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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97. 신라의 거문고 명인, 옥보고와 귀금선생 이야기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거문고가 고구려시대 처음 전해졌고 왕산악이 대폭 고쳐 만들어 타매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해서 이름을 <검은학금>으로 지었다가 후에 학자를 빼고 <거문고>라 불렀다는 이야기와 신라 자비왕 때에 백결선생이 지었다고 하는 대악은 세모에 걱정하는 아내를 위하여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가야금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까닭은 자비왕이 5세기 말엽의 임금이기에 이 시기는 아직 신라에 거문고가 퍼지기 전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거문고가 신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약 200여년이 지난 9세기 말로 보는 것이 각종 자료에 의한 결론이다. 통일신라 이후의 기록에는 신라의 3죽으로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를 들고 있다. 그러므로 거문고는 고구려-신라-고려-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1,5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귀중한 악기로 자리 잡아 온 대표적인 현악기인 것이다.

고구려 때에는 왕산악이라는 악사가 있어 악기를 고쳐 만들고 곡을 짓고 했다는 기록이 보이나 그 후의 기록이 없어 고구려의 거문고 명인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의 음악조에는 신라의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玉寶高)로부터 비롯된다고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관련 이야기가 매우 재미있게 기록되어 있다.

옥보고는 처음 선생이 없어 홀로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거문고 익히기를 50년 계속 했으며 스스로 30여곡을 지어서 그의 제자인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옥보고가 지었다고 하는 30여곡은 어떤 음악인지 알 수가 없고, 다만 그 이름만이 전해 오는데, 예를 들면 상원곡 1, 중원곡 1, 하원곡 1, 또는 남해곡 2, 노인곡 7, 유곡청성곡 1 등과 같은 음악들이다. 이처럼 옥보고가 지었다고 하는 거문고 음악은 하나의 악곡 이름에 1~7곡이 들어 있는 이름이며 악곡명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속명득은 선생의 가락을 귀금(貴金)에게 전해 주었는데, 귀금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 익히기에 전념하느라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신라의 임금은 자칫 거문고의 음악이 단절될까 염려가 되어서 윤흥(允興)이라는 고급관리를 남원 공사로 보내서 거문고 음악의 보존, 계승에 전념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거문고 음악의 단절을 걱정한 나머지 음악에 조예가 있는 고급관리를 지역의 책임자로 선정하여 특정 임무를 부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시 나라의 지도자들이 음악에 대한 관심이나 존재의 중요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원에 도착한 윤흥은 곧바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총명한 신라의 두 소년,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선발하여 지리산으로 보내어 귀금선생으로부터 거문고 가락을 배워 오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두 소년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선생에게 거문고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귀금선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은밀한 부분, 멋진 가락이나 기교는 가르치지 않고 겉만 핥는 식으로 형식적인 지도만  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윤흥은 그제야 자신의 무례를 알아채고 즉시 부인과 더불어 귀금선생을 찾아가서 이렇게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우리 임금이 나를 이곳 남원에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선생의 음악을 그대로 배워 후대에 전하고자 함인데, 벌써 3년이 지나도록 선생의 비법은 가르쳐 주시지 않으니 제가 임금께 무어라 복명을 하겠습니까!”

지금 같으면 도지사 급 높은 고급 관리가 직접 술병을 들고, 부인에게는 술잔을 들려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예를 갖추고 성의를 다하여 지도를 청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겸손한 태도로 선생의 음악을 간청한 연후에 귀금 선생은 관리를 용서하고 가슴속에 감춰 두었던 <표풍(飄風)>등 3곡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돈과 지위만 있으면 예술을 비하하고 예술인을 하대하는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하여튼 무례한 고급관리를 올바르게 꼬집어 준 귀금선생의 당당한 자세는 오늘날의 많은 음악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니할 수 없다.

자세를 낮추는 겸손함이야 비단 음악을 배우는 일에만 국한되는 문제이겠는가! 귀금에게 거문고 음악을 익힌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그 음악을 전해 주었고 극종 이후로는 거문고로 직업을 갖는 자가 하나 둘이 아닐 정도로 널리 퍼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