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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여지소의(予之所倚, 너를 의지한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보는 세종의 사상 43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상대를 믿는다는 한마디가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세종 14년(1432)에 황희가 나이가 많아 사직을 요청했을 때 세종이 하신 말씀이다.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영의정 황희가 사직(辭職)하여 말하기를, "엎드려 생각하건대, 잘못 태종께서 선택하여 후히 대우해 주신 은혜를 입어 여러 어진 이들과 섞이어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수년 동안 죄를 마음으로 달게 받으면서 궁촌(窮村)에서 몸을 보전하고 있었더니, 하루아침에 착한 임금의 세상에 다시 거두어 쓰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대로 우물쭈물하며 지금에 이르도록 애써서 관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귀는 멀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는 일이 어려우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부자유하여 걸음을 걸으면 곧 쓰러집니다. 더군다나 신은 올해의 생일로 이미 만 70살이 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나이가 노쇠에 이른 것을 가엾게 여기시며, 신의 정성이 깊은 충정에서 나온 것을 살피시고,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직위에서 물러나게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기를,

"어려운 것을 극복(克服)하는 임금은 보필(輔弼)하는 재상의 어짐에 힘입는 것이니, 도모하여 임용한 옛사람을 어찌 그 물러가고 나아가는 일이 쉽게 할 수 있겠는가. ... 세상을 따난 밝으신 아버님께 신임을 받아 일찍 승지의 직에 복무하였고, 곧이어 가장 신임하는 중신의 위치에 두어졌도다. 만약 병이 일어난다면 마땅히 약을 써서 치료하면 될 것이요, ‘경의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는 좋겠지만 그리하면 나의 의지할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사직하려고 하는 일은 당연히 윤허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14/4/20)

 

 

그러나 황희도 이후 세종 17년에 다시 사직하기를 요청한다.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영의정부사 황희가 뜻을 올려 사직하기를, ...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태종(太宗) 전하의 뽑음과 후히 대우하심에 입어 여러 어진이와 같이 섞여 진출하였사오나, 아직 털끝만 한 도움을 드린 바 없어 한갓 밤낮으로 일하려는 마음만 간절하였는데, .성상께옵서 천지의 넓으신 아량과 부모의 인자하신 마음으로, 뭇사람의 비방이 집중하는 가운데서도 특히 옛 신하라 생각하시고, 불초한 이 몸을 만인이 쳐다보는 자리의 우두머리로 발탁해 두시므로, 비록 이 몸이 이지러지고 부서지는 데 이르는 한이 있다고 해도 보답이 어렵되, ... 그대로 미루어 이제까지 힘써 종사해 왔사오나, 귀가 먹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기가 어려우며,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따르지 못하여 걸음을 걸을 때마다 쓰러지곤 하니, 이는 대개 원기가 쇠약함에 따라, 여러 병이 마구 침범해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신은 출생한 그날부터 이미 70년의 세월이 되었는바, 늙어 벼슬을 물러감은 나라에 상례가 있는 법이요, 병으로 인하여 한가함을 구하는 것 역시 진정 헛치례가 아니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나이 이미 만년이 임박하였음은 불쌍히 여기시며, 윤허의 윤음을 내리시어 직위를 면하는 것을 허락하옵시면,.. 생을 이루게 하옵신 큰 은혜를 우러러 보답하고자 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이에 비답(批答)하기를,

"어려움을 극복한 임금은 어진 보필에 힘입는 법이라, 내가 미약한 몸으로 봄 얼음을 밟는 듯이 자나 깨나 오직 삼가는 일념으로 대신(大臣)을 전임시켜 전래의 공업(功業)을 한층 더 빛내려고 하였는데, 당당(堂堂)한 한 원로가 우뚝이 산악처럼 서 있었으니, 이에 공을 그 수위에 앉혀 모든 벼슬아치의 모범으로 삼았던 것이요, 하물며 경은 그 나이 아직 아주 늙지 않았고, 병 또한 깊은 데까지 이르지 않았은즉, 기력이 오히려 강건하여 국정을 잡을 만하고, 만일 질병이 생겼다면 마땅히 의약의 치료를 가해야 할 것이요, ‘경의 자신을 위한 계교는 좋으나, 나의 의지함은 어찌하려는 것인가. 남을 높이고 제 몸을 낮추려는 생각을 자제하고 속히 자리에 나오기를 바라며,... 힘써 옛사람들을 생각하여 벼슬에서 물러나려는 뜻을 갖지 말도록 하라. 사양한 바는 결코 윤허할 수 없노라." 하였다. (⟪세종실록⟫17/3/29)

 

황희도 우여곡절이 있는 정승이었다. 먼저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발탁해 쓴 태종과 세종의 용인술이 있었다. 태종은 강릉부사 황군서의 서자 곧 어머니가 노비인 황희를 도승지로 발탁했고 세종은 그에게 18년 동안이나 정승직을 맡겼다.

 

둘째는 황희의 사태 파악능력이 뛰어나 일의 우선순위를 밝히고 다양한 인재까지 발굴하고 추천하였다. 건국시기 조선의 예제를 정비한 허조, 야인정벌의 최윤덕. 그리고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 등을 추천한 것도 황희였다.

 

그러나 이렇게 황희가 뛰어난 정승이 될 수 있었던 근간에는 인재를 신뢰하고 보호하는 세종의 정치적 안목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