필이 또한 살고 있다. 김옥균보다 나이가 10여 살 어린 서재필은 어려서부터 김옥균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훗날 서재필은 김옥균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김옥균은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하에 놓여 있는 굴욕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치욕을 벗어나 조선도 세계 속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一員)이 될까 하여 밤낮으로 노심초사했다. 그는 현대적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하였다. 그는 신지식과 신기술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조선의 낡고 굳어진 사고와 체제를 깨버려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구미(歐美)의 문명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열국(列國)들이 수백 년 동안 경쟁적으로 노력을 계속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일본은 한 세기 동안에 그것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히 일본을 모델로 택하여 백방으로 노력한 것이었다.
나는 서광범을 통하여 김옥균을 만났는데, 그때 김옥균 외에 홍영식, 박영효와 인제 와서는 기억조차도 할 수 없는 몇몇 명사들과도 알게 되었다. 누구누구 해도 나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이는 김옥균이었다. 그는 문학이나 평론은 물론이고 음악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의 재기(才氣)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는 그에게 10여 년 연하였으므로 그는 나를 늘 동생이라고 불렀다.
(서재필의 일본 유학 시절) 김옥균은 쓰키지(築地)라고 하는 동경의 한 끝에 살았다. 일요일이면 우리는 언제나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우리를 친동생같이 대접하고 숨김없고 남김없이 폐와 간 속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꿈이요, 또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그의 말에 감명을 받고 우리의 앞길에 무엇이 닥쳐오든지 사명을 다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청일전쟁과 1905년의 러일전쟁 뒤까지 수명을 누렸다면 과연 어떠한 일을 하였을까? 그가 좀더 살았더라면 우리는 한일합방과 같은 추잡한 장면을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 슬프다. 그는 이미 죽었다. “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서재필이 1934년 (70살)에 동아일보에 보낸 글인데 영문으로 쓴 것을 변영로가 번역하여 동아일보 1935년 1월 1일과 2일 호에 연재했다)
죽은 김옥균이 산 자를 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