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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산 봉수대와 홀로 묻힌 중종 무덤 정릉이야기

[서울문화 이야기 14] 한양의 역사적인 장소 2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5. 나라의 위급상황을 알렸던 목멱산(남산) 봉수대 (木覓山 燧烽臺) 
     *서울 중구 예장동 8-1(시도기념물 14)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목멱산(木覓山,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목멱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여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갑오개혁 다음해인 1894년까지 거의 500여 년 동안이나 쓰였는데 봉수대의 이름은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燧烽)라고도 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현재 남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으로 서울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변방에서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사실을 가까운 관아와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알려 위급한 사태에 빨리 대처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곳에 설치한 봉수대를 이어달리기 식으로 나라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 복원한 목멱산 봉수대(위), 1750년대 도성도에 보이는 봉수대

우리나라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고,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섯을 올렸다. 서울시는 남산 봉수대 말고도 무악동 봉수대와 아차산 봉수대를 복원하고 서울특별시 기념물 13호와 15호로 각각 지정하였다.


봉수는 산마루에 설치한 것인데 바닷가에도 같은 목적으로 세운 연대(煙臺)라는 것이 있다.

다만, 연대는 주로 왜구를 막으려 했던 것으로 직접 전투까지 했던 것이 다르다. 숙종 28년(1702)에 이형상 목사가 쓴 제주도 인문지리지 ≪남환박물≫에 제주에 “봉수와 연대가 63곳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이 63곳 중 대부분 흔적만 남기고 없어졌는데 아직도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연대(山房煙臺)”, 서귀포시 남원읍 “벌포연대(伐浦煙臺)”, 성산읍 “오소포연대” 등 제주도 자료에는 38개가 남아있다고 한다.

   
▲ 제주 성산읍 오조리 제주도지정기념물 23-23호 <오소포연대>


6. 왕비가 셋이나 된 중종이 혼자 묻힌 선릉역 근처 정릉 

서울 지하철 2호선 역 이름에 “선릉역”이 있다. 또 지하철 분당선엔 “선정릉역”도 있다. 이곳엔 실제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 있어 선정릉이지만 선릉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선릉엔 조선 제9대 성종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가 묻혀있고 정릉엔 11대 중종이 홀로 묻혀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중종의 무덤이다. 보통 임금은 왕비와 나란히 묻히는데 정릉에는 왕비 셋을 포함하여 모두 11명의 부인을 두었던 중종이 홀로 잠들어 있다. 왜 중종은 외롭게 홀로일까? 

중종은 둘째 왕비 장경왕후와 서삼릉에 묻혀 있었으나 중종의 셋째왕비 문정황후는 현재의 선릉 자리가 풍수지리상 좋은 땅이라는 이유를 들어 중종 무덤만 옮기게 했는데 그 이면에는 둘째 왕비 장경왕후와 중종이 나란히 묻힐 것을 질투해서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홀로 된 중종의 무덤 정릉

중종을 홀로 옮긴 뒤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힐 속셈이었다. 하지만, 지대가 낮은 이곳은 여름철 홍수 때면 한강 물이 재실까지 차올라 다시 땅을 북돋아야 했는데 그때마다 큰 비용을 쏟아 부어야만 했다. 사정이 이리되는 바람에 문정왕후는 자신의 바람대로 중종 옆에 묻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종은 모두 11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결국은 홀로 외롭게 묻히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임진왜란 당시 선릉과 정릉이 왜군에 파헤쳐져 관이 불타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특히 중종이 묻힌 정릉은 그 훼손이 심해 시신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문정왕후가 풍수를 들먹이며 편안히 잠들어 있던 서삼릉에서 중종을 이곳으로 옮겨 묻지 않았다면 둘째 부인 곁에 고이 잠들어 있을 터인데 하필이면 물구덩이로 옮겨오는 바람에 죽어서도 홀로 외롭게 묻히게 된 것이다.  

*정릉(靖陵)은 중종 무덤, 성북구 정릉동의 정릉(貞陵)은 태조의 둘째왕비 신덕왕후 무덤.