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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88. 서원숙의 심상건류 가야금산조 재현(再現) Ⅲ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가야금산조는 전라도제나 충청도제로 구분되는데, 충청제의 심정순 산조는 심상건과 심재덕이 이어 받았으나 맥이 끊겨 전승이 단절되었다는 점, 심상건의 4촌 동생들, 즉 심정순의 아들 딸들은 심재덕, 심매향, 심재민, 심화영 등인데, 막내동생 심화영(1913~2009)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서산에서 판소리와 춤 등을 전수하다가 타계했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심정순의 큰 아들 심재덕은 5남매를 두었는데, 그 중 막내가 대중가수 심수봉이란 이야기, 그리고 줄풍류란 거문고, 가야금, 양금과 같은 줄악기들 중심의 합주음악이란 점, 정부에서는 이리와 구례지방의 풍류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이의 보존과 전승을 관장하고 있다는 점, 국립국악원에서는 줄풍류를‘영산회상’또는‘별곡’이라 부른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 속풀이에서는 심상건의 음악활동에 관해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겉으로 들어난 1920~30년대의 일제강점기에 심상건이 활동해 온 공연내용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소개되어 있어서 그가 어떤 곳에서 어떤 공연활동을 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공연활동이 매번 신문에 기사화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그 어려운 시기에 그의 활동범위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점도 짐작이 된다.

그는 주로 ‘조선정악대회’, ‘조선음악협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악무용연구회’등 단체에 소속되어 단체와 인연을 맺고 가야금 산조 이외에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와 같은 무대 공연 이외에도 경성방송국의 방송출현 목록에도 그의 이름은 수백회 이상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그의 방송활동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심상건은 일제 강점기에 가야금의 명인 강태홍이나 한성기, 또는 정남희나 안기옥, 김병호 등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음악인들과 당시 서울무대를 장악했던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 중의 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활동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1930년대에 가야금산조를 녹음한 명인으로는 김해선·심상건·안기옥 등 3인 정도인데, 그 중에서도 심상건은 산조 음반자료를 제일 많이 남긴 명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1925년부터 10여 년 동안 가야금 풍류를 비롯하여 가야금산조, 가야금병창, 단가, 판소리, 시나위, 민요, 기악합주, 무용반주 등 음반을 취입하기 시작해서 약 40여 매의 음반을 취입하였으며, 조국 광복 이후에도  가야금산조의 릴 테입을 남기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자료가‘진양조-중모리-자진모리’로 구성된  30여분 소요의 가야금 산조인 것이다.

이 자료는 1960년대에 <국립국악원> 악사장이었던 김기수(金琪洙)선생에 의해 5선보로 채보되었으며, 1968년에는 또 다시 황병기에 의해 가야금 주법에 맞도록 이조(移調)되어 되살아났던 것이다.

1968년 당시 혁명정부는‘5·16 민족상’을 만들고 전국음악경연대회를 치렀는데 그즈음 가야금 부문의 지정곡이 바로 심상건류 가야금 산조였던 것이다. 참가자들은 심상건의 산조를 배울 곳이 없어 주최측이 마련해 준 악보를 받아들고 음원을 수없이 반복해 들으며 심상건류의 가야금 산조를 재현해 낼 수밖에 없었다.

이 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은 학생이 바로 오늘의 서원숙 교수이다. 그는 그의 출세작이기도 한 심상건 가야금산조와 풍류를 45년간 열심히 갈고 닦아 왔다. 그리하여 이날 그의 농익은 심상건류 가야금산조는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셈이다. 심상건류의 음악을 연구해 온 연구자로, 후학들을 가르쳐 온 지도자로, 그리고 단절 위기에 처한 무형의 유산을 지켜가는 지킴이로 그의 노고는 높이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은사 이혜구 선생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이 기억에 새롭다. 음악회가 끝나고 기자들이 심상건 명인에게 “무슨 재미로 맨날 가야금을 타느냐”고 물었단다. 잠시 머뭇거리던 심 명인의 대답이“헤헤, 그저 줄 풀고 죄는 재미죠!”라고 했다던가!

“음악이란 음의 운동으로 긴장과 이완을 주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한 세계적인 음악미학의 대가 에두아르트 한슬릭(Aduard Hanslick)의 음악관이나 심상건의 풀고 조이는 재미가 음악이라는 말은 서로 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상건의 줄을 죄었다 풀었다 하는 긴장과 이완의 대비가 곧 산조음악의 특징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의 논리가 아님을 알게 만든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